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변태의 말로
화량은 정미의 마음을 흔들어보기로 했다. 그는 온화하게 웃으며 그윽한 표정으로 정미를 바라봤다.
“설마 내가 그대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걸 모르는 것이오?”
정미의 눈동자가 커졌다.
‘첫눈에 반했다고? 내가 아는 그 뜻이 맞나?’
“어째서요?”
정미는 이해할 수 없었다.
화량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그대가 아주 아름다워 한 번 보면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지. 소생이 그대를 사모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오.”
정미는 멍하니 있다가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고 화량에게 물었다.
“이 말을 하려고 내 마차에 타고 있었던 건가요? 이제 알겠으니, 이따 조용한 곳에서 내리세요.”
“당연히 이 말만 하려고 탄 것은 아니오.”
“그럼 무슨 말을 더 하려고요?”
정미는 달려온 거리를 계산했고, 곧 으슥한 골목을 지난다는 걸 깨달았다. 그 골목을 지나면 화량이 내리고 싶다고 해도 내려줄 수 없는데, 화량을 데리고 백부까지 갈 순 없지 않겠는가?
“무슨 말을 더 하고 싶은데요! 한 번에 똑바로 말하세요. 귀찮게 굴지 말고!”
화량도 마음이 급해서 침을 삼키고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셋째 아가씨, 입맞춤을 한 번 하게 해주시오. 어떻습니까?”
‘입맞춤이라고?’
정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심신에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많은 소설책을 읽었으니, 이게 무슨 뜻인지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부부끼리만 하는 거 아냐? 이 염치없는 변태 같으니라고!’
정미는 욕설을 퍼붓고 싶었지만, 얼굴에 티 내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노양백, 어디까지 왔지?”
마차 밖에서 노양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참새 골목입니다.”
‘아주 좋군.’
정미는 고개를 끄덕이고 화량을 바라봤다.
화량은 정미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깜짝 놀라 망설이고 있었고, 그녀가 자신을 쳐다보자 물었다.
“왜 그럽니까?”
정미가 차분한 표정으로 엄숙하게 말했다.
“내게 입맞춤을 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어요. 저희 어머니와 오라버니께서, 여자아이는 다른 사람이 함부로 건드리게 둬선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화량이 어두운 표정으로 위협했다.
“아가씨, 만약 입맞춤을 하게 해주지 않는다면, 문발을 걷어 사람들에게 이 모습을 다 보여주고 말겠소.”
정미는 꿈쩍도 하지 않고 진지하게 말했다.
“어쨌든 입맞춤은 안 됩니다. 그럼 나는 평판을 잃을 것이고, 창피를 당할 테니까요. 하지만 당신이 함부로 하지 않는다면 내가 입맞춤을 해주지요. 그럼 다른 사람이 나를 건드린 건 아니니까요.”
화량은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역시 어린 아가씨로구나. 미인이 스스로 입맞춤을 해주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도 모르고.’
화량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눈을 감으세요.”
속담에 ‘모란꽃 아래에서 죽으면 귀신이 되어도 풍류를 즐긴다.’는 말이 있었다.
이렇게 여리고 사랑스러우며 난화 향이 나는 아가씨가 자신에게 눈을 감으라 하니, 색욕이 넘치는 화량은 곧바로 순순히 눈을 감았다.
한참 동안 기척이 없자 화량은 눈을 떴고, 가까이 있는 아름다운 소녀가 의심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왜 그러오?”
정미가 화량의 입을 가리켰다.
“입을 벌릴 건가요?”
화량은 깜짝 놀랐다.
‘이, 이, 이 행운은 정말 감당할 수가 없을 정도구나. 내가 지금 희귀한 박옥(*璞玉: 다듬지 않은 옥덩어리)을 만난 게지. 내게 입을 벌리라 하다니! 처음부터 이렇게 깊게 나갈 거라곤 나도 생각지 못했는데! 그래도 좋다. 내 황홀한 기술로 그녀를 홀릴 수 있으니. 앞으로 더 다가가면 내가 담을 넘을 때 이 아가씨가 사다리를 놓아줄지도 모르지!’
화량은 머릿속에 꽃밭을 펼치며 저도 모르게 정미에게 변태 같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당연하오. 당연히 입을 벌려야지.”
“그래요. 그럼 눈을 감고 입을 벌리세요.”
화량이 기뻐하며 눈을 감고 입을 벌렸다.
정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고, 역겨움을 꾹 참고 재빨리 손으로 말은 손수건을 화량의 입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곧바로 빗발 같은 주먹을 날렸다.
화량은 맞아서 넋이 나갔고, 고함을 지르려고 했지만 입에 뭔가 가득 물려진 탓에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드디어 주먹질이 멈추고 어지러운 머리를 돌려봤을 때, 자신의 목에 비수가 겨눠진 것이 보였다.
정미가 차갑게 웃었다.
“움직이지 마. 내 손은 정확하지 않으니.”
정미가 말하면서 비수를 안쪽으로 들이대자, 날카로운 칼날이 화량의 목을 살짝 찔렀다.
목에 차가움과 통증이 느껴지자, 화량은 몸에 힘이 풀려 손수건을 문 채 고개를 마구 저었고 필사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좋아.”
정미는 냉정하게 손을 뻗어 화량의 허리에 올렸다.
화량은 눈이 휘둥그레져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내가 지금 무슨 요녀를 만난 거야. 그저 입맞춤을 하고 싶었을 뿐인데, 싫으면 싫은 거지 내 허리에 손은 왜 얹는 건데? 설마 나를 거세시키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화량은 정말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정미는 손에 힘을 주어 화량의 허리띠를 빼냈다.
“읍읍읍―”
‘말이 나오지 않으니 정말 죽고 싶다! 고모님 살려주세요, 고모님의 소중한 조카가 목숨을 잃게 생겼다고요. 그럼 우리 화씨 집안의 대가 끊길 텐데!’
“두 손을 등 뒤로 해!”
정미는 화량의 두려움은 전혀 고려치 않고 냉랭하게 명령했다.
맑게 빛나는 긴 눈, 얇은 입술과 높은 코를 가진 정미가 웃음기를 잃으면 여느 아가씨들처럼 사랑스럽고 여려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살얼음처럼 차가워 보였다. 때문에 내뱉은 말은 더욱 진지하게 들렸다.
화량은 이에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곧바로 양손을 등 뒤로 돌렸다.
정미는 화량의 허리띠로 그의 양손을 묶었고, 그제야 비수를 거두며 낮게 소리쳤다.
“무릎 꿇어!”
화량은 무릎을 꿇고 벌벌 떨며 정미를 바라봤다.
정미는 비수를 집어넣고, 화량의 입에 물린 손수건이 잘 물려 있는지 확인했다.
“말을 할 수 있나?”
화량이 읍읍대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다행이네.”
말을 마친 정미는 씨익 웃고는, 손발을 다 써서 화량을 두들겨 패고 마차 칸 뒤의 비밀 문을 열어 그를 걷어찼다.
화량은 콰당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떨어졌다.
노양백이 휘두르던 채찍을 허공에 멈추고 물었다.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어제 사냥을 하러 갔는데, 다른 이가 내게 멧돼지 고기를 나눠줬었거든. 그런데 집에 가져다 놓는 걸 깜빡해서, 방금 보니 이미 상한 것 같아 내다 버렸어.”
정미는 화량이 마차에 벗어놓은 신발을 보고는 짜증이 나, 주워서 내던져버렸다.
노양백은 정미의 말에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잘 앉아 계세요, 아가씨. 참새 골목을 지나면 속도를 올릴 겁니다.”
“빠를수록 좋아. 피곤하니 일찍 돌아가서 쉬고 싶구나.”
“알겠습니다.”
노양백은 채찍을 들어 말을 더 빨리 몰았고, 속으로 가슴이 은근히 아파왔다.
‘쯧쯧, 삼복 날도 아닌데 어제 잡은 멧돼지 고기를 오늘 버리다니. 정말 낭비로구나. 골목의 어느 집이 이득을 볼지 모르겠군.’
* * *
화량은 마차에서 굴러떨어진 데다가 방금 실컷 맞은 탓에 머리와 눈앞이 어지러웠다.
그는 죽을힘을 다해 일어나 앉아 손에 묶여있는 허리띠를 풀어냈다. 입에 물린 손수건을 꺼내자 곧바로 침이 흘러나왔다.
“제길―”
화량의 입이 자유를 되찾아 욕을 퍼붓고 있었을 때, 갑자기 신발 하나가 마차에서 날아와 그의 이마를 맞췄다.
‘악’ 하는 비명이 끝나기도 전에, 나머지 한 짝이 또 날아왔다.
이번에 화량은 정말로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기절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비명소리를 듣고 그제야 몽롱하게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는 얼굴이 부어서 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고, 억지로 눈을 벌려 보니 사오십 된 부인이 대야를 들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아주머니, 살려주시오…….”
화량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고, 평소엔 눈길도 주지 않았을 부인에게 ‘아주머니’라고 부르고는, 피범벅이 된 손을 뻗었다. 손에는 은 한 조각이 쥐어져 있었다.
“아주머니, 내게 돈이 있으니…….”
부인은 깜짝 놀라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이때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사내가 문에서 나와 부인을 잡아당겼다.
“얼른 들어오시오. 어디서 죄를 지은 망나니인지 어떻게 알아. 성가신 일에 휘말릴라.”
“네.”
부인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고 사내와 함께 몸을 돌렸고, 겨우 두 걸음 걸었을 때 다시 종종걸음으로 돌아왔다.
절망하던 화량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다만 그의 얼굴은 돼지머리처럼 퉁퉁 부어있어 품위 넘치는 용모를 알아볼 수 없었고, 이렇게 웃으니 아주 무서웠다.
그 부인은 화량의 앞에 다가갔지만 놀라서 잠시 망설이다가, 마음을 가다듬고 쭈그려 앉아 그의 손에서 은을 끄집어내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남편과 함께 재빨리 도망가버렸다.
화량은 눈물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절망했고,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지나가지 않자 이곳이 아주 외진 곳이라는 걸 깨달았다. 더 기다렸다간 목숨이 버티지 못할까 봐, 그는 가까스로 담벼락을 짚고 일어나 힘겹게 발걸음을 떼어 조금씩 화가(華家)로 향했다.
사람이 별로 없는 대로에 다다랐을 때, 화량이 생각했다.
‘길을 잃은 것 같은데, 어떡하지?’
결국 화량은 길거리에서 쓰러져버렸다. 꼴이 처참한 탓에, 순찰하던 위병은 화량이 몸싸움을 한 불량배라고 생각해 감방에 넣어버렸다. 화량은 천신만고 끝에 화가로 돌아가게 되었다.
* * *
정미가 집에 도착했을 때, 한 씨가 자신에게 유달리 다정한 것 같아 참고 참다가 결국 물었다.
“오늘 어쩐 일이세요?”
한 씨는 정요가 태자를 홀린 일을 말할 수 없었기에, 정미의 손을 잡고 한참을 쳐다보다가 한숨 쉬었다.
“미야, 어미가 지금에야 깨달았는데, 역시 친자식들이 낫구나.”
정미는 한 씨가 오늘 받은 충격을 알지 못했기에 곧바로 불쾌해했다.
“어머니, 앞으로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둘째 오라버니가 들으면 힘들어할 거예요.”
한 씨는 잠시 당황해하다가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런 뜻이 아니다.”
정미는 한 씨에게 할 말이 없었다. 정미가 보기에는 어머니가 정요의 편에 서서 자신을 방해하지만 않는 것으로도 감사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 씨의 한마디에 정미는 오라버니에 대한 걱정이 일었고, 마침 오늘의 일을 오라버니에게 말해줘야 했기에 식사를 마친 후 장청원으로 향했다.
* * *
장청원엔 등불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철은 낮엔 자신의 이야기책을 썼고, 밤에도 가만히 쉬지 않았다.
그는 점주로서 매월 월말마다 서재들의 장부를 훑어봐야 했다. 낮엔 사람이 많기에 장부를 보는 일은 당연히 밤에 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장청원을 보면 정철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줄 알 것이니, 방해하러 올 리가 없었다.
정철은 각 서재가 봄철 동안 모두 흑자를 봤고, 본점은 은 오백 냥의 순이익을 낸 것을 보고 흐뭇한 듯 웃었다.
그동안 정철은 서재로 이윤을 내어 적지 않은 논밭을 마련하였고, 모두 계산해보면 재산이 꽤 되었다.
‘나중에……, 나중에 미미가 시집가게 되면, 백부의 상황은 별로 기대할만한 것이 못되니, 내가 정미에게 혼수를 잘 마련해주어 아무도 정미를 업신여길 수 없게 할 수 있을 거야.’
촛불 아래 정철의 옥과 같은 얼굴이 따뜻하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