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현장 조사
그렇게 한 씨가 떠난 후에도 정아의 기분은 여전히 좋지 않았고, 대충 식사를 한 후 누워서 쉬다가는, 저도 모르게 잠들었다. 잠시 후, 약접이 그녀를 불렀다.
“태자비 마마, 소진 도사께서 오셨습니다.”
약접이 세 번이나 외친 후에야, 정아는 완전히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앉았다.
“류영, 우선 소진 도사를 거실로 모시고 차를 내어 드리거라. 약접, 너는 내 차림새를 정돈해주렴.”
단장을 마친 정아는 약접의 부축을 받아 거실로 갔다.
여도사 모습으로 치장한 여인이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소진 도사는 나이가 서른 정도 되어 보였고, 도계(道髻)를 높이 올려 흑단으로 만든 비녀를 꽂고 있었다. 다른 장신구는 하지 않아 수아(*秀雅: 재주가 뛰어나고 고상함)하고 소탈해 보였다.
정아는 소진 도사가 곧 마흔 살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젊어 보이니, 수행에 성공한 게 아닐까 싶었다.
정통 도사는 대량에서 아주 존경받는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도사 중 진정으로 능력이 있는 부의는 더욱 추앙을 받곤 했다.
때문에 정아는 도사를 푸대접할 수 없었고 급히 다가갔다.
“소진 도사.”
소진 도사는 일어나서 진지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태자비 마마를 뵙습니다.”
“어서 앉으세요, 소진 도사.”
소진 도사가 부수 한 잔을 꺼내 정아에게 건넸다.
“태자비 마마, 빈도는 이따 귀비 마마께도 가봐야 해서 오래 앉아 있지 못합니다. 이 부수를 우선 드세요. 이번에 드시고 이틀만 더 드시면 됩니다.”
정아는 그 부수를 건네받았지만, 예전처럼 단숨에 마시지 않고 잠시 망설였다.
소진 도사는 이를 보고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정아가 잔을 옆에 내려놓았다.
“소진 도사, 요 며칠 본궁의 몸이 편치 않은데, 무슨 이유인지―”
소진 도사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태자비께서 설마 부수가 원인이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빈도가 일찍이 말씀드렸듯이, 태아의 성별을 바꾸는 일은 하늘을 속이는 일과 같습니다. 태자비 마마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빈도는 나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아가 웃었다.
“본궁도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계속 복부가 편치 않아서, 어미 된 사람으로서 걱정이 될 뿐입니다.”
소진 도사는 그제야 웃었다.
선풍도골(*仙風道骨: 선인의 풍모와 도사의 골격으로, 남달리 뛰어난 풍채를 말함) 같은 소진 도사가 웃으니, 정아 같은 존귀한 신분의 사람도 놀랍고도 기쁜 기분이 들었다.
“걱정 마세요. 이 부수를 9일 동안 드시기만 하면 분명 황손을 낳으실 겁니다. 하지만 만약 중단한다면……, 생각해보십시오. 태아의 성별이 반쯤 바뀌다가 멈춰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아는 순간 식은땀이 났고, 곧바로 정미의 주의를 잊은 뒤 부수를 들이켰다.
소진 도사가 웃었다.
“태자비께선 마음을 편히 하시고 태아를 보살피시면 됩니다. 내일 빈도가 다시 올 테니, 오늘은 먼저 귀비 마마께 가보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정아는 궁녀에게 소진 도사를 배웅하라 했다.
가는 길에서 소진 도사가 그 궁녀에게 물었다.
“오늘 다른 사람이 왔었는가?”
이 궁녀는 소진 도사가 동궁에 올 때마다 배웅을 맡곤 했다. 궁녀는 이미 그녀의 명성에 굴복했고, 소진 도사가 기밀을 물은 것도 아니었기에 곧바로 대답했다.
“아침에 태자비 마마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오셨었습니다.”
“여동생?”
소진 도사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네가 저번에 말한, 한 마디로 태자비가 남자아이를 회임했다고 단정하고, 꿈속에서 진인의 점화를 받았다는 그 아가씨인가?”
궁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이 오셨는데, 도사께서 말씀하신 분도 오셨습니다.”
소진 도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는 묻지 않고 동궁의 대문을 나가 화 귀비의 궁침으로 향했다.
* * *
화 귀비 쪽에선 조카가 골치를 아프게 하고 있었다.
“고모님, 이, 이러시면 안 되지요! 조카는 고모님께서 월하노인(*月下老人: 부부의 인연을 맺어 주는 중매인)처럼 저를 도와주시길 기다리고 있었는걸요. 왜 안 된다고 하시는 겁니까?”
화량이 가슴을 부여잡고 뻔뻔하게 매달렸다.
“훌륭하신 고모님, 들어보세요. 고모님의 말에 조카의 마음이 바스라지는 것만 같습니다!”
화 귀비는 조카를 한 번 노려보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고모가 만약 너를 허락해주면, 고모의 마음이 바스라질 것이다.”
화량이 다급하게 물었다.
“고모님, 그럼 말씀해 보세요.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정가의 셋째 아가씨가 아름답지 않아서입니까? 어디가 고모님의 마음에 들지 않은 겁니까?”
“아름답더구나. 하지만 량아, 이 세상에 미인은 그 아가씨만 있는 게 아니다. 기다리고 있으면 고모가 네게 더 좋은 아가씨를 찾아주마.”
“하지만 조카는 그 아가씨가 마음에 들었는걸요! 고모님, 만약 그녀와 혼인하지 못하면, 저는 살 수 없습니다. 고모님께선 모르시지요,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조카가 한 끼도 먹지 못했다는 것을요!”
화 귀비는 순간 마음이 아파 왔지만, 생각해보니 고작 두 끼라는 것을 알아채고 마음을 모질게 먹고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안 된다면 안 되는 것이다. 량아, 이 고모의 성정을 잘 알고 있겠지. 고모가 안 된다고 한 일은 네가 아무리 부탁해도 이뤄질 수 없다!”
화 귀비가 정말 어두운 표정을 짓자, 화량도 더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고모는 확실히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애초에 큰누님과 태자를 혼인시키려고 했을 때, 가족들 모두 이 혼사를 기뻐했다. 하지만 백 년 전의 유조를 떠올렸고, 이후 큰누님이 태자비가 될 순 없었지만, 태자의 양제가 될 수는 있었다. 그럼 나중에 태자가 즉위한 뒤 누가 황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고모가 큰누님과 태자의 일을 안 뒤, 크게 분노하며 동의하지 않을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결국 조모님까지 궁에 들어와 매달렸지만, 고모님은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태자의 혼인 전날 밤, 큰누님은 목매어 죽고 말았다. 이후 어렴풋이 들리는 말로는 그때 누님은 이미 홀몸이 아니었다고 한다.
때문에 조모님과 어머니는 한동안 고모님을 언급하면 원망하곤 했지만, 고모님은 절대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곤 했다.
화량은 씩씩대며 황후궁을 나왔고, 거리를 거닐며 꽤나 낙담한 듯 굴었다.
‘고모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니, 정가의 셋째 아가씨와는 혼인할 수 없겠구나. 그럼 조용히 한 번 더 만나보자. 혹시나 그 아가씨가 내게 반해서 넘어올지도 모르잖아?’
화량은 정미가 다섯째 공주와 함께 매일 덕소 장공주부에서 승마를 배운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고, 그쪽까지 어슬렁거리며 가서는 숨어서 기다렸다.
* * *
해가 서쪽으로 기울었고, 햇빛이 점점 식어갔다.
화량은 손을 비비고 발을 굴리며, 덕소 장공주부의 대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다 별안간 머리를 쳤다.
‘내가 왜 깜빡했지, 정가의 셋째 아가씨는 아가씨니까, 장공주부에서 떠날 땐 분명 옆문에서 마차를 탈 텐데.’
화량은 살금살금 장공주부의 옆문으로 향했다. 역시 작은 마차가 담 밑에 서 있는 것이 보였고, 마차에는 회인백부의 표시가 있었다. 마부는 담벽에 기대 졸고 있었고, 햇볕을 피해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서 있었다.
화량은 잠든 마부를 보고 다시 그 작은 마차를 보았다. 여인만 타는 그 마차에서 꽃향기가 나는 듯했다.
그는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뭐 하러 여기서 바보처럼 기다리고 있지? 정가의 셋째 아가씨가 나오면 뭐? 조금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바로 아무렇지 않게 마차에 올라타서 떠날지도 모르는데.’
화량은 눈을 굴리더니 살금살금 담 아래로 다가가 마부를 흘끗 보았고, 그의 코 고는 소리가 들리자 안심하고 재빨리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자신을 신경 쓰지 않자, 그는 허리를 숙여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에 들어가자마자 두 눈을 살짝 감고 향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역시 내 예상대로, 이 마차 안은 아주 향기롭구나!’
화량은 기지개를 켜고 마차 벽에 기대고 앉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역시 나 화량은 총명해. 정가의 셋째 아가씨와 혼인할 수 없을 것 같지만, 나 화량의 마음에 든 미인을 이렇게 놓쳐버리면 하늘도 나를 못났다고 여길 것이다. 어떻게든 이득을 봐야 그나마 체념할 수 있겠지.’
화량은 계산을 아주 잘했다.
한 아가씨가 마차에 올라탄 뒤 마차 안에 사내가 타고 있는 걸 발견 했을 때, 이성이 있는 여인이라면 함부로 소리를 지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녀가 내가 다가가지 못하게 한다면, 마차의 문발을 걷고 길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 위협해야지.’
그 아가씨의 아름다운 얼굴에 입맞춤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신발을 벗어던지고 마차 벽에 게으르게 기댄 화량은 배시시 웃으며 입맛을 다셨다.
* * *
저녁노을이 하늘을 점점 가득 물들이는 것이 마치 소녀의 수줍은 얼굴 같았다.
정미는 연무장에 특설한 목욕실에서 간단하게 씻은 후, 평상복으로 갈아입었고 다섯째 공주와 인사 후 장공주부에서 나왔다.
그녀는 담 아래에 도착해서 마부를 불렀다.
“노양백(老楊伯).”
졸고 있던 마부가 급히 일어나 허리를 숙이며 웃었다.
“셋째 아가씨, 나오셨군요.”
정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재빨리 마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가자.”
“예이―”
정미가 마차의 문발을 걷으며 몸을 숙여 들어갔고, 마부의 채찍질과 고함소리와 함께 마차는 천천히 움직였다.
정미는 오늘 왠지 마차 안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뭔가 낯선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음식이 상한 냄새와 비슷했다.
정미는 당연히 이 냄새가 사내의 발 냄새라고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불편한 듯 코를 훌쩍이며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마차 문에 기대앉았다.
오후 내내 승마와 활을 연습한 탓에 정미는 아주 피곤했다. 게다가 방금 목욕까지 했기에 눈을 감자 금방 몽롱해졌다.
정미가 갑자기 눈을 떴을 때, 눈앞엔 인상 깊은 얼굴이 보였다.
정미가 입을 열려고 하자, 화량이 손으로 정미의 입을 막았다. 발버둥 치려 하자 화량이 말했다.
“낭자, 거리의 사람들에게 내가 낭자의 마차 안에 있다는 걸 알리고 싶다면, 소리를 질러도 좋소!”
정미는 곧바로 조용해졌다.
정미가 얌전해지자, 화량은 속으로 자신의 총명함을 칭찬하며 손을 놓았다.
“화량, 왜 내 마차에 있는 거예요!”
작은 목소리로 묻는 정미의 얼굴은 화가 나 아주 어두웠다.
화량은 이미 정미를 사로잡았다고 생각해 무례하고 뻔뻔하게 웃었다.
“낭자, 모르겠지요. 어제 숲에서 헤어진 후 내가 낭자가 그리워서 하루가 3년 같이 느껴졌소. 지금까지도 식사를 못 했단 말이오. 낭자가 내게 어찌 보상해줄 수 있겠소?”
정미는 깜짝 놀라 희한한 듯이 화량을 한 번 쳐다봤다.
“혹시 병이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어제 처음 만난 사이예요. 그런데 나를 그리워하다니요? 내가 빚을 진 것도 아닌데!”
화량은 어처구니가 없어 정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녀의 작은 얼굴은 특히 진지하고 엄숙해 보여 농담을 하고 있는 게 아님이 분명했다. 앳된 얼굴은 아름다운 용모로도 완전히 가려지지 않아 실소가 터져 나왔다.
‘내가 잊고 있었군, 아직 어린 아가씨인데. 그래, 어린 아가씨가 좋지. 어린 아가씨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정욕에 대해서도 모르고, 만약 내가 오늘 그녀에게 들이대면 앞으로 내게 모든 마음을 쏟을지도 몰라. 내게 마음만 있으면, 언젠가 몸을 줄지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