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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114화 (114/375)

114화. 울화가 치미는 정요

“아가씨, 연지를 조금 바르시지요.”

화미가 교천성의 연지를 들고 정미의 의견을 물었으나, 정미가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어.”

한 씨가 뺨을 때린 뒤로, 정미는 다신 이런 것들을 만지고 싶지 않았다.

화미는 생각하더니 다시 말했다.

“주방에 오이가 몇 개 남아 있는데, 소인이 썰어와서 얼굴에 올려드릴까요?”

여종에게 입궁은 아주 큰일이었다. 입궁이 아니었다면 온실에서 사온 귀한 오이를 입 밖에 꺼내지 않았을 터였다.

정미는 차가운 표정을 한 채 긴 눈으로 화미를 한 번 훑어봤다.

“됐어.”

오이를 얼굴에 올리는 방법은 정요가 알려준 것이었다. 그때는 효과가 좋아 정요에게 아주 고마워했지만, 이 여종들까지 이것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화미는 깜짝 놀라 더는 말을 잇지 못했고, 몰래 환안을 흘끗 쳐다봤다.

환안은 정미에게 쌍환계를 묶어주고는 장미와 금으로 된 머리 장식을 꽂아주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분홍색 진주 구슬을 두 줄 둘러주고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선 연지를 바르지 않으셔도 두꺼운 분을 바른 여인들보다 훨씬 아름다우세요.”

이때 청가가 깡충깡충 뛰어 들어와, 분홍색 해당화를 한 떨기 들고 정미의 곁으로 와 바쳤다.

“아가씨, 소인이 아가씨께 달아드리려고 꽃을 꺾어왔어요.”

그 해당화는 아주 예뻤고, 머리에 꽂기에 가장 잘 어울렸다. 환안은 정미가 거절하지 않자 잘 핀 꽃을 몇 송이 골라 쌍환계에 한 바퀴 꽂았다.

적당히 꾸민 후, 정미는 이연원으로 향했다.

정요는 이미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소박한 모습이었고, 높은 깃의 옅은 남색 내의에 연한 분홍색의 치마를 입어 연꽃을 연상케 했다.

정미는 눈살을 찌푸리고 기회를 잡아 한 씨에게 물었다.

“어머니, 왜 정요도 함께 가는 거예요?”

한 씨는 조카가 그녀에게 정요를 적녀로 올려 달라 부탁한 뒤로, 정요에 대한 태도가 냉담해졌다.

사실 한 씨의 성정은 아주 단순했다. 사람을 미워하는 데에는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고, 한 가지 이유만 있으면 됐다.

이렇게 생각하면, 한지는 좋아하는 사람을 구덩이로 빠트리는데 아주 힘을 쓴 셈이었다.

“동궁에서 태자비가 여동생들을 보고 싶어 하신다고 전했지 않았니. 저번에 태자께서도 다음에 궁에 들어올 땐 떠들썩했으면 좋겠다고 하셨고.”

정미는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어머니, 어머니께선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시는 건가요? 태자 전하께 정요가 있고 없고를 신경 쓸 겨를이 있다니요. 정요가 가지 않으면 떠들썩하지 않은 겁니까? 결국엔 제가 큰언니의 친동생이고, 여태 입궁할 땐 그저 제가 가는 길에 정요를 데리고 간 것뿐이에요. 큰언니는 한 번도 정요를 부른 적 없는걸요.”

한 씨는 정미의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미야, 그게 무슨 뜻이니?”

정미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기에, 입을 오므리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는 그저 태자께서 정요를 특히 신경 쓰시는 것 같아서요.”

정미가 아무렇게나 말할수록 한 씨는 신경이 쓰여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이번엔 그냥 가도록 하고, 다음부터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이상 정요는 집에 얌전히 있기로 하자꾸나.”

“예.”

정미는 그제야 아름다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가는 길에는, 아무도 먼저 말을 하지 않았다.

* * *

동궁에 들어가자, 태자비 정아가 그들을 맞이하며 한 씨의 두 손을 맞잡았다.

“어머니.”

한 씨는 태자비를 위아래로 훑더니 안심한 듯 웃었다.

“태자비마마의 안색이 좋아지셨습니다.”

하지만 옆에 선 정미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큰언니의 얼굴을 보니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정미는 자세히 훑어볼수록 눈썹이 찌푸려졌다.

‘왜 망진으로만 보면 큰언니가 함부로 뭔갈 먹은 것 같지? 게다가 그 음식은 큰언니 배 속에 있는 아이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은데…….’

“정미, 왜 그래?”

태자비가 정미를 바라보며 물었다.

“마마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미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젯밤 잠을 설쳤어.”

태자비가 웃으며 정요를 바라봤다.

“정요는 늘 그렇듯 안색이 좋아 보이네.”

정요가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과찬이십니다.”

모녀들은 내실로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었고, 차 한잔을 마셨을 시간이 지났을 때, 내시가 외쳤다.

“귀비마마와 아홉째 공주께서 오셨습니다―”

태자비가 급히 일어나 맞이했고, 한 씨는 깜짝 놀란 듯 그 뒤를 따라갔다.

잠시 후, 궁장(宮裝)을 입은 여인이 서너 살 된 여자아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궁장을 입은 여인은 한창 꽃다운 나이의 여인처럼 보였지만, 웃을 때 눈가에 스치는 주름으로 봐서 나이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 주름은 그녀의 미모에 영향을 주지 않았고, 오히려 세월의 흔적에 느껴지는 특유의 풍아함을 풍겼다.

이 사람이 바로 현재 후궁들을 압도하며 가장 총애를 받는 왕비인 화 귀비였다.

“모비(母妃).”

태자비가 절을 올렸다.

태자비는 회임한 지 거의 4개월이 되어 아랫배가 눈에 띄게 볼록해져 있었다.

화 귀비가 태자비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어서 일어나거라, 아기에게 해가 된다.”

한 씨가 정미와 정요를 데리고 예를 갖추자 화 귀비가 웃으며 말했다.

“한 부인이 아가씨들을 데리고 왔다기에, 마침 이 아이도 심심하다고 해서 데리고 왔다.”

화 귀비가 말한 아이는 아홉째 공주였다.

화 귀비는 태자 하나만을 낳았지만, 몇 년 전 아홉째 공주가 태어나자마자 생모가 죽으면서 그녀를 양녀로 삼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화 귀비는 아들과 딸을 모두 가진 셈이었다. 게다가 황제의 총애까지 받으니, 얼마나 많은 궁녀들이 부러워하고 있는지 몰랐다.

화 귀비는 내실로 가지 않았고, 거실에 앉아 한 씨의 뒤에 서 있는 자매를 훑어보며 웃었다.

“이 아가씨들이 바로 한 부인의 두 딸이구나. 오랜만에 보는 것 아니냐. 아가씨들은 하루마다 모습이 바뀌어서, 만약 밖에서 봤으면 본궁도 몰라봤을 것이다.”

한 씨는 화 귀비를 아주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과 풍 황후는 친한 벗이었고, 태후와 풍 황후는 고모 조카 사이였다.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사랑스럽다는 말처럼, 태후는 한 씨에게도 아주 잘해주어 소녀 시절에 자주 궁을 드나들었다.

나중에 한 씨의 혼사가 뜻대로 되지 않은 뒤, 풍 황후는 갑자기 유폐 당하게 되었다. 황후라는 자리를 폐위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폐위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궁 안의 사람들은 황후를 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태자비가 있기에, 한 씨는 화 귀비를 싫어하더라도 미움을 받을 순 없었다.

“요야, 미야, 어서 귀비마마께 인사를 올리지 않고.”

정요와 정미가 절을 올리자, 화 귀비가 정요를 훑어보며 빙그레 웃었다.

“이 아가씨가 둘째 아가씨이지? 용모와 행동이 갈수록 품위가 있어지는구나.”

화 귀비는 말하면서 정미에게로 시선을 옮겼고, 저도 모르게 멍해졌다.

정미를 보는 화 귀비의 눈에 놀라움과 의아함이 스쳤다. 그녀는 기다랗고 붉은 손톱으로 매끈한 백자 찻잔을 훑다가 다시 우아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셋째는 많이 변한 것 같군. 순간 못 알아볼 뻔했다.”

그녀는 아름답게 웃으며 전혀 티 내지 않았지만, 손가락을 넓은 소매 안으로 숨겨 꽉 쥐어, 하마터면 열심히 기른 손톱이 부러트릴 뻔했다.

‘이 정가의 셋째, 한옥주랑 너무 닮았는데?’

화 귀비가 한 씨를 흘끗 쳐다봤다.

한 씨가 말했다.

“얼굴이 핀 것이지요. 사실 어릴 때와 그리 다르지 않답니다.”

화 귀비가 정미의 어릴 적 모습을 기억할 리 없었다. 그녀는 정미를 볼 때마다 마음이 찔려 조카를 도와주려던 마음이 조금 옅어지는 것을 느꼈다.

“모비, 두 언니들과 함께 나가서 놀고 싶어요.”

그때 아홉째 공주가 입을 열었다.

공주는 겨우 서너 살 정도 되어 보였고, 아이 같은 목소리와 태도를 보아 화 귀비와 꽤 가까운 것 같았다.

화 귀비도 공주를 꽤나 진심으로 아꼈기에, 웃으며 공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공주, 두 언니는 손님이랍니다. 오자마자 언니들더러 같이 놀러 나가 달라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요?”

공주가 입을 삐죽였다.

“하지만 방 안에 있는 건 재미없단 말이에요. 꽃도 없고, 나비도 없어요.”

태자비가 입을 열었다.

“모비, 제 동생들도 이곳에 자주 와봤으니 동궁이 낯설지 않을 겁니다. 공주를 데리고 정원에서 걷도록 해도 괜찮습니다.”

정아는 화 귀비가 아홉째 공주를 얼마나 총애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화 귀비는 태자를 낳은 후 아이가 없었고, 여전히 변함없는 우아함을 유지했지만, 나이가 들며 황자를 회임할 수 없게 되었다. 때문에 아홉째 공주에게 자연스레 모정이 생기게 되었다.

태자비의 말에 화 귀비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더 짙어졌고, 정미를 한 번 훑어보고는 말했다.

“그럼 부탁 좀 하마.”

정미는 모르는 아이와 함께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이 소녀가 아무리 귀엽더라도 어쨌든 귀한 공주라 편하지도 않았기에, 그저 담담하게 ‘예.’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정요는 기꺼이 이 임무를 떠맡으며 방긋 웃었다.

“걱정 마세요, 귀비마마. 신녀가 공주 전하를 잘 모시겠습니다.”

두 자매와 한 무리 궁녀들이 공주를 데리고 나가자, 화 귀비는 평소의 표정을 되찾고 태자비의 몸 상태를 물었다.

* * *

동궁의 화원은 그리 큰 편이 아니었지만 정교하게 꾸며져 있었고, 마침 봄기운이 한창 무르익었을 때라 초목이 무성하고 꽃이 현란하여 가장 예쁠 때였다.

공주는 정미와 정요를 잡아당기며 나비를 잡으러 다녔다.

정미는 별로 흥미가 없었고, 이것이 시간 낭비로 여겨져 아주 천천히 달리고, 느리게 반응하며 공주를 모시다가, 이후 정요와 공주가 잘 노는 것을 보고는 얼른 돌의자에 앉아 게으름을 피웠다.

정요는 공주와 이각(*二刻: 30분) 정도 놀아준 후 땀을 흘리며 온화하게 말했다.

“공주 전하, 저희 잠깐 쉬어요. 저 언니는 계속 쉬고 있는걸요.”

아이들은 늘 자신을 잘 놀아주는 사람을 더 친하게 여기는 법이었기에, 공주는 정요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정요는 그제야 공주를 데리고 정미 곁으로 가 앉았다.

“역시 정미는 한가하구나.”

“응, 나는 나비 잡는 걸 안 좋아해서.”

정미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정미는 사실 정요가 어째서 누구에게나 잘해주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홉째 공주가 정요를 좋아하게 되고, 그래서 화 귀비도 정요를 좋아하게 된다고 해서, 정요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아, 아니다, 깜빡하고 있었네. 정요가 얼마나 욕심이 많은데. 꿈속에서 정요는 태자의 양제(良娣)가 되어있었잖아. 이렇게 생각하면 지금 화 귀비와 아홉째 공주의 마음을 얻는 것도 헛수고는 아니지.’

정미는 정요가 손수건을 꺼내 공주의 땀을 닦아주는 것을 보았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려 냉소했다.

‘이번엔 내가 있으니 절대 큰언니에게 큰일이 나지 않을 거야. 큰언니가 계속 태자비일 수 있다면, 화 귀비가 정요를 아홉째 공주보다 아낀다고 하더라도 정요는 태자의 양제가 될 수 없어.’

정요는 아홉째 공주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면서도 정미를 신경 쓰고 있었다. 그녀는 정미의 담담한 표정을 보고 속으로 울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바로 저 정미의 당당함이 싫었다.

‘정미는 도대체 뭘 믿고 항상 자신이 싫어하는 것에 대해 당당하게 싫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나도 알아. 네다섯 살도 아니고, 열몇 살이나 되어서 누가 부채를 들고 얼간이처럼 나비를 쫓는 걸 좋아한단 말이야!’

정요는 정미가 제멋대로 사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하지만 아무도 정요에게 이렇게 굴라고 한 적 없다는 것을 항상 잊곤 했다. 정요는 그저 자신의 태도가 좋으면, 얻는 게 많으리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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