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의관에서의 충돌
잠시 후, 정미는 붓을 옆에 내려놓고 문진으로 종이를 눌렀다.
“셋째 숙부님, 일단 이렇게 놔두세요. 이따 돌아와서 정리할게요.”
정미에게 이 기록들은 아주 귀중한 자산이었기에, 책으로 제본해 수시로 읽을 계획이었다.
“숙부님, 가요.”
두 사람은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때, 셋째 숙부가 조용히 당부했다.
“미야, 오늘 네 아버지의 안색이 그리 좋지 않더구나. 아마도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으니, 이따 아버지를 뵐 때 말을 조심하거라.”
정미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숙부님. 알겠어요.”
정미는 셋째 나리를 따라 둘째 나리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둘째 나리는 몸을 돌려 눈에 쌍심지를 켜고 정미를 노려봤다.
정미가 다가가서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
“닥치거라!”
셋째 나리는 신경 쓰이지도 않는 듯한 둘째 나리는 흥분하며 대로했다.
“못된 계집, 나를 아버지라 부르지 말거라!”
정미는 이유를 알 수 없어 무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셋째 나리가 급히 말렸다.
“둘째 형님, 진정하세요. 할 말이 있으면 좋게 말하면 되지, 정미는 아직 어린 아가씨이니 놀라게 하지 말고―”
둘째 나리가 셋째 나리를 밀어냈다.
“아직 너한텐 말도 하지 않았거늘. 정미가 제멋대로 군다고 너도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 매일 제생당에 오는 걸 허락하다니! 버젓한 백부의 아가씨가 의관에 와서 선생질을 하다니, 이 말이 퍼져나가면 무슨 꼴이 될 것 같으냐!”
셋째 나리는 기분이 나빠졌고 표정도 진지해졌다.
“정미는 선생을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형님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정미에겐 부의의 재능이 있어요. 의관에 온 것은 의학 지식을 배워서 부의 공부에 도움이 되고자―”
“입 다물거라!”
‘부의’라는 말은 둘째 나리를 자극했고, 형제에게도 인정사정없이 말을 쏟아붓게 했다.
“오늘 내가 온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셋째야, 이 못된 계집이 바깥에서 뭐라 말하고 다니는지 아느냐? 자신이 북명진인의 점화를 받았다고 말하고 다니더구나. 이게 얼마나 우스운 일이냐! 이 우스운 말 때문에, 소진 도사는 이미 상당히 불쾌한 상태다. 사람들 모두가 이를 알게 되면 내가 관리들 앞에서 어떻게 얼굴을 들 수 있겠느냐?”
정미는 조용히 듣다가 깨달았다.
‘그때 궁에 들어가 한 말들이 역시 퍼져나갔구나. 내가 부의가 된 것에 그럴듯한 이유를 붙인 건 원래 나의 계획이었어. 북명진인이 이 말을 듣고 그냥 웃어 넘길 수도 있고,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아니면 호기심이 일어 나를 한 번 만나볼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하지만 소진 도사에게 불똥이 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바였다.
정미는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소진 도사는 북명진인의 제자이고, 일반인들 눈에는 신선과도 같아 근처에도 가지 못할 인물인데, 어찌 이런 사소한 일로 아버지를 자극했을까?’
마치 개미 한 마리가 호랑이를 물어 죽일 수 있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호랑이가 이를 듣고 굳이 그 개미를 찾아가 밟아 죽이는 일인 것 같았다.
‘개미도 우습지만, 그런 호랑이도 우스워 보이지 않나?’
둘째 나리는 허리를 짚고 성큼성큼 정미 앞으로 걸어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못된 계집, 나와 집으로 돌아가자꾸나. 앞으로 네가 또 제생당에 왔다는 게 내 귀에 들어오면 네 다리를 분질러 버릴 것이다!”
둘째 나리가 정미를 끌고 밖으로 나가자, 셋째 나리가 급히 막았다.
“형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좋게 말씀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제야 정미는 정신을 차렸다.
최근에 너무 자극적인 일들을 많이 겪어서인지, 정미는 아버지에게 끌려가면서도 침착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힘을 주어 둘째 나리를 뿌리치고는 제자리에 서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미가 의도한 바와 다르게, 허리를 삐끗했던 둘째 나리는 정미가 갑자기 손을 뿌리치자 비틀거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우직하는 선명한 소리와 함께 요추를 접질려 버리고 만 것이다.
둘째 나리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정미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차가운 눈빛으로 이를 방관했다.
셋째 나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조카가 힘이 이렇게 좋았나?’
“못된 것, 이 못된 계집……!”
둘째 나리는 통증 때문에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손을 뻗어 정미를 가리켰다.
이때, 한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정미가 쳐다보자, 한 씨가 급히 걸어들어왔다.
“어서 이 못된 계집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 가법으로 처벌하시오!”
한 씨는 방 안의 상황을 둘러보더니 이해가 되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나리, 미가 왜요?”
“왜라니? 저 계집이 허튼소리를 해서 소진 도사의 심기를 건드렸고, 방금은 감히 내게 손을 대려고 했소. 보이시오? 이게 바로 당신이 키운 딸이오! 돌아가면 어머니께 알리고, 곧바로 저 계집을 가묘로 보내야겠소!”
이때, 정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정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청량했으며,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정미의 목소리에 세 사람의 시선이 쏠렸다.
정미는 위축되지 않고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둘째 나리와 조금 더 가까워졌다.
“아버지의 말씀은, 제가 소진 도사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저를 가묘로 보내시겠다는 뜻인가요? 그럼 만약 어머니께서 소진 도사의 미움을 받으면요? 그럼 어머니와 이혼하실 건가요? 아, 사실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신다고 해도 제겐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지만요. 하지만 그래도 조금 궁금하네요.”
정미는 잠시 멈칫하더니 한 씨와 셋째 나리를 한 번 쳐다보고는 갑자기 웃었다.
“만약 조부님, 조모님이 소진 도사의 심기를 건드리시면요? 그럼 어떻게 하실 건가요?”
둘째 나리는 아프면서도 화가 났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한 정미의 물음에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정미가 비웃었다.
“어머니, 셋째 숙부님, 보세요. 이분이 바로 제 아버지예요. 딸이 다른 사람에게 의심을 받았고, 심지어 그 사람이 아직 뭔가를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아버지라는 사람이 딸을 처벌하기에 바쁘네요. 이런 사람을 아버지라 할 수 있겠어요?”
정미는 공허한 눈으로 한 씨를 바라봤다.
“어머니, 그럼 어머니는요?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저를 집으로 데려간 뒤 가묘로 보내실 건가요?”
둘째 나리는 마침내 목소리를 되찾았고, 힘겹게 두 글자를 뱉었다.
“부인…….”
한 씨는 둘째 나리를 보다가 다시 정미를 바라봤다.
그녀의 부군은 난처한 모습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화를 내고 있었다.
그녀의 딸은 꼿꼿이 서 있었고 표정은 냉담했으나 눈빛에서는 처량함이 묻어나왔다.
이 사내는 그녀가 20년 가까이 연모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엔 딸의 말이 맞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 씨는 정미와 나란히 서서 둘째 나리를 바라봤다.
“나리, 정미의 말이 맞습니다. 부모 된 사람으로서 어찌 다른 사람의 말에 친자식을 처벌할 수 있겠습니까? 소진 도사가 정미에게 뭔가 불만이 있다면, 나리께서 소진 도사에게 해명해드리면 되는 일입니다. 소진 도사가 듣지 않으면 그뿐이고요.”
“무식한 여편네가 뭘 안다고!”
둘째 나리는 한 씨가 정미의 편을 들 줄 몰랐기에, 화가 나 피를 토하고 싶을 정도였다.
한 씨는 둘째 나리를 깊이 은애했지만, 일부 원칙적인 문제에는 늘 확고한 입장이었다.
둘째 나리는 자신을 제 목숨보다도 은애하는 줄 알았던 여인이 이것도 저것도 동의하지 않자, 사실 한 씨는 자신을 은애했던 게 아니라고까지 생각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나리. 저는 그저 만약 누가 제 딸에게 불만이 있다면, 제가 그 사람에게 더욱 불만이 생길 뿐입니다. 낯선 사람의 만족을 위해 친딸을 벌주는 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한 씨가 고개를 돌려 정미를 토닥였다.
“미야, 계속 공부하고 있거라. 네 아버지께서 다치셨으니, 나는 아버지를 데리고 우선 돌아가마.”
이때 셋째 나리가 마침내 끼어들었다.
“형수님, 제가 보기엔 형님이 요추를 접질린 것 같습니다.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되니, 우선 침상으로 옮긴 뒤 제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제 선에서 안 될 것 같으면 태의를 모셔야 합니다.”
둘째 나리는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염치없는 자식들이 드디어 내 허리 상태를 생각해냈구나!’
“당신, 내가 한 번 더 말하겠소. 정미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시오!”
그러고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말을 듣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지 알고 있겠지?”
한 씨는 눈을 내리깐 채 둘째 나리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고, 셋째 나리에게 말했다.
“어서 침상으로 올려드립시다.”
셋째 나리가 고개를 끄덕이고 사람을 부르려고 했을 때, 갑자기 밖에서 한바탕 소동이 난 듯 큰 소리가 들려왔다. 곧 머슴 한 명이 급히 들어와서 황공한 표정으로 말했다.
“셋째 나리, 큰일 났습니다. 누가 소란을 피우러 왔어요!”
“무슨 일이냐?”
셋째 나리의 표정이 굳었다.
머슴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작년에 저희 의관에 환자로 왔던 부인이라 하는데, 의원이 ‘기혈양휴(氣血兩虧)’라 진단했답니다. 그런데 어젯밤 갑자기 큰 출혈이 나 의원을 모셔서 진찰을 봤는데, 이미 회임한 지 삼 개월이라 했다는군요.”
셋째 나리가 바깥으로 나가면서 물었다.
“환자는 지금 어떤가?”
그 머슴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지금 그 부인의 가족에게 실려 와 의관의 입구에 놓여 있습니다. 가망이 없다고, 저희 의관에게 책임을 지라 하고 있습니단! 셋째 나리,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지금 많은 사람들이 밖에서 떠들썩한데, 이 일은 정말 쉽지 않겠습니다…….”
머슴의 하소연을 따라 두 사람은 점점 멀어져갔고, 둘째 나리와 모녀는 방 안에 남겨졌다.
정미가 발을 뗐다.
“저도 가볼게요.”
그러자 한 씨가 정미를 붙잡고 말했다.
“미야, 여자아이가 아무 데서나 얼굴을 드러내선 안 된다.”
정미는 바깥 상황에 마음이 쓰여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방으로 돌아가서 유모(帷帽)를 가져올게요.”
정미는 이 말을 남긴 채, 둘째 나리를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쳐서 급히 나갔다.
순식간에 방 안엔 한 씨 부부만이 남게 되었다.
한 씨도 몹시 걱정이 되었다.
크게 보면, 제생당은 회인백부에서 백여 년간 대를 이어온 의관이었다. 정말 사고가 나게 된다면 백부의 명성에도 피해가 될 것이고, 앞으로 집안 형편이 더욱 안 좋아질 것이다. 작게 보면, 셋째 나리가 정미에게 확실히 잘 대해주긴 한다지만, 제생당은 계속 그가 관리해온 것이기 때문에, 한 번 무너지게 되면 셋째 나리의 생활은 앞으로 좋지 않아질 터였다.
한 씨는 한숨을 쉬고, 둘째 나리의 앞에 다가가서 허리를 굽혀 가뿐하게 그를 안아 올린 뒤 창가의 침상에 올려놓았다.
“나리, 우선 여기서 쉬세요. 저도 한번 가보겠습니다.”
여인에게 안겨 침상에 오르다니, 둘째 나리는 모욕을 당한 기분에 욕설을 퍼붓고 싶었지만, 방 안엔 파리 한 마리조차 없었고, 욕을 해봤자 자신만 듣는 것이었기에 그저 주먹을 세게 쥐고 침상을 내리쳤다. 그러나 너무 힘을 준 탓에 허리가 더욱 아파 와 눈이 뒤집히며 기절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