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털어놓다
한 씨가 방에 들어서자, 정아가 맞이했다.
“어머니,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한 씨가 방 안의 궁녀들을 흘끗 쳐다봤다.
정아는 이를 보고 한 씨를 내실로 데려간 후 시종들을 내보냈다.
그러자 한 씨가 정아의 손을 덥썩 잡았다.
“마마, 이 어미에게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최근 이상한 것을 복용하지 않으셨습니까?”
정아는 가슴이 철렁하여 급히 말했다.
“없습니다.”
태아의 성별을 바꾸는 건 하늘을 거역하는 일이라, 밖으로 새어나가면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정아는 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어머니, 왜 그런 걸 물으세요?”
한 씨는 진지한 표정으로 오늘 정미가 젊은 부인을 구한 일을 이야기한 뒤 말했다.
“마마, 정미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걸 아시겠지요. 오늘 정미가 또 마마께서 태아에게 좋지 않은 것을 복용하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리 급히 마마를 뵈러 온 것입니다.”
그러고는 정아를 빤히 쳐다봤다.
“마마, 마마께선 어려서부터 주관이 뚜렷하셨지요. 하지만 이 궁의 내원은 다른 곳보다 마마의 눈과 마음을 가릴 사람이 많을 겁니다. 정미가 어리다고 그 아이의 말을 마음에 두지 않았지만, 지금 그 아이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 그 말들을 가벼이 여겨선 안 됩니다. 정미는 마마의 친여동생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 어미를 제외하고, 정미만이 마마가 잘 되기만을 바랄 겁니다.”
정아는 이미 식은땀이 흥건했고 저도 모르게 아직 마시지 못한 부수를 흘끗 쳐다보고는 한 씨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어머니, 정미를 궁에 불러와 주세요. 저, 정미에게 따로 할 말이 있습니다.”
* * *
정미는 제비집 죽을 두 그릇 먹고 나서야 기력을 조금 회복했다.
화미는 영리한 시종이었기에 정미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아가씨, 등을 주물러드릴게요.”
정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돌렸고, 화미의 안마에 저도 모르게 잠에 들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푹 자기도 전에 궁에서 정미를 데리러 왔으므로, 급히 단장한 후 내시를 따라 궁으로 향해야 했다.
* * *
정아는 오랫동안 궁에서 지내왔기에 방금의 일에 조금 넋을 놓다가도 금방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녀는 정미가 내시를 따라 들어오는 것을 보고 부드럽게 말했다.
“정미, 내 옆으로 오렴.”
“태자비마마를 뵙습니다.”
정미가 예를 갖추고는 정아의 곁으로 갔다.
친자매라도 정미는 내시와 궁녀 앞에선 예의를 갖추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어색하지 않게 정아에게로 걸어갔고, 정아를 바라보다가 발걸음이 멈칫했다.
“미야?”
정아는 발걸음을 멈춘 정미를 보고 한 씨의 말이 떠올라 가슴이 철렁했다.
정미는 티 내지 않고 다가가 정아에게 기댔다.
“큰언니.”
정아가 웃었다.
“자, 들어가서 얘기하자.”
한 씨는 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정아가 정미를 데리고 들어오자 급히 다가갔다.
“미야, 큰언니가 네게 할 말이 있다는구나.”
“네.”
정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미는 최근 일 년 동안, 마음속으론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야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약접―”
정아가 외쳤다.
그러자 약접은 한쪽 벽으로 걸어가더니, 벽의 사계산수도(四季山水圖) 옆을 한 번 눌렀다. 그러자 삐걱하는 소리와 함께 사계산수도가 돌아가더니 사람 한 명이 드나들 수 있는 구멍이 나왔다.
“정미, 나를 따라 암실로 가서 얘기하자.”
정아가 멍하니 있는 정미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고, 고개를 돌려 한 씨에게 분부했다.
“어머니, 저 대신 여기를 봐주세요. 만약 누가 오면 약접에게 우리를 부르라 말씀해주시고요.”
한 씨는 갈수록 일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고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이야기 나누세요. 여긴 제가 있겠습니다.”
정미는 정아를 따라 암실로 들어갔고, 차가운 눈으로 정아가 문을 닫고 등불을 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정아가 뒤돌아서자 어두컴컴한 등불 아래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정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큰언니, 어제 또 그것을 복용하셨지요?”
“보이니?”
좁고 은밀한 공간이 정아에게 안정감을 준 탓인지, 어린 동생 앞에서 더는 냉정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
“큰언니, 제가 어제 말씀드렸잖아요. 그것을 계속 복용하면 안 된다고요. 적게 마실수록 태아에 대한 영향이 줄어들 거예요.”
정미가 이리 급하게 여인의 몸으로 제생당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을 구한 이유는 사람들이 최대한 빨리 자신의 능력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야만 정미의 말에 무게가 실릴 터였다.
정미는 정아가 자신의 권고를 귀담아듣지 않았다는 것에 실망스러우면서도 힘이 빠졌다.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기에, 늘 정미를 어린아이로 대하는 큰언니가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복용한 것이 태아에게 영향이 있다고 했는데, 어……, 어떤 영향을 말하는 거야?”
정아가 정미의 손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정미가 설마 그게 성별을 바꾸는 부수라는 걸 알아본 건가? 소진 도사는 그 부수가 태아의 성별을 바꿀 수 있다고만 했지, 다른 영향이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어. 부작용이 있는 건 아니겠지?’
정아는 소진 도사의 부수를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기에, 그저 그 부수의 부작용만이 걱정될 뿐이었다.
정미가 눈을 들어 정아를 바라봤다.
두 자매는 한 씨를 닮아 키가 컸지만, 정미는 나이가 어려 언니보다 조금 작았다.
“큰언니, 도대체 뭘 복용하신 건지 제게 알려주셔야 해요.”
정아가 멈칫했다.
정미는 한숨을 쉬며 정아의 차갑고 축축한 손을 잡았다.
“큰언니, 저는 언니의 친동생이에요. 저보다 언니의 안녕을 바라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요.”
정미는 만약 자신의 수명중 반을 바쳐서 큰언니가 평생 평안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큰언니가 평안하고 순탄하게 지내기만 하면, 정요는 태자의 양제가 될 수 없을 터였다.
‘그럼 앞으로의 악운도 일어나지 않을지도 몰라. 나는 힘이 약하니, 많은 것을 바꿀 수는 없을 거야. 그저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바꿔볼 수밖에 없어. 죽어도 정요가 태자의 양제가 되게 둘 수 없으니까!’
어린 동생의 솔직한 눈에서 단호함과 슬픔이 느껴진 탓인지, 정아는 결국 한 씨에게조차 말하지 않으려고 했던 말을 뱉어냈다.
“정미, 사실 내가―”
정미는 조용히 경청했다.
그녀의 또렷한 눈동자는 몹시 아름다웠고 조용히 마주하고 있으면 속마음을 절로 털어놓고 싶어졌다.
“내가 복용한 것은 태아의 성별을 바꿀 수 있는 부수야…….”
이 말에 정미의 표정이 굳었다.
정아는 원래 그 부수가 마음에 걸렸기에, 정미의 표정을 보고 붙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미야, 뭔가 좋지 않은 거니?”
정미가 정아를 바라보며 깊게 한숨 쉬었다.
“큰언니, 제가 배우는 부의에는 열세 가지 과목이 있고, 부수는 천 가지가 넘어요. 하지만 태아의 성별을 바꾸는 부수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어요!”
정아가 당황하더니 혼란스러운 마음을 꾹 참으며 말했다.
“혹시, 혹시…….”
정아는 혹시 정미가 아직 모든 부수를 알지 못하는 게 아닌지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말해준, 정미가 죽어가는 부인을 살리고 배 속의 아이까지 지켰다는 이야기가 떠오르자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정미는 정아에게 주저할 시간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큰언니, 제 학문이 얕은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그런 부수는 절대 없어요. 태아의 성별을 바꿀 수 있다니, 그건 사술(邪術)이겠지요! 만약 정말 그런 사술을 쓴 거라면, 천벌을 받을 겁니다!”
정아는 다리가 풀려 순간 쓰러질 뻔했다.
“큰언니, 도대체 누가 언니에게 이런 부수를 마시도록 꼬드긴 거예요? 배 속의 아이는 원래부터 사내아이인걸요!”
정아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원래부터 사내아이라고?”
정아는 정미가 이 말을 여러 번 한 것을 알고 있었다. 웃어넘겼던 그 말들이 지금은 온몸에 소름을 돋게 했다.
“소……, 소진 도사야. 하지만, 소진 도사가 나를 속일 이유가 없어. 내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여자아이라고 했는데…….”
정미의 눈에 분노가 스쳤다.
“그 소진 도사란 자는 정말 가증스럽군요. 부의와 어울리지 않아요! 그 도사도 분명 큰언니의 배 속에 사내아이가 있다는 걸 알았을 거예요. 그런데도 여자아이라고 말해 자신의 부수를 마셔야 사내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말하다니, 나중에 큰언니가 황손을 낳으면 자신의 공으로 돌릴 생각이었겠지요!”
정아는 소진 도사의 속내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정미의 손을 잡고 물었다.
“태아에게 어떤 영향이 있는 거야?”
정미가 고개를 저었다.
“태아가 배 속에 있을 땐 여러 가지 복잡한 영향을 받기에 정확히 말하기는 어려워요. 하지만 그 부수는 태아에게 절대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을 거예요. 만약 제가 본 게 맞다면, 나중에 아이를 낳았을 때―”
정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정아가 당황하며 재촉하자, 그녀는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의식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어요!”
정아는 결국 주체하지 못하고 의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정미가 급히 정아를 부축했다.
“큰언니, 걱정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그 부수는 더 이상 드시지 마시고, 아이를 낳고 나서 제가 방법을 생각해볼게요.”
“미야, 정말 방법이 있는 거야?”
정미는 확신이 들진 않았지만, 언니의 모습을 보니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있을 거예요.”
정미는 기회를 틈타 예전부터 생각해왔던 부탁을 꺼냈다.
“하지만 나중에 출산을 할 때, 제가 옆에서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해주셔야 해요.”
정아가 지금 상황에서 정미의 부탁을 거절할 리 없었다. 정아는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정미의 마음속에 있던 큰 짐이 덜어지는 듯했다.
정미가 계속 사람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알리는 데 급급했던 이유는 바로 큰언니의 신임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큰언니가 난산할 때, 난 황궁에 발도 들이지 못할 텐데 어찌 사람을 구할 수 있겠어.’
정미는 저도 모르게 작게 미소지었다.
‘역시, 내가 노력만 하면 희망이 있구나.’
어린 동생의 침착함이 정아에게 위로가 되었는지, 정아는 점점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러고는 정미에게 오늘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한 뒤 함께 암실을 나갔다.
* * *
한 씨는 정미를 데리고 황궁을 떠나 집으로 돌아왔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염송당으로 불려갔다.
염송당에 들어가자 한 씨에게로 찻잔이 날아왔다.
“둘째가 제생당에서 굶어 기절한 걸 알고 있는 것이냐!”
한 씨는 재빨리 찻잔을 피하며 정미를 잡아당겼다. 찻잔은 문틀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맹 노부인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 씨 모녀를 훑어보더니 더욱 노했다.
“둘째를 신경 쓰고 있지 않았던 것이냐?”
맹 노부인은 한 씨를 책문한 뒤 옆에 서 있는 셋째 나리를 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너, 네 둘째 형님이 허리를 다쳤는데 옆에서 봐줄 사람 하나 두지 않고 굶게까지 하였더구나! 의관에서 대체 뭘 한 게냐?”
셋째 나리도 염송당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맹 노부인의 분노에 상황을 설명했다.
“어머니, 오늘 의관에 소란이 일어서 그 일을 처리하느라 잠시 신경 쓰지 못했―”
셋째 나리는 꽤나 송구스러웠다.
그는 한 씨 모녀가 떠나면서 둘째 형님을 데리고 간 줄 알았다.
‘하지만 양쪽 모두 생각이 엇갈렸고, 둘째 형님은…….’
맹 노부인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어리석은 것! 소란이 일어난 게 뭐 어떻다는 것이야? 무슨 일이 네 둘째 형님의 부상보다 중요하다는 게야!”
셋째 나리는 머리를 숙이며 오늘의 일을 설명했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다행히 정미가 나서서 그 젊은 부인을 살려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희 의관의 백 년 동안 이어진 명성이 한순간에 무너졌을 겁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맹 노부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는 제생당이 백 년간 이어온 명성뿐만 아니라 백부에 들어오는 수입까지 떠올랐다.
‘제생당은 백부의 아주 중요한 수입원인데!’
“그랬구나. 오늘 수고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