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귀비의 소견(召見)
한평이 멀리 걸어가자, 한지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용흔, 오늘 좀 적절치 못했던 것 같은데.”
용흔이 남의 지적을 참을 리 없었다. 그는 곧바로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뭐가 적절치 않았는데?”
한지가 멀리 내다봤다.
저녁놀이 불처럼 타오르며 하늘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고, 마치 그 환골탈태한 소녀처럼 아름다웠다.
한지는 마음을 가다듬고 용흔을 쳐다봤다.
“용흔, 오늘 모두의 앞에서 정미를 안은 건, 아무리 걱정이 되어서였다고 해도 조금 지나쳤다.”
용흔이 냉소했다.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라는군. 정미가 지금 평판이 좋지 않은 건 대부분 네 탓 아니냐!”
한지가 한숨을 쉬며 용흔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용흔, 이렇게 억지를 부리면 나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정미에게 늘 남매의 정밖에 느껴지지 않았어. 정미가 내게 마음을 고백하고, 내가 완곡하게 거절한 일은, 내게 아무 잘못이 없다고 생각해. 그러고 나서 소문이 퍼지게 된 건, 소문을 퍼트린 사람에게 잘못을 물어야겠지!”
용흔은 화가 났다. 그는 한지의 손을 뿌리치며 노했다.
“너희 모두가 내가 퍼트렸다고 생각하는 거 알아.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어. 한지, 너도 알잖아. 내가 자신이 한 일을 부정한 적 있던가?”
한지는 용흔의 말을 믿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예전의 일은 더 이상 꺼내지 않으마. 나는 그저 앞으로 네가 정미에게 주의해줬으면 좋겠―”
말을 마치기도 전에 용흔이 입을 열었다.
“한지, 네가 뭐라고 내게 충고하는 거지? 정미의 친 오라버니도 아니면서! 네가 정말 정미를 신경 썼다면, 작년에 그렇게 억울하게 하지 말았어야지! 내 일은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내 일은 내가 제일 잘 아니까!”
“네 일은 네가 안다고?”
한지 역시 화가 났다.
“나는 네가 모르는 것 같은데! 넌 그저 네 성질대로 행동할 뿐이지. 그리고 정미의 평판을 더욱 나쁘게 만들고, 결국 좋은 곳으로 시집도 못 가게 될 거라고!”
“못난 계집은 다른 집에 시집가지 않을 거다!”
용흔이 갑자기 침착해지며 차갑게 한지를 훑어봤다.
“정미가 시집간다면, 나한테만 올 수 있다고!”
그러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 자리에 남은 한지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한평을 쫓아갔다.
* * *
정미가 백부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각 처소에서 맹 노부인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러 염송당으로 향할 때였다. 정미는 급히 옷을 갈아입고 얼굴을 닦은 뒤 염송당으로 향했다.
염송당으로 가는 길에는 정요를 마주쳤다.
정요의 목은 백조처럼 가늘고 아름다웠으며, 평소엔 직령(*直領: 곧은 옷깃)으로 된 배자(褙子)를 입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오늘은 높은 깃의 내의를 입어, 정미는 참을 수 없이 계속 정요를 쳐다보게 되었다.
정미의 눈빛을 의식한 정요는 미움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전에 정미가 뿌렸던 찻물은 정확히 목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고, 돌아간 뒤 살펴보니 목에 물집이 일어나있었다. 열흘이나 보름까지도 사라지지 않을 듯했다.
“정미.”
정요의 목소리에 정미가 차갑게 그녀를 훑어봤다.
정미의 차가운 눈빛에도 정요는 여전히 온화하게 웃고 있었지만, 조금의 쓸쓸함이 드러났다.
“정미, 우리 사이에 오해가 있는 거 맞지? 요즘 나한테 소원해졌어.”
정미가 웃었다.
“둘째 언니, 우리 사이엔 뭐든 있지만, 오직 오해만 없었던 거 아니야?”
만약 가능하다면, 정미는 이 모든 것이 오해이길 바랐다.
‘나는 여전히 그 뚱뚱하고 새까만 계집이고, 질투하고 부러워할 만한 재주를 가진 언니가 있으며, 열심히 그 언니의 발치를 따라잡으려 하지만 언니가 온화하고 선량한 덕분에 그 시기 질투를 적대감으로 드러내지 않고 좋은 자매의 정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랐어.’
하지만 지금은 사람이 이토록 악독할 수 있다는 것에 공포심까지 느끼고 있었다.
‘심지어 내가 코흘리개 시절일 때부터, 나보다 겨우 두 살 많은 사람이 나를 짓밟고 한 걸음씩 올라가 나를 망가뜨려서 자기 자신을 이루려고 했다는 것을,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고.’
“정미, 그렇게 말하지 마…….”
정요가 정미를 잡아당기며 간절한 태도로 말했다.
“지 오라버니의 일 때문에 아직도 내게 화가 난 걸 알아. 하지만 우리 자매가 오랫동안 쌓아온 정을 어떻게 고작 사내 하나 때문에 무너뜨릴 수 있겠어?”
정요와 마주 본 정미는 정요에게 갈채하고 싶었다.
‘정요는 정말로 나를 잘 아는구나. 늘 이렇게 내 마음을 관통하는 말을 하다니. 교만한 나는 눈앞의 언니가 여전히 예전의 정요라고 생각했다면, 정요가 지 오라버니를 좋아하더라도 지 오라버니 때문에 자매의 정을 끊어내지 않았을 거야.’
정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계속 오해하게 내버려 두면 되었다. 겉으로만 자매의 정이 두터운 척하는 건 정미도 이제 귀찮았다.
‘지금 사이가 틀어지면 최소한 정요가 앞으로 내 이름을 대고 무슨 짓을 하는 건 할 수 없을 테니까.’
“둘째 언니, 그때 지 오라버니가 나를 거절한 말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해.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거야. 언니가 차가운 눈으로 외면한 것과 우쭐한 것도, 절대 잊을 수 없을 거야. 자매의 정이니 뭐니 하는 얘긴 앞으로 하지 않았으면 해.”
정미는 정요를 뿌리쳤고, 멀리서 다가오는 정철이 언뜻 보이자 저도 모르게 방긋 웃으며 맞이했다.
“둘째 오라버니―”
정요는 그 자리에 서서 차가운 눈으로 정미와 정철이 함께 가는 것을 보았다. 석양 아래 두 남매의 긴 그림자가 청석길에서 교차했다.
정요는 웃음이 나왔다.
정요는 정미가 기절했을 때 귀신에게 씐 게 아닐까, 그래서 요즘 이상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확신하게 되었다. 정미는 더 이상 그녀가 알던 멍청한 계집이 아니었다.
‘자매의 정이 필요 없다고?’
정요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면서 더욱 찬란하게 웃었다.
‘그럼 그 남매의 정은 얼마나 오래갈까?’
* * *
화량은 집으로 돌아간 뒤, 곧바로 상사병을 앓았다.
눈을 뜨면 정미의 꽃처럼 웃는 얼굴이 보였고, 눈을 감으면 엄숙하고 경건한 표정으로 신기한 부수를 가볍게 자신의 팔에 뿌리는 모습이 떠올랐다.
‘미모와 능력을 둘 다 가진 낭자라니, 과연 내가 제일 좋아할 법한 여인이로구나!’
“량아, 저녁 식사를 걸렀다면서?”
그때, 아름다운 중년 부인이 걸어들어왔다.
“어머니.”
화량은 표정을 숨기고 일어나 맞이했다.
부인은 들고 있던 쟁반을 내려놓고 보자기를 벗겼다. 안에는 반찬 몇 가지와 찐빵 두 개가 있었다.
“따뜻할 때 먹거라. 아직 키가 클 때인데, 식사를 거르면 되겠니.”
부인은 수도에서 유명할 정도로 아들을 끔찍이 아꼈다.
화량은 방탕아였지만, 부인에게는 효심이 있었기에 이를 보고 어쩔 수 없이 젓가락을 들고 대충 몇 입 먹었다.
“량아, 걱정거리라도 있는 거니?”
화량이 곧바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어머니, 어떤 낭자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부인은 잠시 멍해지더니, 실소했다.
“그게 뭐라고. 네가 마음에 든 여인이 있다면 어미가 관리인에게 처리하라고 하면 된다. 귀족 가문 출신이면 바로 집으로 들이고, 만약 이상한 곳의 여인이라면 어미는 신경 쓰지 않겠다. 네가 소란만 피우지 않으면 돼. 그런 곳의 여인은 아주 더러우니, 병을 옮아오지만 말거라!”
“어머니―”
화량이 반쯤 무릎을 꿇고 부인의 무릎에 기대었다.
“어머니, 아들은 그녀를 처로 맞고 싶습니다.”
부인은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량아, 어미와 농담을 하는 거니?”
“어머니, 농담이 아닙니다. 정말로 그녀와 혼인하고 싶습니다. 아니, 그녀가 아니면 장가가지 않겠어요!”
‘방금은 그저 마음에 들었다고 했으면서, 갑자기 그녀가 아니면 장가들지 않겠다고!? 어느 집안의 여우 같은 계집인 게지, 내 아들을 이렇게 홀리다니?’
“량아, 그럼 어미에게 말해보렴. 어느 집 아가씨니?”
“회……, 회인백부의 셋째 아가씨입니다.”
“회인백부?”
부인이 눈살을 찌푸렸고 재빠르게 어느 집인지 떠올렸다.
그녀의 시누이가 지금의 귀비였고, 귀비의 며느리가 회인백부의 큰아가씨였다.
집안만 보면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다.
‘그저…….’
부인은 수도에 도는 그 셋째 아가씨의 소문을 떠올렸고,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량아, 네가 평소에 어떤 소란을 피우든 어미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혼인은 사소한 일이 아니다. 너는 적장손이니, 앞으로 두 집안을 책임져야 해. 처를 구하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란다.”
화 귀비는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고, 권력이 후궁들을 압도했다. 창경제는 전례를 깨뜨리고 화 귀비의 부친을 목은백(沐恩伯)의 작위에 봉했고, 그것은 저 멀리 연주(燕州)에 있는 진짜 황후의 처가, 승은백(承恩伯) 풍가(馮家)보다 더욱 영광스러운 처사였다.
하지만 옥에도 티가 있듯이, 화씨 집안에서 화량의 세대에 이르러서는 직계에 속하는 두 집안에 아들은 오직 화량뿐이었고, 나머지는 다 딸이었다.
부인은 둘째 항렬의 며느리였고, 위에는 화 귀비와 친분이 두터운 형수가 있었다. 귀비마마는 나중에 량이가 두 집안을 책임지고 종가를 대신해 향을 피워야 한다고 일찍이 말해왔던 바였다.
“량아, 너의 혼사는 아비와 어미 모두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걸 알 거다. 나중에 너의 백부님네 집안과도 잘 상의해야 해.”
“네, 알겠습니다.”
화량은 어머니와 더 말을 나누기 싫었고, 그저 귀찮다는 듯 얘기했다.
부인은 아들이 그저 잠시 여인에 빠져있는 것이라 생각했고, 식사를 잘 챙겨 먹으라는 말을 남기고는 방을 나갔다.
어머니가 나가자, 화량은 곧바로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백부님네와 상의한다고? 하하, 백부님네는 무슨 일이든 고모님의 말씀만 듣는데!’
* * *
다음 날, 화량은 아침 일찍 사람들을 데리고 화 귀비에게 부탁하기 위해 궁에 들어갔다.
“량아, 회인백부의 셋째 아가씨를 처로 들이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고모님. 조카의 소원을 들어주세요. 조카는 그녀를 본 뒤로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고모님, 저희 화가의 대가 끊기는 건 원치 않으시지요?”
“그게 무슨 소리냐!”
화 귀비가 조카를 훑어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 내 기억 속 그 아가씨는 그렇게 훌륭하지 않았던 것 같지?”
“고모님, 고모님께선 구중천의 봉황과도 다름없으시니, 고모님 앞에선 누구든 빛을 잃을 겁니다. 하지만 조카는 그저 그녀가 좋습니다.”
“이렇게 하자꾸나. 너는 우선 돌아가고, 일단 내가 그 계집을 알아본 뒤에 다시 말하자.”
그렇게 회인백부는 아침부터 동궁으로부터 태자비가 어머니와 여동생을 보고 싶어 하니 바로 궁으로 들라는 전갈을 받게 되었다.
* * *
정미는 거울 앞에 앉아있었고, 환안이 그녀의 머리를 빗어주고 있었다.
오늘 정미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눈 아래가 시퍼런 것이 어제 또 악몽을 꾼 것이 분명했다.
어젯밤, 정미는 평소보다 늦게 잠들어 계속 정신이 몽롱했고, 또 오라버니가 그녀를 데리고 도주하는 꿈을 꾸게 되었다.
예전과 달리 이번에 두 남매가 탄 말은 그 흑마였고, 그래서 조금 더 빨리 달릴 수 있었다. 나중엔 가까스로 위험에서 벗어나 멈춰 섰는데, 갑자기 누군가 나타나 습격했고, 정미는 반사적으로 비수를 꺼내 그 사람의 코를 찔렀다.
그리고 그 사람의 얼굴이 갑자기 곰의 얼굴로 변하더니, 곰의 코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고 정미를 흠뻑 적셨다.
정미는 놀라 깨어난 이후, 역겹고 두려워서 다시 잠에 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