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똑똑히 알다
정아는 약접의 말을 들은 뒤, 마음이 허탈해져 표정이 아주 좋지 않았다.
약접이 걱정하며 말했다.
“태자비 마마…….”
정아가 손을 저었다.
“괜찮다, 괜찮아. 약접, 이 일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거라.”
약접이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정아가 잠시 중얼거리다가 말했다.
“내시를 회인백부로 보내렴. 내가 갑자기 오이절임을 먹고 싶어 한다고, 어머니께 가지고 오시라 전해라.”
“예.”
* * *
한 씨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장녀가 보낸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임부가 신 것을 좋아하면 아들을 낳고, 매운 것을 좋아하면 딸을 낳는다더니, 태자비의 아이는 틀림없이 황손이겠구나.’
그리고 저도 모르게 정미의 말을 떠올렸고, 서양경 안의 뽀얀 얼굴을 살펴보며 딸의 능력에 더욱 신뢰가 생겼다.
“어서 가서 열흘 전 절인 오이를 두 단지 정도 가져오거라. 가지고 궁으로 가야겠다.”
한 씨가 여종 설란에게 명령했다.
설란은 급히 가지러 갔다.
회인백부의 오이절임은 정말 제일이라 할 만한 맛이었다.
게다가 이 반찬은 어느 집안의 요리사나 다 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어느 며느리도 시집올 때 가져올 수 있는 요리법도 아니었다.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다. 정철이 고 선생을 따라다니며 곳곳에서 유학을 하며 견문을 넓힐 때, 이름 없는 작은 마을을 지나가다가 농가의 집에서 잠시 쉬던 그는, 그 집에서 이 오이절임을 먹게 된 것이다.
적당히 새콤달콤했고, 아삭아삭한 식감과 약간의 매운맛은 평범한 절임 반찬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정철은 곧바로 이 오이절임에 빠지게 되었고, 멀리 수도에 있는 여동생도 좋아할 것 같아, 서화 하나와 요리법을 맞바꿨다.
백부로 돌아온 이후, 정철이 이 요리를 바치자 둘째 나리는 공부에 전념하지 않았다고 꾸짖었고, 차남을 가장 아끼는 맹 노부인도 당연히 좋은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맛 좋은 오이절임을 맛본 뒤론, 다신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아랫사람이 효를 하고자 가져온 음식을 먹으면서 그 음식 때문에 공부에 전념하지 않았다고 꾸짖는 것은, 아무리 뻔뻔한 어른이라도 할 수 없는 짓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회인백부에는 내놓을만한 반찬이 하나 더 생기게 되었는데, 특히 맹 노부인이 가장 기뻐했다.
이 오이절임은 원가도 싸면서 맛이 일품이라, 매년 명절 때마다 다른 집안에 선물로 보내기에도 훌륭했다.
* * *
한 씨는 오이절임을 두 단지 들고 다시 궁으로 들어갔고, 태자비의 창백한 안색을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태자비 마마, 왜 그러십니까? 어디 안 좋으십니까?”
아직 정오가 되지 않은 때였지만 햇빛이 한창이었다. 빛이 충분한 방 안에서 정아의 얼굴은 투명해 보였고, 왠지 모르게 연약해 보였다. 한 씨는 자신의 장녀와 배 속의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싶어, 가슴이 내려앉았다.
정아는 약접만 남기고 나머지 사람들을 내보내고서야,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저희가 늑대를 집으로 들였습니다!”
한 씨는 이해가 되지 않아 더욱 놀랐다.
“무슨 뜻이십니까?”
정아는 원래 숨길 생각이 없었기에, 한 씨의 물음에 곧바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오늘 어머니께서 두 여동생을 데리고 오시고, 두 사람은 화원에 가서 놀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정요가 잠시 자리를 비웠고요. 그 후 아홉째 공주가 약접을 그 아이를 불러 찾았지요. 사실, 당시 정요를 찾은 방 안엔 한 사람이 더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요?”
한 씨는 정요가 사내와의 밀회를 가질 아이라고 생각지 못했기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정아는 한숨을 쉬고 쓴웃음을 지었다.
“예, 한 사람이 더 있었습니다.”
“누굽니까?”
정아가 약접을 한 번 쳐다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태자입니다!”
“뭐라고요!”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한 씨는 깜짝 놀라 손가의 찻잔을 엎었다. 찻물이 탁자를 타고 흘러내렸다.
약접이 급히 수건을 들고 와 닦았다.
한 씨 모녀는 이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한 씨는 정아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마마, 그, 그것이 사실입니까?”
정아가 쓰게 웃었다.
“어머니, 제 이복동생이 형부와 몰래 밀회를 가지는 것이 뭐가 명예로운 일이겠어요? 사실입니다. 저도 그저 어머니에게 말씀드리고, 어머니께서 정요에게 자각심을 가지게 해드리고자 했을 뿐이에요. 언젠가 그 계집의 계략에 넘어가지 않게 말이지요.
그것을 제외하곤, 이 일은 그저 꼭꼭 숨겨둘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태자 앞에서 모른 척할 수밖에 없고요.”
이 일이 퍼져나가면 회인백부의 명성에 해가 될 것이며, 결국 집안 여자아이들의 혼사에 영향을 주게 될 터였다.
게다가 정요가 궁에 들어오게 되면, 맏언니인 정아는 맞서거나 가만히 참더라도, 모두 황당하고 웃긴 처지가 될 게 뻔했다.
정아는 깊은 한숨을 쉬며 배를 어루만졌다.
“어머니, 이 깊은 궁 안은 원래 살얼음판과도 같아요. 앞에는 굶주린 이리가 있고, 뒤에는 사나운 호랑이가 있지요. 그저 저는 그 굶주린 이리가 저희 집 사람이라곤 생각지도 못했을 뿐이에요!”
한 씨는 이미 잔뜩 성이 났기에, 탁자를 세차게 내리치며 말했다.
“역시 기녀의 딸이로군요. 평소엔 멀쩡한 척해도 역시 비천한 종자였던 겁니다. 어쩐지 그 아이와 늘 잘 지내던 정미도 지금은 멀리하고 있더라니!”
“아, 정미와 정요 사이가 나빠졌나요?”
“그런 속상한 일은 마마께 말씀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마마, 지난 봄, 정미가 한지에게 고백한 일을 기억하시나요?”
정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 씨가 냉소했다.
“그 일도 그 비천한 것이 부추긴 것이었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한지가 좋아하는 사람도 정요였고요! 게다가 그 계집은 그걸 알면서도 정미를 부추겼으니, 정말로 못된 것이 분명해요.”
정아의 안색이 싸늘해졌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왜 제게 말씀하지 않은 거예요?”
한 씨가 쓴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저도 정미가 그저 울컥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한지가 제게 정요를 적녀로 올려달라고 부탁하고, 정요가 아니면 혼인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나서야 믿었지요. 이후 한지가 정혼을 했기에, 이 일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기로 했는데, 그 계집이 태자를 홀릴 줄은 누가 알았겠습니까. 정말 속이 검은 계집이로군요!”
한 씨는 말할수록 화가 나서 이를 갈며 말했다.
“안 되겠습니다. 계속 화를 불러오니, 더 이상 용납할 수 없겠어요!”
“어찌 하시려고요?”
한 씨는 주먹을 꽉 쥐었다.
“돌아가면 독주로 그 계집을 죽일 겁니다. 더 이상 말썽을 피우지 못하게끔!”
“어머니!”
정아가 깜짝 놀랐다.
“울컥해서 일을 저지르셔선 안 돼요. 정요는 다른 집안의 서녀와는 다른 걸요. 그동안 바깥에서 명성을 떨쳤고, 태자와 한지의 마음도 얻었잖아요. 제가 듣기로는 지금 매일 밤 염송당에서 조모님을 모시고 있다던데, 만약 갑자기 죽게 되면 절대 조용히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특히 약접이 공주와 함께 외진 방에서 정요를 찾은 뒤 갑자기 사고가 나면, 태자도 알아채실 겁니다. 태자가 밝혀내든 아니든, 아무 구실을 잡아 백부는 물론이고 위국공부에까지 화가 미치면 모두 견딜 수 없을 거예요.”
태자는 황자 서열로 따지면 넷째였다. 첫째 황자는 어릴 때 절름발이가 되어 경쟁할 자격을 잃게 되었고, 둘째 황자와 셋째 황자는 요절하였다. 아래의 두 황자는 생모의 신분이 높지 않으며, 나이도 어렸기에, 장래에 지금의 태자가 황위를 이어나갈 것이 확실했다.
지금 태자의 심기를 건드리면, 당장은 평판을 위해 참을지도 모르겠지만 추후 어찌 결판을 낼지는 모를 일이었다.
정아는 그 사내가 자신을 아껴주고 지켜주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예전엔 소녀의 동경심과 애정이 있었지만, 궁의 무궁무진하고 싸늘한 적막 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심지어 나중에 태자가 즉위하게 되면, 첫 명령으로 태자비를 폐위하고 그가 마음에 드는 여인을 황후로 올릴 거라는 예상도 했던 바였다.
정아는 마음이 몹시 씁쓸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어찌 나뿐이겠어?’
“마마, 그럼 마마께선 어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아는 정신을 차리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쉬운 일이에요. 어머니, 정요도 벌써 열여섯이잖아요. 시집갈 나이가 되었지요. 재주도 외모도 출중하니, 서녀라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혼인하고 싶어 할 거예요.”
한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 나리께서도 이번 춘시가 끝나면, 행방에 이름이 올라간 사내들 중 아직 미혼인 자를 염두에 두기로 얘기하셨지요.”
“아버지께서 둘째 동생에겐 그나마 신경을 써주시는군요.”
정아가 차갑게 웃었다.
귀인이 많은 수도에 부족한 것은, 대갓집 규수가 아니라 젊고 재능이 뛰어난 학생이었다.
백여 년 전부터 과거 시험은 출세의 첫 번째 관문이 되었다. 권력의 대물림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기껏해야 그리 중요하지 않은 하급 관직이 될 수 있었다. 관직길에 순조롭게 오르려면 진사 출신 정도는 되어야지, 그렇지 않다면 한림원에 들어가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회인백부처럼 계속해서 세습하는 훈귀 가문은, 그나마 나았다. 만약 문무 관료라면 권력을 잡고 있을 땐 훈귀보다 영광스럽지만, 자손 중 삼대 동안 공부를 잘하는 인재가 없다면 점점 상류층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되었다.
때문에 가난한 집안의 학생이라도, 행방에 이름이 올라가기만 하면 훌륭한 가문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방하착서의 주된 원인이었다.
“어머니, 제 생각엔 행방을 기다리지 않고 정요에게 훈귀 가문의 서자를 붙여주면 될 것 같아요.”
관리 가문이라면 조부나 부친이 공부를 잘할 것이고, 자손의 공부도 엄격히 관리할 터였다.
‘만약 우수한 인재가 정요에게 이득이 되어 십여 년 후 정요가 풍랑을 일으키면 꽤나 성가시겠지!’
하지만 훈귀 가문은 달랐다. 세습의 작위가 있기에 자손의 공부에는 그렇게 엄격하지 않고, 특히 서자라면 공부로 이름을 떨쳐 적자를 방해할까 봐 심하게 억누르거나 제멋대로 하도록 방임했다. 정요에게 그런 혼사를 맺어주는 것은 겉치레도 하면서 한 씨가 각박해 보이지 않을 수 있게 해줄 터였다.
한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서 나리와 상의한 후 어서 그 비천한 종자의 혼사를 정하겠습니다.”
자녀의 혼사는 부모와 중매인의 말로 정해졌고, 보통은 모친 쪽이 세심하게 따지고 고르지만, 결국 부친의 허락이 떨어져야 성사될 수 있었다.
“예.”
정아는 조금 마음이 놓여, 한 씨에게 당부했다.
“어머니, 앞으로 궁에 들어올 땐 아무 구실을 만들어 정요가 오지 못하게 하세요. 수습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지 않게요.”
한 씨가 냉소했다.
“그건 당연합니다. 그 여우 같은 계집의 재주를 알았으니, 출가하기 전까진 소란을 피우지 못하도록 잘 지켜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