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116화 (116/375)

116화. 약접의 밀고

정요는 태자와 마주 섰고, 분위기가 잠시 어색해졌다.

이때, 갑자기 문밖에서 궁녀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태자와 정요는 서로를 마주 보며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태자는 문을 밀려고 하다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뒷걸음을 치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몸을 숙여 벽장으로 숨어 들어갔다.

정요는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와 말소리에 귀 기울였다.

“약접(若蝶), 그 언니 여기 있어?”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주 전하,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곳은 다 찾아봤는데 여기만 아직 안 찾아봤으니, 여기에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요의 표정이 변했다.

‘약접은 태자비의 몸종 궁녀인데, 왜 여기 있는 거지!’

바깥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이어서 아홉째 공주의 맑고 앳된 물음이 들려왔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정요를 데리고 온 궁녀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공주 전하, 정가의 둘째 아가씨께서 지금 옷단장을 하고 계시답니다.”

“그래?”

공주의 목소리에 기쁨이 묻어나왔다.

“어서 문을 열라!”

궁녀들은 귀비의 총애를 받는 어린 공주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고, 곧바로 문을 밀어 열었다.

정요는 순간적으로 눈이 부셔 조금 어지러웠으나,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했다.

“공주 전하.”

눈을 들어보니 정미가 공주의 한걸음 뒤에 있는 것과, 태자비의 몸종 궁녀 약접은 공주 뒤에 공손하게 선 것이 보였다.

공주는 걸어들어와 고개를 들고 불만스럽게 정요를 쳐다봤다.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고 하던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정요가 목을 감싸 쥐며 몸을 숙여 웃었다.

“공주 전하, 신녀가 여기를 다쳤는데, 방금 땀이 났더니 조금 괴로워서요. 그래서 닦으러 왔답니다.”

공주는 정요의 목을 흘끗 보더니, 불쾌한 듯 눈을 피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정요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래, 다 됐으면 나와 재미있게 놀아줘. 너는 모르지. 방금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너를 찾았는데. 계속 못 찾다가, 결국 똑똑한 내가 큰올케언니한테 가서 약접을 데려왔어. 그래서 찾을 수 있었던 거야.”

약접은 태자비의 대궁녀였기에, 동궁의 구조를 아주 잘 알았다.

정요는 오늘 외출할 때 오늘의 운수를 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왜 이렇게 일이 안 풀리는 거야! 공주가 나를 찾으러 온 것도 모자라서, 태자비의 몸종 궁녀까지 데리고 오다니. 만약 나와 태자의 일을 알게 되면 어떡하려고!

태자가 다행히 도중에 멈췄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지금쯤 이미 발각되었을지도 몰라! 당연히 이런 때에 들켜선 안 되지. 그랬다면 명분도 없이 집에서 쫓겨날 것이고, 평생 이 오점을 씻어내지 못할 거라고.’

정요는 아직 벽장에서 숨어있을 태자를 떠올리고, 얼른 공주의 손을 잡고 온화하게 말했다.

“공주 전하께서 어떤 놀이를 원하실까요? 저희 돌아가서 얘기해봐요.”

“좋아.”

공주가 정요의 손을 잡고 나갔고, 정미는 빈방을 한 번 훑어보고는 둘을 뒤따랐다.

정요가 뭐하러 자리를 떴는진 확실하지 않지만, 정요가 저지르는 일은 늘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공주가 나타나서 정요의 일을 방해하게 되었다면 좋은 것이었다.

궁녀 약접이 뒤에서 걸어갔다.

그녀는 늘 세심한 사람이었다. 태자비가 거주하는 곳은 늘 궁녀와 내시들을 이끌고 청소하고 정리하곤 했기에, 이 외진 방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정가의 둘째 아가씨께서 목에 상처가 있다고 해도, 왜 굳이 이 방으로 오신 걸까?’

화원에서 여기까지의 방 중 어느 방도 이곳보다는 깨끗했다.

약접은 의심을 품고 문을 닫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방의 물건들을 자세히 둘러봤다. 시선이 크고 높은 벽장에 꽂혔을 때, 약접은 갑자기 멈춰서더니 곧장 얼굴을 굳혔다.

자단목의 벽장 틈에 검은색 옷자락이 끼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약접은 그곳을 빤히 쳐다보며, 문에서 소리가 날 정도로 손을 벌벌 떨었다.

“약접?”

따라온 소궁녀가 답답한 듯 그녀를 불렀다.

약접은 정신이 들어 폭풍이 몰아치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녀는 천천히 문을 닫고 겨우 침착을 유지하며 말했다.

“가자.”

‘검은색에 금색 실을 수놓은 옷. 벽장 안에 숨은 사내가 누군지 알겠구나!’

* * *

정요는 어두운 얼굴로 태자비에게로 돌아왔다. 공주에게는 다음에 입궁할 때는 인형을 가져오겠다고 약속한 뒤에야 그 장난꾸러기를 달랠 수 있었다.

화 귀비는 원래 조카 대신 정미를 보러 온 것이었으나, 정미의 외모가 죽은 한옥주와 몹시 닮은 것을 보고는 마음이 식었고, 공주도 충분히 놀게 된 것 같았으므로, 아이를 데리고 돌아갔다.

태자비는 한 씨가 가는 것이 아쉬웠고, 정요의 표정이 좋지 않자 물었다.

“무슨 일 있었니?”

정요는 눈을 내리깔고 난처한 듯 대답했다.

“방금 공주 전하와 함께 나비를 잡다가 몸에 땀이 많이 났는데, 하필 최근 목에 홍진이 나서, 방금 닦았는데도 여전히 괴롭네요.”

“그랬구나.”

태자비가 중얼거리며 망설이더니 대궁녀 류영(流營)에게 명령했다.

“둘째 아가씨를 모시고 가서 씻겨드리고, 시원한 연고를 발라드리거라.”

“태자비마마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태자비가 웃었다.

“우리는 자매인데, 무슨 그런 서운한 말을 해.”

태자비 뒤에 서 있던 대궁녀 약접은 몰래 정요를 살펴보고는 입을 삐죽였다.

정요는 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류영을 따라 나갔다.

분위기는 정요가 나간 뒤에야 비로소 편안해졌다.

그러자 정미가 물었다.

“귀비마마께선 오늘 왜 오신 건가요?”

정아는 한 씨가 화 귀비를 좋아하지 않는 걸 잘 알고 있었고, 방 안엔 심복이 약접 한 명밖에 남아있지 않았기에 솔직하게 얘기하기로 했다.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해. 사실 오늘 어머니와 정미를 부른 것도 귀비마마께서 꺼내신 얘기였어. 하지만 난 귀비마마께서 아무 이유 없이 행동하는 분이 아니라고 생각해. 어머니가 오신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찾아오셨으니, 내 생각엔 두 여동생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정아는 방금 인사를 할 때 화 귀비가 정미를 열심히 쳐다보는 것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한 씨가 정미를 흘끗 훑어보고는 웃었다.

“이 둘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정아의 눈이 반짝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오늘 아침 일찍 귀비마마 처가에서 조카가 궁에 들어왔습니다. 그러고 나서 귀비마마께서 어머니의 입궁을 얘기하셨어요. 그 조카는 방탕아고, 어여쁜 여인들을 가장 좋아한답니다. 두 여동생 모두 외모가 출중하니, 설마―”

한 씨가 깜짝 놀랐다.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정아가 손을 뻗어 한 씨를 눌렀다.

“저도 그저 추측일 뿐입니다. 하지만 두 여동생도 확실히 나이가 찼어요. 어머니께서도 최대한 일찍 두 사람의 혼사를 생각해두셔야겠습니다.”

한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면 나리와 얘기해보겠습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정미가 결국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저는 고려치 마세요. 저는 시집가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게 무슨 헛소리니!”

한 씨가 노려봤으나, 정미는 한 씨와 부딪히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만약 어머니께서 저를 꼭 시집 보내셔야겠다면, 저를 아껴주고, 지켜주고, 잘 알고, 이해해주며, 가장 중요한 건 평생 저만 보는 사람으로 찾아주세요. 통방이나 첩이 없는 사내로요.”

정미의 말에 태자비와 한 씨는 눈을 뜬 채 말을 잇지 못했다.

한 씨는 한참 뒤에야 꾸짖었다.

“너 꿈을 꾸고 있는 게냐?”

정미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뭐가 꿈이라는 거예요? 외조부께서 바로 그런 분이시잖아요? 어머니께서도 시집가실 때 그런 사내를 원하신 거 아니었어요? 사람 같지도 않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상심할 바엔 조용히 혼자 사는 게 더 나아요.”

수도에선 아비 되는 자가 너그럽기만 하다면, 평생 미혼녀로 사는 아가씨도 없는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정혼한 사내가 죽거나 퇴혼 혹은 집안 사정, 아니면 장녀가 아래의 동생들을 위해 가업을 이어야 하는 이유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시집을 가지 않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멀쩡한 아가씨가 평생 독신으로 사는 것은 좋은 소리를 들을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 큰언니, 제가 말과 행동을 대담하게 한다고 생각하시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저는 정말 아무 사내에게나 시집가고 싶지 않아요. 제 외모가 아름다울 땐 몇 년 정도야 저를 아껴줄지 몰라도, 나중에 언젠간 다른 여인들과 한 사내를 둘러싸고 경쟁할지도 모르지요. 그럼 한평생 답답하고 재미없을 거예요.

어머니, 아시잖아요. 제겐 돈을 벌 능력이 있어요. 부의가 된 이후 유명해지면 떳떳하게 존중을 받을 수 있을 거고요. 그런데 왜 굳이 시집을 가야 하지요?”

태자비는 멍하니 여동생을 바라봤다.

겨우 열네 살의 소녀가 단호한 표정과 확고한 말투로 놀라운 말을 끊임없이 뱉어내고 있었기에, 태자비는 황당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일리가 있다고 여겼다.

자신도 태어나자마자 이 살벌하고 깊숙한 궁에 들어와 영원히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을 사내에게 의지할 운명을 짊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한 씨도 정미의 부의에 대한 능력은 믿고 있었기에, 왠지 모르게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 때문에 더욱 화가 나서 눈을 부라리며 흔들리는 속마음을 숨겼다.

“망할 계집, 그런 헛소리는 그만하거라! 네 큰언니 앞에서 무례하게 굴다니, 돌아가면 혼내줄 것이다!”

정미는 반박할 말을 삼키며 눈썹을 찌푸리고는, 정아를 바라봤다.

“큰언니, 혹시…… 먹어선 안 될 음식을 드셨나요?”

정아가 깜짝 놀랐다.

“먹어서 안 될 음식이라니?”

정아는 배 속의 아이에 관한 일이라면 더욱 긴장했고, 저도 모르게 약접을 쳐다봤다.

약접이 급히 말했다.

“저희 태자비마마의 식사는 모두 독을 검사하고 있습니다. 평소 드시는 모든 음식은 작은 주방에서 따로 만들고, 다른 사람이 보내는 음식은 드시지 않습니다.”

정미가 고개를 저었다. 정아의 표정이 갈수록 무거워졌다.

“큰언니, 저는 그저 식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제가 마마의 얼굴을 보니, 아마도 태아에게 영향이 있을지도 모르는 약물을 드신 것 같은데―”

한 씨가 말을 끊었다.

“퉤퉤퉤, 이 계집이 무슨 소릴 하는 거람!”

정아는 이미 창백한 얼굴로 중얼댔다.

“약물? 태아를 안정시키는 탕약 외에, 다른 약은 복용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갑자기 소진 도사가 자신에게 먹였던 부수를 떠올렸다.

‘매일 한 잔, 연속으로 9일 마시면 배 속의 아이를 남자아이로 바꿔 한 번에 황손을 낳을 수 있다고 했어. 설마 그 부수의 문제인가?’

태자비는 어린 여동생을 보며 속으로 실소했다.

‘그럴 리 없어. 소진 도사가 어떤 사람인데. 북명진인의 제자라고. 오랫동안 부적을 배웠는데, 정미보다 못할 리 있나? 소진 도사가 만약 나를 해친 거라 해도, 그녀에게 좋을 일이 없는데?’

정미는 태자비가 사색에 잠긴 것을 보고는 정중하게 당부했다.

“큰언니, 어쨌든 간에 앞으로 정상적인 식사 외에 이상한 약물은 드시지 마세요. 언니의 태아는 황손이에요. 제가 보기엔 아주 잘 지내고 있으니, 약을 먹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상한 약물을 먹으면 아이에게 영향이 있을지도 몰라요.”

태자비는 정미에게 자신을 보기만 한 것으로 이런 놀라운 결론을 얻어낼 만한 능력이 있을 거라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귀여운 아이의 다정한 말을 미워할 리가 없었다. 이에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

‘그 부수를 이미 6일이나 먹었는데, 남은 3일은 그냥 먹지 말까?’

얼마 후, 정요가 씻고 돌아왔다. 한 씨는 태자비와 잠시 이야기를 더 나누다가 태자비가 조금 피곤한 듯 하자, 인사하고 돌아갔다.

한 씨 모녀가 떠난 뒤, 약접이 조용히 정아를 건드렸다.

“태자비 마마, 소인이 마마께 아뢸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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