127화. 정요의 부탁
맹 노부인의 시선이 정미에게로 꽂혔고 표정이 한결 너그러워졌다.
“미야, 이리 와보거라.”
정미가 조용히 다가갔다.
맹 노부인이 보기 드물게 정미의 손을 잡았다.
“정말 그 부인을 살리고, 배 속의 아이까지 지켜냈느냐?”
정미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 부인은 이제 깨어났으니, 문제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아이를 지키려면 계속 치료해야 해요.”
맹 노부인이 눈을 반짝였다.
“미야, 어떻게 한 것이냐?”
정미가 얼빠진 체하며 말했다.
“조모님도 알고 계시잖아요. 손녀가 기절했을 때, 북명진인의 점화를 받아 심안이 열렸고, 나중에 셋째 숙부님을 따라 의관에서 공부를 하고, 셋째 숙부님이 저희 집에서 내려오는 부법 집록을 저에게 주신걸요. 최근 계속 열심히 연구한 덕분에 수확이 있었고, 오늘에서야 사용해볼 수 있었던 거예요.”
“좋구나, 정말 좋아!”
맹 노부인이 연거푸 ‘좋다.’고 말했다.
“우리 집안의 부의가 정미에게서 빛을 발할 줄은 몰랐구나.”
그러고는 셋째 나리를 한 번 훑어봤다.
“셋째야, 네가 그 부법 집록을 얘기하는 걸 들어보지 못했는데?”
셋째 나리가 급히 말했다.
“어머니, 그 집록은 늘 의관에서 의학을 배우는 자손들이 연구하도록 보관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아무도 학문을 배우려 하지 않았을 뿐이지요. 그러다 정미에게 재능이 있는 것을 발견해 찾아내서 건네주었습니다.”
맹 노부인이 무표정으로 정미를 바라봤다.
“미야, 그 부법 집록이 지금 네게 있는 것이냐?”
정미가 고개를 끄덕이자, 맹 노부인이 웃었다.
“그건 우리 집안의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보물이다. 미야, 일단 그걸 가져와서 조모에게 보여주거라. 그리고 네가 공부할 수 있도록 베껴서 주마. 집안에서 내려오는 가보는 조심히 다뤄야지. 그렇지 않으냐?”
정미는 그 부법 집록의 소유권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정미는 이미 집록을 다 읽어봤기 때문이었다. 집록의 가장 큰 역할은 아혜가 자신에게 가르쳐준 것을 대조해보는 일이었다.
두 가지를 비교해보면 아혜가 얼마나 열심히 자신을 가르치는지도 알 수 있었고, 정가에서 내려오는 이 부법 집록이 얼마나 정확한지도 알 수 있었다.
정미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조모님, 부법 집록은 지금 비서거에 있으니 손녀가 바로 가지고 오겠습니다.”
맹 노부인은 더욱 상냥해졌다. 그렇게 아끼는 차남이 굶어 기절한 일도 더는 추궁하지 않았고, 손을 휘저으며 한 씨에게 말했다.
“얘야, 어서 가서 둘째를 돌봐주거라. 여기 남아있을 필요 없다.”
“그럼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한 씨는 정미와 함께 나오며 돌아가는 길에 화를 냈다.
“오랫동안 먼지가 내려앉도록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물건을, 네가 배웠다고 하니 바로 뺏어버리는구나!”
정미가 웃었다.
“괜찮아요. 잊으셨나요? 부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재능이에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집록을 봐도 그저 낡은 종이로만 보일 뿐이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백 년이 지나서 제게 넘어오지도 않았을 거고요.”
한 씨는 정미의 말에 웃으며 생각했다.
‘늙은이가 욕심이 너무 많구나. 하지만 어떤 것들은 욕심을 부린다고 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지.’
이렇게 생각하니 한 씨는 왠지 기분이 좋아져 딸을 더욱 흐뭇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렇게 염송당에는 맹 노부인과 셋째 나리만 남게 되었다.
조용히 맹 노부인의 어깨를 주무르던 정요가 갑자기 앞으로 나왔다.
“조모님, 셋째 숙부님, 정요가 드릴 부탁이 있습니다.”
맹 노부인은 정요를 마주하자 그제야 진정으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무슨 일이냐? 말해 보거라.”
이 손녀는 서녀였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매일 찾아와서 자신을 모셨고, 밤에는 머리를 안마해준 덕분에 잠을 잘 잘 수 있었기에, 다른 손자 손녀들보다 더욱 효성스러웠다.
맹 노부인은 몰락한 훈귀 집안의 출신이라, 가업을 지탱할 때 적지 않은 눈총을 받았고, 시집온 후에도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훈귀들 사이에서 배척을 당하곤 했다. 그러니 나이가 들며 자신을 추켜세우는 사람들에게 더욱 너그러울 수밖에 없었다.
“조모님, 손녀도 정미처럼 앞으로 매일 제생당에 가 셋째 숙부님께 배우고 싶습니다.”
이 말에 맹 노부인과 셋째 나리 모두가 놀랐다.
셋째 나리는 내키지 않는 듯했다.
“요야, 부의란 것은 다른 것들과는 다르게 재능이 있어야 한다. 정미는 재능이 있었고, 마침 북명진인의 점화를 받아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이야. 셋째 숙부도 예전에 열심히 연구해본 적이 있는데,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했단다…….”
셋째 나리는 맹 노부인도 반대할 거라 생각하고 말을 멈췄다. 그러나 맹 노부인은 서자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셋째야,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는 시도해봐야 아는 것 아니겠느냐. 정요가 서녀라고 무시해서는 아니 된다.”
셋째 나리의 얼굴이 붉어졌다.
“제가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조카가 적출인지 서출인지는 그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는 그저……, 그저 순수하게 정미를 조금 더 좋아할 뿐이었다.
셋째 나리는 아직도 정요가 기절한 척 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때 이후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 조카에게 조금의 응어리가 맺히게 되었다.
이때 정요가 입을 열었다.
“조모님, 셋째 숙부님, 저도 제게 자질이 없는 걸 잘 압니다. 정미처럼 부의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셋째 숙부께 의학을 배우면 앞으로 조모님을 더 잘 모실 수 있게 되니까요.”
정요가 무릎을 꿇었다.
“조모님, 손녀의 부탁을 들어주세요.”
맹 노부인은 정요의 말에 마음이 활짝 열렸고, 이 손녀가 무슨 계획이 있든 없든 자신을 우선시한다는 것에 기뻐했다.
하나가 가든 둘이 가든 뭐가 다를 게 있겠는가? 노부인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에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다. 내일부터 정미와 함께 가거라.”
염송당 쪽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려오자, 정요가 입을 오므리며 웃었다.
“조모님께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허락하실지는 모르겠네요. 이따 찾아뵙고 여쭤보아야겠어요.”
맹 노부인의 표정이 굳었다.
“내가 이미 허락했는데, 뭐 하러 또 물어보느냐? 설마 정미는 보내주고, 너는 보내주지 않을까 봐? 그런 도리는 없다!”
정요는 웃음을 참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조모님, 그래도 어머니께 말씀드리는 게 좋겠어요.”
손녀의 조심스러운 모습에 맹 노부인은 안타까워하며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아복, 이연원에 가서 둘째 부인에게 전하거라. 내일부터 둘째 아가씨가 셋째 아가씨와 함께 제생당으로 가 셋째 숙부에게 의학을 배울 거라고.”
“예.”
아복은 급히 나갔고, 입구에서 정미와 마주치자 가슴에 손을 모으고 인사했다.
“셋째 아가씨.”
정미는 부법 집록을 품에 안은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방으로 들어갔다.
정미는 당연히 방금 방 안의 대화를 모두 들은 바였다.
“정미 왔느냐?”
맹 노부인은 정미가 이렇게 빨리 물건을 가져온 것을 보고 꽤 기뻐했다. 손녀가 예쁨 받을 줄은 모르지만, 말귀는 잘 알아듣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집안에서 내려오는 보물을 어찌 계집아이에게 물려줄 수 있겠는가.
‘여태 정가의 부의가 이 정도로 대단한 줄은 모르고,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조모님, 이것이 조모님께서 가져오라 하신 물건입니다.”
정미가 부법 집록을 바쳤다. 그녀는 눈을 깔고 서서 눈빛에 드러나는 조롱을 숨겼다.
맹 노부인은 사람을 기사회생시킨 부법 집록에 매료되어 정미의 말투에서 묻어나오는 조롱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손을 뻗어 부법 집록을 건네받았고, 곧바로 열어서 보려고 한 순간 어리둥절했다.
“이, 이게 우리 집안의 부법 집록이라고?”
‘왜 내 눈엔 조잡한 그림만 보이고 아무것도 알아볼 수가 없지?’
맹 노부인의 의심스러운 눈빛에 셋째 나리가 급히 대답했다.
“맞습니다.”
맹 노부인은 반신반의했지만, 자신이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을 밝히기 창피하여 중얼거렸다.
“역시 수준이 높구나.”
셋째 나리가 웃었다.
“맞습니다. 예전에 저도 그 책을 열심히 연구했는데, 현청관의 도사까지 모셔서 여쭤봤으나, 입문도 하지 못했습니다. 부의는 정말 재능이 중요하더군요.”
맹 노부인은 아까 셋째 나리가 말할 땐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지금에서야 그 말을 믿게 되어 정미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정말 재능이 필요한 것이란 말인가. 만약 정가의 집안에 이 계집만 재능이 있는 거라면?’
만약 정가에서 뛰어난 부의가 나오게 되면, 지금과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백 년 동안 이어진 정가의 부귀함도 부의로부터 시작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맹 노부인은 방금 받은 부법 집록을 다시 정미에게로 건넸다.
“미야, 이건 일단 네가 가지고 있고, 베껴 쓰고 나면 다시 조모에게 주거라.”
정미는 돌려받지 않았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조모님. 이 부법 집록에 있는 것들은 이미 다 기억하고 있어요.”
“정말이냐? 정말 다 알아보는 것이야?”
맹 노부인은 자신의 지능이 모욕받았다는 느낌에 믿기지 않는 듯 추궁했다.
정미는 가차 없이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그 그림들을 보자마자 이해하게 되었어요.”
맹 노부인은 생각했다.
‘갑자기 다시는 이 계집을 보고 싶지 않아졌는데, 어떡하지?’
이때 정요가 다가왔다.
“조모님, 손녀도 보고 싶어요.”
정요는 집록의 이상하고 복잡한 그림들을 보고 입가의 웃음기를 거뒀다.
‘이 이상한 그림들로 정말 병을 고치고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정요는 예전에 너무 신중하게 군 탓에 처음부터 정미를 따라 제생당에 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 탓에 이 볼거리를 놓치게 되었으니.
더욱 중요한 것은, 정미가 정말로 사람을 구해 의관을 살린 공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사람을 더 살리게 되어 모두가 아는 명의가 되면 어떡하지?’
영리한 정요는 맹 노부인이 정미를 대하는 태도가 미묘하게 달라진 것을 발견하고 위기감을 느꼈다.
‘내가 그렇게 열심히 잘 보이려고 노력해서 이제야 좀 예쁨을 받을 수 있었는데, 정미는 조금 전 조모님과 아버지를 노발대발하게 만들었는데도 백부에게 이익을 가져오니 곧바로 마음을 얻게 됐구나. 내가 너무 지나치게 신중했어.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그 신뢰와 인정이지, 다른 사람이 베푸는 동정이 아니라고!’
정요는 냉담한 정미를 흘끗 쳐다보며 속으로 한스러워했다.
‘내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을, 정미는 왜 항상 쉽게 얻을 수 있는 걸까?’
정미는 정요의 눈빛을 느끼고 물었다.
“둘째 언니, 왜 쳐다봐?”
정미는 갑자기 어려서부터 정요를 볼 때면 느꼈던 열등감이 어느새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타고나게 우월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그저 이 정도에 지나지 않았구나.’
예전의 정미는 대갓집의 규수들이 중시하는 금기서화나, 자수를 두는 것 등 조그만 부분만 신경 썼다. 그러고는 모자란 자신을 보며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곤 했다.
하지만 직접 생명을 구한 뒤, 새 생명을 주는 느낌은 정철이 그날 했던 말을 떠오르게 했다.
금기서화는 할 줄 알면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라고…….
‘역시 나는 둘째 오라버니만큼 깨닫지 못했구나. 밥벌이도 못 하는 것들로 정요를 그렇게나 질투해왔어. 적녀라고 해도 정요 앞에선 늘 작아지는 것 같았으니까.’
정요는 갑자기 정미가 조금 달라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예전보다 키가 더 커진 듯했고, 더욱…… 기세등등해 보였다.
정요는 이런 변화를 아주 싫어했기에 웃으며 침묵을 깨트렸다.
“정미는 정말 대단하구나. 나는 이 집록을 조금도 알아보지 못하겠는데.”
“그런데도 의관에 가겠다고?”
“응, 사실 난 늘 의술에 관심이 있었거든. 그래서 최근 의서를 혼자 배워보기도 했어. 원래는 말을 꺼내지도 못했는데, 정미가 내게 용기를 준 거야.”
정요가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