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계획 실패
“아야, 내 눈을 건드렸어.”
공주가 정요를 밀치며 뾰로통하게 말했다.
정요의 표정이 조금 변하는가 싶더니, 급히 말했다.
“공주 전하, 죄송해요. 방금 제가 조심하지 않았어요. 괜찮으신가요? 저 좀 보여주시겠어요?”
사실 정요는 공주의 눈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저 넋을 놓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주다가, 손수건의 끝자락이 공주의 속눈썹을 건드린 것뿐이었다.
하지만 공주는 응석받이로 자랐기에 조금의 억울함도 견디지 못하는 터라, 방금 나비를 쫓으며 쌓았던 친분은 이렇게 사라져버렸다.
더없이 귀한 신분인 이 나이의 소녀에겐, 다른 사람이 자신을 모시고 놀아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공주의 환심을 사고 싶어도 한계가 있었다.
“봐주지 않아도 돼. 얼뜨기 같으니, 유모보다도 못해!”
공주는 정요를 밀치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정미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예쁜 언니는 뭐 해?”
공주가 다가가서 정미 곁에 앉았다.
정미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솔직하게 대답했다.
“앉아 있습니다.”
“방금 너는 나와 나비를 잡아주지 않았어.”
공주가 질책했다.
‘예쁜 언니’ 소리에 몰래 이를 갈던 정요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이 아이는 정말 돌보기 힘들다. 방금 같이 나비를 쫓아주느라 다리가 부러질 지경인 데다가, 온몸에 땀까지 흘렀다고. 게다가 높은 깃의 옷을 입어서 목이 아주 불편하기까지 한데, 이렇게 태도를 바꿀 줄이야. 정미는 어떻게 대응하는지 한번 보자!’
정미는 어제 사냥할 때 위험한 일을 겪었고, 밤에 잠도 설쳤기 때문에 지금 따스한 햇살 아래 앉아있으니 나른하여 당장이라도 자러 가고 싶었다. 그녀는 공주를 달래줄 인내심이 남아있지 않아 그저 차분하게 대답했다.
“저는 달리기가 느려 잡지 못합니다. 공주께서 또 나비를 잡고 싶으신가요? 그럼 제 둘째 언니가 같이 잡아줄 거예요. 저기, 방금 공주 전하를 모시고 나비를 잡아준 언니요. 좋아할 겁니다.”
정요는 새파래진 얼굴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정미를 바라봤다.
공주는 정요를 흘끗 보고 짜증을 냈다.
“싫어. 쟤는 방금 나보다도 많이 못 잡았는걸. 그럼 예쁜 언니는 뭘 할 줄 아는데?”
정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싱싱한 풀들을 훑어보고는 말했다.
“풀 메뚜기를 엮을 줄 압니다. 제 사촌 오라버니 중 하나가 가르쳐준 거예요.”
“메뚜기? 메뚜기가 뭐야?”
정미가 풀 한 움큼을 뜯었다.
“제가 엮는 걸 보시면 됩니다.”
공주는 얌전히 거기 앉아서, 정미가 풀로 메뚜기를 엮는 것을 열심히 쳐다봤다.
정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드디어 조용해졌어.’
한편 정요는 화가 나 뒤로 넘어갈 것만 같았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내가 목숨을 걸고 그렇게 오랫동안 공주와 나비를 잡으러 다녔는데, 정미가 풀을 뜯어서 메뚜기를 엮는 것보다 못하다고? 설마 그저 정미가 나보다 예쁘기 때문이야?’
이때, 한 시녀가 몰래 정요의 옆으로 와 조용히 그녀를 잡아당겼다.
정요는 그 손길에 일어났고, 정미에게 차분히 설명했다.
“방금 공주 전하와 나비를 잡느라 온몸에 땀이 났어, 가서 정리하고 올게.”
정미가 냉담하게 시선을 거두자, 정요는 안심하며 궁녀를 따라갔다.
정요가 떠나자, 정미는 엮은 메뚜기를 공주에게 건넸다.
공주는 기뻐하며 건네받고는, 신기한 듯 초록빛의 풀메뚜기를 쓰다듬었다. 그 아이는 그것을 실컷 살펴본 후 정미에게 물었다.
“예쁜 언니, 또 뭘 할 수 있어? 메뚜기도 재밌는데, 다른 재밌는 것도 필요해.”
정미가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없습니다.”
“재미없어!”
“하지만 제 둘째 언니, 그러니까 방금 전하와 함께 나비를 잡은 그 언니. 그 언니는 재밌는 것을 많이 알아요.”
“뭘 할 줄 아는데?”
“천으로 많은 동물을 만들 줄 알지요. 아기 돼지, 원숭이, 여우 등등. 아주 귀엽고, 저희가 평소 볼 수 있는 것과는 다르답니다.”
“정말?”
공주가 흥미로워했다.
“정말이에요.”
정미는 공주의 반짝이는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는 그제야 정요가 떠났다는 게 생각나 눈살을 찌푸렸다.
“그 언니는 어디 갔어?”
“저도 몰라요. 몸을 정리하러 간다고 했어요. 이렇게 넓은 곳에서 어디로 갔는지 누가 알겠어요?”
공주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손뼉을 쳤다.
“그럼 우리 같이 찾으러 가자. 나는 숨바꼭질을 제일 좋아하거든.”
정미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 * *
한편 정요는 궁녀를 따라 편전(偏殿)으로 갔다.
눈에 띄지 않는 방의 입구에 다다르자, 궁녀가 발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말했다.
“아가씨, 전하께서 안에 계십니다.”
정요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세게 끌려가 벽에 밀쳐졌다.
2월 말, 날씨가 따뜻해지기 시작했다지만 내원의 벽은 아직 차가웠고, 그 벽에 기댄 정요는 등에 땀까지 났던 터라 순식간에 추위를 느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로 다가오는 뜨거운 숨결에 다시 더워졌다.
“전……, 전하……, 이러지 마세요…….”
정요가 손을 뻗어 사내를 밀어내려 했다.
“가만히 있거라!”
태자의 목소리는 낮고 두꺼워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태자의 한마디는 마치 마력을 지닌 듯 정요의 손을 멈추게 했다.
태자는 정요를 벽 구석에 몬 채 그녀의 붉은 입술을 빼앗았고 난폭하게 입맞춤을 해댔다.
정요의 눈이 커졌다.
정요와 태자와의 관계는 2년간 뭔가 있는 듯 없는 듯했고, 한 번도 이렇게 들추어낸 적은 없었다. 태자가 참은 것이 아니라, 정요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태자 같은 신분의 사람에게, 쉽게 얻을 수 있는 여자가 매력적일 리 없었다.
하지만 정요는 근래 궁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태자가 인내심을 벗어던지고 이렇게 달려들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두 사람 사이엔 형부와 처제라는 속박이 있었지만, 만약 그 관계가 아니었다면 태자도 마음에 든 여인을 두고 이렇게까지 참지 않았을 것이다.
정요는 점점 숨이 차올랐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역시 내가 옳았구나. 평소 감정이 있는 듯 없는 듯 대하고, 잠시 멀리하니 태자를 더욱 애타게 했군. 오늘부터 우리의 관계는 새로 시작될 것이다. 이 시작은 당연히 태자가 찾아오기만을 힘겹게 기다리는 여인들과는 다를 거야.’
정요는 일부러 발버둥 치며 고개를 세차게 돌렸고 눈물을 흘렸다.
태자의 얇은 입술이 마침 정요의 눈물이 지난 뺨에 닿자, 그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태자가 잠시 주춤한 틈을 타 정요는 그를 밀치고 얼굴을 가렸다.
“전하, 이러시면 제가 어찌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겠습니까!”
“요야, 어찌 형부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냐?”
태자가 낮게 웃었다.
눈앞의 사내는 한지 같은 애송이가 아니었고 이미 성숙한 사람이었기에, 정요에게 마음이 흔들렸더라도 미인의 눈빛 하나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자가 아니었다.
정요의 얼굴이 붉어졌고, 태자의 놀리는 듯한 눈빛에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전하, 계속 그런 말씀을 하시면 저는 부끄러워서 살 수가 없습니다!”
태자가 가볍게 웃으며 손을 뻗어 정요를 품에 꼭 안았다. 태자의 콧김이 정요의 목에 닿아 간지러웠다.
“요야, 본궁도 네 마음속에 내가 있는 걸 안다.”
정요의 몸이 굳었다.
태자는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요야, 고집부리지 말거라. 마음속에 내가 있는지 없는지만 말하면 된다.”
“전하―”
태자는 고개를 숙이더니, 갑자기 정요의 귓불을 입에 머금었다.
정요의 몸이 떨렸다.
태자는 한창인 청년이었고, 2년 동안 자신을 홀렸던 미인을 품에 안고 나니, 한 나라의 황태자인 그가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었다. 그는 다시 정요의 턱을 들고 거친 입맞춤을 했다.
숨소리가 뒤얽히는 소리가 났다.
정요는 온몸에 힘이 풀린 채로 사내의 품에 안겼다.
태자의 손은 이미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정요는 고개를 젖히고 가만히 태자의 거센 공격을 받았다. 그녀는 당연히 적당한 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존귀한 태자를 지나치게 거절하면, 아무리 감정이 있는 사이라 하더라도 순식간에 아무것도 아니게 될 수 있었다.
‘2년, 이 사내와 2년 동안 애매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에게 달콤함을 맛보게 해주어야 나를 더욱 지켜주겠지. 한 씨 모녀의 태도를 보아 이번이 아니면 궁에 들어오는 것조차 어려울 테니.’
벽에 짓눌린 정요는 태자의 뜨거운 정열을 느꼈다. 속으로 불안했지만, 침착함이 더욱 컸다.
‘이렇게 오랫동안 끌어왔으니, 태자를 확실히 잡을 때도 되었지. 예전엔 태자의 마음을 뺏는 것에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면, 오늘은 태자의 몸까지 내게 빠져들게 만들어야 해.’
정요는 자신이 있었다. 자신의 몸을 가져본 사내는, 미치지 않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태자가 아무리 태자비를 냉대한다고 해도, 정아가 아이를 낳으면 그녀가 태자의 아이의 생모가 되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정요는 자신을 추켜세우지 않았다. 태자가 그녀를 위해 나서주기엔 이 정도의 감정만으론 부족하다는 것을 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자가 자신에게 푹 빠져서 미쳐야만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었다.
정요는 정아가 낳을 아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정아가 계속 태자비의 자리를 지켜, 앞으로 절대 자신을 동궁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두려울 뿐이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마음대로 하게 두는 정요의 모습에, 태자는 더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옷깃의 단추에 손을 뻗었다.
햇빛이 잘 드는 시간이었고, 실내에도 환한 빛이 충분히 들어오고 있었다.
옷깃이 열리고, 새하얀 쇄골이 드러났다. 하지만 목에 줄지은 물집에, 태자는 순간적으로 마음이 식는 것을 느꼈고, 파리를 먹은 듯한 표정으로 그곳을 빤히 쳐다보았다.
정요는 눈을 떴고, 태자의 눈빛을 보자마자 이유를 알게 되었다.
‘정미, 이 천 번을 죽여도 시원치 않을 것! 정말 죽고 싶어!’
“전하, 보, 보지 마세요!”
정요는 옷깃을 부여잡고 수치스러워했다.
태자는 정신을 차리고 가볍게 기침하고는 진지하게 물었다.
“어쩌다 그런 건가?”
방금은 마음이 급했지만 물집을 본 순간 곧바로 욕정이 사라진 태자는 자신이 외모를 중시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어, 목의 상처에 유난히 관심을 가지는 척했다.
물론 태자가 그저 정요의 얼굴만이 마음에 들었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태자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그 여인들은 전신을 깨끗이 씻는 것도 모자라 꽃잎으로 목욕을 하고 향로를 바르기까지 하며, 자신의 몸을 윤기가 흐르고 작은 흠집 하나도 없이 깨끗하게 관리했다.
그러니 정요처럼 목에 큰 물집이 줄지어 있는 것은, 확실히 태자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었다.
“전하, 여쭈지 마십시오.”
정요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평소의 단정함을 되찾았다.
“요야―”
태자가 정요의 손을 잡아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 게냐?”
정요는 태자와 마주 보았다. 눈가에 자조가 스쳤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전하, 더 여쭈실 필요 없으십니다. 저는 일개 서녀이고, 이렇게 멀쩡히 큰 것만 해도 하늘이 도운 것이나 다름없는데, 어찌 질책할 수 있겠습니까.”
태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요야, 누가 널 괴롭히는 것이냐? 네 적모이냐, 아니면―”
그는 자신을 ‘형부’라 부르는 소녀를 떠올렸고, 갑자기 말을 잇지 못했다.
정요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말 부주의했구나. 내가 스스로 정미를 언급해 태자에게 정미의 인상을 더 짙게 만들다니. 지금의 정미는 예전의 정미가 아닌걸!
예전이었다면 태자가 그 까맣고 뚱뚱한 못생긴 계집이 나를 괴롭혔다는 걸 알면, 분명 나를 더 가련하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정미가 그렇게 변한 이상, 태자를 그쪽에 뺏기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정요는 지금 태자의 마음속 지위가, 정미보다는 자신이 높다는 걸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태자의 신분이라면 곁에 미인을 많이 두는 것을 결코 싫어하지도 않을 것이다.
정요는 태자를 반드시 얻고 싶었다. 태자에게 아무것도 대신 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2년 동안 조심스럽게 미묘한 감정을 쌓아 온 것 외에, 자신의 이 특별한 몸을 더욱 믿었다.
‘그런데 정미의 그 찻물 때문에 좋은 기회를 잃을 순 없어!’
정요는 어차피 오늘은 일을 치를 수 없으며, 짧은 시간 안에 태자의 불쾌한 기억을 지워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벌써 열여섯 살이었다. 하루라도 지체하면 하늘과 땅이 뒤집힐 변화가 있을지도 모를 정도로 시간이 급박했다. 하지만 시작부터 이렇게 좋지 않으니, 실망하고 화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미, 그 찻물을 아주 잘 부었구나? 하지만 그 놀라운 정보를 들었으니 그렇게 헛된 일도 아니었지. 이 일은 조만간 돌려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