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겁먹은 화량
마침내 육출화재의 문이 열렸고, 기다리고 있던 사동들이 몰려들었다.
가게의 주인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한수 선생에게 일이 생겨 이번 책은 세 부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늘 그래왔듯 가격을 높게 부르는 분에게 팔겠습니다.”
세 부밖에 없다는 말에 사동들은 혈안이 되었다.
그들의 주인은 세자 아니면 소왕야(*小王爷: 왕의 아들을 부르는 경칭)거나, 고관들의 공자였다. 어제 이미 당부하기를, 만약 한수 선생의 신간을 가져오지 못한다면, 머리를 칠 것이라 했다.
살 수 없다고 해도 정말 머리를 치기까진 하지 않겠지만, 돌아간 후 욕을 한 바가지 먹은 뒤 월급이 깎이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수도의 높으신 도련님들은 대부분 동창이라, 사동끼리도 사실 낯이 익은 사이였다. 누가 주인을 위해 일을 잘 처리하느냐가 사동들의 영광이었다.
회인백부 둘째 공자의 사동, 팔근이 바로 모든 사동을 술로 이겨서 수석 사동이 될 수 있었던 것 아니던가.
“은 오십 냥을 내겠소!”
“오십 냥이라니, 웃음거리가 되지 말고 바람이나 쐬러 가시오. 나는 백 냥을 내겠소!”
치열한 경쟁 끝에 책은 모두 팔렸다. 가격을 가장 높게 부른 자는 더 물을 필요도 없이 당연히 목은백부(沐恩伯府) 화 공자의 사동이었다.
화량은 한수 선생의 열렬한 독자로, 계절마다 새로 나오는 책이라면 반드시 구매해 그간 정철의 금고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해왔다.
그렇기에 오늘 화량의 사동은 목숨을 걸어서라도 책을 사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온 것이다.
어젯밤 그의 도련님은 늦은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아 온 집안이 들썩였다. 한밤중에 오성병마사(五城兵马司)의 각 관리와 병사들을 놀라게 했고, 심지어 금린위의 대인들도 밤새 도련님을 찾아다녔다. 결국 이른 아침이 되어서야 감방에서 그를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
도련님도 참 대단했다. 집으로 돌아와 깨어난 후 내뱉은 첫마디가 바로 이것이었으니.
‘한수 선생의 신간은 사러 갔느냐?’
말을 마친 그는 다시 눈이 뒤집히며 기절했고, 나리와 부인은 도련님이 육출화재 밖에서 밤새 줄을 서 있었던 것으로만 알았다. 부인은 육출화재를 불태워버려야겠다고 노발대발하였다.
결국 사동이 목숨을 걸고, 만약 육출화재를 불태우면 도련님께서 분명 죽고 싶을 정도로 슬퍼하실 거라고 말했고, 부인은 그제야 포기했다.
사동은 새로 산 책을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육출화재의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목은백부의 마차를 타고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 * *
마침 화량은 막 깨어나 눈 밑이 짙은 채로 약을 먹고 있었다.
화량의 모친은 침상 옆에 앉아 눈물을 닦고 있었다.
“량아, 도대체 무슨 일이니? 어미에게 말해보렴. 누가 너를 이 꼴로 만든 것이야. 어미가 꼭 되갚아주마.”
“어……, 머니…….”
화량은 목이 쉬어 목소리가 아주 괴롭게 들렸다.
화가의 둘째 나리가 말했다.
“부인, 우선 안심시키고 약부터 빨리 먹이시오. 화량이 괜찮아지면 어떻게 된 일인지 정확히 알아봅시다. 량이를 해한 범인은, 흥, 도망가봤자 손바닥 안일 테니!”
“그래요, 그래. 나리의 말씀이 맞습니다. 량아, 어서 약을 먹으렴.”
화량이 힘겹게 손가락 하나를 뻗었다.
“사탕…….”
약을 먹이던 예쁘게 생긴 여종이 화량의 뜻을 알아차리고 급히 몸을 돌렸다. 그녀는 그가 가리키는 방향에 있는 단지를 열어 설탕에 절인 매실을 한 알 꺼내 먹여주었다.
화량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다시 탕약을 한 모금 마셨다.
이때 사동이 들어오며 화량을 보고 기뻐했다.
“공자님, 일어나셨군요!”
“책…….”
사동이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샀습니다, 샀어요. 안심하세요!”
화량이 검푸른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고, 부모를 보며 또 힘겹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가세요…….”
화가의 둘째 나리와 부인은 서로를 마주 보다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치 빠른 사동이 용감하게 말했다.
“나리, 부인, 공자께서 소인이 사온 책을 읽어주길 원하셔서, 두 분은 먼저 가보시라 하시는 겁니다.”
나리와 부인의 입꼬리가 동시에 올라갔다. 그들은 돼지머리처럼 부어오른 아들을 다시 쳐다보더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화량은 괴로운 몸을 가누고, 사동이 이야기책을 읽어주는 것을 들었다.
이번 이야기는 조금 달랐는데, 주인공이 부귀한 출신의 놀음을 좋아하는 풍랑가였다.
이 주인공은 뛰어난 외모에 재주도 좋아, 하는 일마다 순조로웠으며, 유명한 명기도 그에겐 한 푼도 받지 않을 정도였다. 나중엔 공주가 그를 보고 첫눈에 반해 끝까지 쫓아다녔고, 그의 시원시원한 성품은 모두가 알았다.
하지만 주인공의 운명은 아주 사소한 일로 인해 뒤바뀌어버렸다.
그가 그림을 그리러 한 촌락에 갔을 때, 우연히 아주 아름다운 시골 처녀를 만나 그녀를 취하려 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 시골 처녀는 아주 거친 성정이었고, 주인공을 변태로 여겨 시원하게 두들겨 패준 후 강에 빠트려버렸다.
주인공은 돌아간 이후 열이 나고 병을 얻었는데, 다 나은 뒤로도 기분이 풀리지 않아 집안사람들에게 이 일을 알렸고, 집안사람들은 그 촌락으로 사람을 보내 그 시골 여인을 처리해버리고 말았다.
주인공은 이 일을 사소한 일이라 생각하고 넘겼다. 그러나 이 일이 퍼져나가자, 그를 쫓아다니던 여인들은 그를 피해 다니며 꽁무니도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그를 가장 좋아하던 공주조차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그는 크게 당혹스러워하며 공주를 붙잡고 그 이유를 설명해달라 했으나, 공주는 차갑게 웃고는 유유히 떠날 뿐이었다.
나중에 결국 명기가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아무리 훌륭한 사내라도 여인 하나를 이기지 못하다니, 역시 시를 잘 읊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더군요. 이것만으로도 한심한데, 당신이 이 일을 스스로 털어놓고, 여인 하나를 상대로 집안의 힘을 쓰다니, 사람들이 멸시할 만도 하지요.’
명기의 말이 퍼져나가 주인공은 다시는 여인의 마음을 얻을 수 없었고, 몇 년 후 어렵사리 아내를 얻었지만, 면사포를 걷어낸 얼굴은 아주 추했고, 그는 곧바로 놀라 기절해버렸다.
이야기의 절정은 바로 마지막에 있었다.
주인공이 의식을 회복했을 때, 그는 몇 년 전으로 되돌아가 병상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그때, 어머니가 그의 눈물을 닦으며 누가 이 꼴로 만든 것이냐 묻고 있었다…….
“공자님?”
사동은 이야기를 다 읽고 난 뒤, 주인의 표정이 이상한 것을 보고 급히 불렀다.
화량이 겁먹은 얼굴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덜컥 두려워졌다.
“주인님, 왜 그러십니까, 소인을 놀라게 하지 마세요!”
바깥방을 지키던 나리와 부인이 소리를 듣고 급히 들어왔고, 부인이 화량의 손을 잡고 울며 물었다.
“우리 량이, 왜 그러니? 어디가 아프니, 이 어미에게 말해보렴.”
화량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어머니를 보더니, 저도 모르게 벌벌 떨며 고개를 저어댔다.
부인은 조금 안심했고, 약을 다 마신 것을 보고는 사동과 여종을 물러나게 하고는 부드럽게 물었다.
“그럼 어미에게 말해주려무나. 누가 너를 해한 것이냐. 꼭 되갚아 줘야겠다!”
화량은 질겁한 표정으로 벌벌 떨었다.
“량아, 량아…….”
화량은 두 눈을 뒤집으며 놀라 기절해버렸다.
화씨 집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화량이 겨우 깨어나서 부인이 누가 범인인지 물으면, 그는 또다시 기절했고, 몇 번을 반복한 후에야 부인은 더는 묻지 않고 아들이 귀신에 들렸다고 여겼다. 이후 그녀는 조용히 소진 도사에게 악마를 쫓는 부적을 요청했다.
그 다음의 일은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 * *
이날, 화씨 집안뿐만 아니라 회인백부의 이연원도 떠들썩했다.
한 씨가 신발 밑창을 꿰매고 있을 때, 발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정가의 둘째 나리가 보였다.
한 씨는 뜻밖의 상황에 반쯤 꿰맨 신발창을 급히 옆으로 밀어냈고, 다급한 나머지 바늘에 손가락을 찔렸지만, 아파할 새도 없이 웃으며 물었다.
“나리께서는 일을 마친 뒤 관아에 간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찌 돌아오셨는지요?”
둘째 나리는 차가운 얼굴로 한 씨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물었다.
“정미는?”
한 씨는 당황했다.
둘째 나리의 안색은 더욱 안 좋아졌고 이를 갈며 말했다.
“장공주부에 갔소?”
“아니요, 제생당에 갔습니다.”
정미가 매일 제생당에 가는 일은 시간이 지나며 점점 집안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바였지만 아무도 이에 대해 굳이 언급하진 않았다.
사실 둘째 나리도 이를 알고 있었으나, 이 모녀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기에 당연히 묻지 않아 왔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일을 마친 뒤, 그는 무심코 소진 도사와 마주치게 되었고, 그녀가 ‘셋째 아가씨께서 북명진인의 점화를 받았다고 말했냐’고 물어왔다.
소진 도사의 말엔 질책하는 뜻이 없었지만 불쾌함이 묻어나왔고, 둘째 나리는 이를 알아챌 수 있었기에 곧바로 분노했다.
‘소진 도사가 어떤 인물인데. 북명진인이 가장 아끼는 제자이고, 북명진인은 황제도 예의를 차리는 인물이다. 골칫덩이 딸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인물에게 미움을 받다니!’
둘째 나리는 그때부터 관아에 갈 마음이 사라진 터라, 당연히 집으로 달려와 한 씨를 찾아 책문한 것이다.
“제생당에 갔다고?”
나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계집아이가 거기 가서 무엇을 하려고!”
한 씨가 설명했다.
“나리, 나리께선 모르시지요. 정미는 부의에 재능이 있습니다. 정미가 제생당에서 셋째 숙부에게 의학 지식을 배우고 싶다고 해서, 저는 여자아이에게 능력이 있어서 나쁠 게 없다고 생각해 제생당에 가도록 허락했습니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둘째 나리가 발을 들어 한 씨를 걷어찼다.
하지만 한 씨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따라 무술을 배운 사람이었기에, 본능적으로 피했다.
둘째 나리는 한 씨가 이렇게 민첩하게 피할 거라 생각지 못해서, 허공에 발길질을 해 허리를 삐끗하고 말았다.
“가, 감히 피하다니!”
둘째 나리가 허리를 짚고 고함쳤고, 한 씨는 마음이 아파왔다.
“나리, 하실 말씀이 있으면 말로 하세요. 어찌 사람을 걷어차십니까?”
“당신!”
둘째 나리가 한 씨를 노려보았다. 그는 허리를 삐끗한 통증에 입술은 하얗게 질린 채로, 소매를 펄럭이며 말했다.
“됐소. 당신과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소!”
그는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 나갔고, 남은 한 씨는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꿈에서 깬 듯 그의 뒤를 쫓았다.
둘째 나리는 화가 잔뜩 난 채 제생당으로 향했다.
* * *
“둘째 형님,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셋째 나리는 환자에게 진맥을 하고 있었고, 둘째 나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그 환자에게 몇 마디 당부한 뒤 둘째 나리를 안으로 모셨다.
“설마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둘째 나리의 안색이 좋지 않자, 셋째 나리가 물었다.
둘째 나리는 아주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정미는?”
“정미요?”
셋째 나리는 잠시 당황하며 둘째 나리의 안색을 살폈고 망설이다가 말했다.
“정미는 방금 자료를 정리하러 내실에 갔는데, 정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둘째 나리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정미를 불러오거라.”
“음, 잠시 기다리고 계세요.”
셋째 나리가 몸을 일으켜 정미를 찾으러 갔다.
한편, 정미는 필기를 하고 있었다.
부의는 망진을 통해 환자의 증상을 판단하는 것을 중요시했다. 하지만 환자의 얼굴마다 미세하게 다른 점이 있었기에 오진할 수도 있었다. 빠른 속도로 배우기 위해서 정미는 매일 망진한 환자들에게서 보이는 규칙들을 기록해 하루빨리 이에 통달할 수 있도록 했다.
기척이 들리자, 정미가 고개를 들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셋째 숙부님?”
셋째 나리가 다가왔다.
“미야, 네 아버지가 찾아오셨다.”
정미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자, 셋째 나리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앞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가보거라.”
정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금방 다 써가니까, 다 쓰고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