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110화 (110/375)

110화. 한 무리의 소년

정미는 온몸의 피가 다 마르는 느낌이 들어 주위를 살폈다.

눈앞에 화살비가 쏟아져, 마치 그 악몽에 또 빠져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정미는 재빠르게 행동했다.

손을 뻗어 공주를 뒤로 잡아당긴 것이다.

뒤는 두껍고 부드러운 풀밭이었고, 두 사람은 풀밭에 쓰러졌다. 화살비는 두 사람이 있었던 방향으로 날아왔고, 풀숲으로 비스듬히 떨어졌다. 거기 있던 흰 토끼는 깜짝 놀라 정미와 공주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왔고, 바닥에 누워있는 사람을 보고는 또 깜짝 놀라, 정미의 얼굴을 밟고 지나가 사라졌다.

정미는 그 토끼에게 밟혀 정신을 차렸다.

‘토끼가 내 얼굴을 밟다니!’

정미는 어두운 표정으로 일어나 앉았고, 땅에 꽂힌 채로도 살짝 흔들리고 있는 화살을 보며 가슴이 철렁했다.

공주도 따라 앉아서 가만히 정미를 바라봤다.

“공주, 왜 그러세요?”

정미는 손을 들어 토끼가 밟고 지나간 얼굴을 만지며 물었다.

“방금 너, 반응이 아주 빨랐어.”

공주가 정미를 칭찬했다.

정미는 멈칫하더니, 조금 이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저 무의식적인 반응이었어요.”

당연히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

‘한밤중에 놀라 깨어날 때마다 무수한 화살이 하늘에서 날아오는 소리와 함께, 내 뒤에서 오라버니의 힘겨운 숨소리가 들렸으니까. 그런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오라버니는 아픈 소리를 한 번도 내지 않았어.’

정미는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혹시 내게 힘이 생긴다면, 꿈의 결과가 달라지지 않을까?’

그래서 덕소 장공주가 자신에게 승마와 활을 가르쳐준다고 했을 때, 정미는 부적 공부를 하는 시간을 깊은 밤까지 미뤄야 한다고 할지언정,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네가, 할 수 있을지 몰랐어.”

공주의 말을 정미는 이해하지 못했다.

“넌 힘이 약하니까.”

그리고 정미의 마른 팔뚝을 가리켰다.

“약하잖아.”

정미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공주 전하, 제가 정상인 거예요.”

공주는 대답하지 않았고,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었다.

이때, 정미는 멀리서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와 사내의 이야기 소리를 들었다.

“화량(華良), 네 화살이 명중한 게 맞아?”

이 목소리에 정미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익숙한 목소리였고, 이미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뒤이은 목소리는 낯선 것이었다.

“당연히 명중했지. 사슴 한 마리가 이쪽으로 달리는 걸 직접 보고 쐈는걸. 기다려봐, 내가 가서 볼게.”

그러고는 말발굽 소리가 다시 들렸고, 화량이라 불린 소년이 말을 타고 풀숲을 지나치다가, 앞의 두 소녀를 보고는 급히 말을 멈춰 세웠다.

그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정미를 쳐다보고는 멍해졌다.

그리고 고함이 들려왔다.

“화량, 왜 아무 말이 없어?”

화량은 넋을 놓고 정미를 쳐다보느라 대답하는 것을 잊고 말았다.

이때 뒤의 몇몇 소년이 쫓아 들어왔고, 이 광경을 보고는 모두들 덩달아 멍해졌다.

정미는 이들 중 일부를 알고 있었다.

작은 패왕 용흔, 그리고 한지, 한평이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자세히 볼 겨를이 없었다.

왜냐하면 작은 패왕 용흔이 말에서 뛰어내려 다가와서는 바닥에 앉아있는 정미를 보고 다급하게 화를 냈기 때문이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다섯째 공주와 경마를 하러 왔습니다.”

작은 패왕은 그제야 정미 옆의 소녀를 쳐다봤고, 조금 난처한 듯 불렀다.

“면면.”

다섯째 공주는 말하기를 싫어했고, 때문에 황궁에서 극도로 조용했기에 세가의 자제들마저 그녀를 잘 알지 못했다.

공주라고 하더라도 황상의 총애는 용흔만큼 받지 못해, 용흔은 ‘면면’이라 부르는 게 입에 붙은 바였다.

정미가 ‘다섯째 공주’를 언급하자, 소년들은 줄줄이 말에서 내려 공주에게 인사를 올렸다.

오직 화량만이 여전히 말 위에 앉아 넋을 놓고 있었다.

이를 본 용흔은 화가 나 다가가서, 화량이 타고 있던 말을 걷어찼다.

말은 깜짝 놀라 앞발을 치켜들고 울부짖었고, 화량은 그제야 정신이 들어 말에서 뛰어내렸다.

“용흔, 왜 내 말을 걷어찬 거야?”

용흔은 아주 화가 났다.

“네 말을 걷어찼다고? 난 널 걷어차고 싶었는데!”

작은 패왕은 행동파였기에, 걷어차고 싶었다고 말한 뒤 정말로 발을 들어 그를 걷어차버렸다.

화량은 무방비하게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용흔!”

화량은 손해 보는 것을 싫어하는 성정이었기에, 벌떡 일어나 용흔과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어릴 때부터 횡포했던 용흔의 적수가 될 수는 없었다.

작은 패왕은 다른 건 몰라도 싸움은 가장 잘했다. 특히 어디를 때리면 가장 아픈지 잘 알고 있었고, 교묘한 수법으로 세차게 때리는 법도 알고 있었다.

글로 표현하니 길었지만, 사실은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소년들이 공주와 정미를 몰래 살펴보던 와중에 두 사람이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작은 패왕이 일방적으로 화량을 구타하고 있었다.

한지가 다가가 말렸다.

“용흔, 화량, 그만해.”

몇몇 소년들은 그 모습을 보고 모두 다가가서 말렸다.

오직 한평만이 조용히 정미의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정미, 일어날 수 있겠어?”

정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평이 손을 뻗어 정미를 일으켜 세웠고, 정미가 다친 곳이 없어 보이자 웃으며 반쯤 쭈그려 앉아 공주에게 물었다.

“공주 전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평이 당겨주지 않아도 스스로 일어났다.

한편, 소년들 쪽은 더욱 시끄러워졌고, 화량의 고함이 들려왔다.

“용흔, 남을 너무 업신여기지 마라. 네가 미친개야? 이유 없이 사람을 물다니!”

용흔이 하늘을 찌르는 목소리로 맞받아쳤다.

“퉤, 오늘 내가 물어버릴 사람이 바로 너다! 이 개자식, 사슴을 쐈다고 했으면서, 자칫하면 사람을 맞힐 뻔했잖아! 알아!?”

화량은 조금 뜨끔했다.

“사슴이 여인 둘이 될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게다가, 이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사과한다고 해도 당사자에게 사과해야지!”

화량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섰고, 소년들은 드디어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 있었다.

용흔이 씩씩댔다.

“놔, 저 개자식을 혼내줘야겠어!”

화량은 입가를 닦고 용흔을 흘끗 노려보고는, 고개를 돌려 정미의 방향으로 걸어갔다. 반쯤 걸어갔을 때 걸음을 멈추고 머리와 옷매무새를 정리하고서야 다시 다가갔다.

화량은 화 귀비의 친정 조카였으며, 태자와는 고종사촌 형제로 아주 친했다. 자주 궁에 드나들었기에, 그는 당연히 다섯째 공주를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이 존재감이 없는 다섯째 공주를 그다지 경외하지 않았기에, 대충 사과하고는 정미의 얼굴에 시선이 꽂혔다.

정미는 아주 불쾌했다.

십 년 넘게 못난 계집으로 살았던 정미는 누군가 첫눈에 자신에게 빠질 거라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토끼가 자신의 얼굴을 밟아서, 낯선 사람조차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고 생각했다.

‘토끼의 발자국이 아직도 남아있는 건가?’

예의 없는 사람은 쳐다보지도 말라 했다.

‘이 사람은 정말 조금의 예의도 없구나!’

“낭자께서 어느 집안이신진 모르겠지만, 방금 제가 놀라게 해드렸습니다. 소생이 사죄드립니다.”

화량은 진지하게 읍을 했다.

읍을 한 소년은 검은 신발에 흰 덧신을 신고 있었고, 상아색의 승마복은 따뜻한 봄볕 아래서 은은한 분홍색을 띠고 있었다.

정미가 고개를 돌려, 조용히 한평에게 물었다.

“연극쟁이예요?” (*戏子: 광대, 연극쟁이란 뜻으로 멸시의 어감이 있음)

한평은 깜짝 놀라, 급히 사촌 여동생의 손을 잡아당기며 눈치를 줬다.

하지만 ‘연극쟁이’라는 놀라운 단어는 이미 화량의 귀에 번개처럼 꽂혔다.

그는 갑자기 몸을 곧게 펴고 정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소녀의 희로(喜怒)를 가릴 수 없는 맑은 눈동자에 갑자기 또 화가 풀어졌다.

‘이 낭자는 지나치게 예쁘게 생겼어! 내가 함께 밤을 보냈던 벽춘루(碧春樓)의 명기(名妓)보다 아름답군!’

정미는 이런 그의 눈빛을 아주 싫어했다.

이 눈빛에는 왠지 갈고리가 달려있어 자신의 옷섶을 벗기는 듯했고, 이유 없이 화가 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때 한지가 다가왔다.

한지는 화량의 성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들과 화량 일행은 평소 잘 어울리지 않았는데, 오늘은 우연히 마주쳐 여기 와서 같이 사냥을 하며 우열을 겨루고자 했던 것이다.

한지는 정미의 앞을 가로막으며 화량을 쳐다봤다.

“화 공자, 이쪽은 제 사촌 여동생입니다. 여동생이 놀란 것 같으니, 오늘 겨루기는 여기까지 하지요. 동생을 보내줘야겠습니다.”

화량은 이렇게 아름다운 낭자를 그냥 보낼 수 없었기에 급히 말했다.

“내기까지 했는데, 어찌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설마 우리가 두려운 건지요?”

한지가 담담하게 말했다.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다른 날을 잡아 다시 만나도록 하지요. 지금은 여인이 둘이나 있으니 편치 않을 테니까요.”

“뭐가 편치 않다는 거지요?”

화량은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다섯째 공주를 한 번 보고는 미소 지었다.

“설마 한 세자께서는 덕소 장공주께서 가르치신 다섯째 공주 전하가 저희와 겨룰 수 없다는 겁니까?”

공주는 단순한 성정이었고,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바로 덕소 장공주였기에, 누군가 스승을 경시하는 것을 참지 못해 결국 사람들 앞에서 입을 열었다.

“겨뤄.”

화량은 곧바로 득의양양해졌다.

“한 세자, 어떻습니까? 공주께서도 이리 말씀하시는데, 아직도 우리와 겨룰 용기가 나지 않는 겁니까?”

한지는 벌써 열일곱 살이 되어 키가 훌쩍 컸고, 목소리도 굵어져 청년의 느낌이 났다.

한지는 늘 정요 앞에서 추태를 부렸지만, 그건 좋아하는 사람 앞이어서 그랬고, 평소에는 아주 침착했다. 그는 화량의 도발에 맞서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그럼 화 공자께선 공주 전하와 겨루십시오. 우리는 다음에 다시 날을 잡지요. 저는 먼저 사촌 여동생을 보내주러 가겠습니다.”

“잠깐―”

한지와 한평이 정미를 데리고 가려고 하자, 화량은 조급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앞을 막아섰다.

이때, 늘 화량을 따르던 한 소년이 입을 열었다.

“아, 이제 생각났다. 한 세자의 사촌 여동생이 설마 작년의 그 사촌 여동생은 아니지요?”

이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바로 어떤 일을 떠올렸고, 화량 쪽의 소년들은 눈치를 채고 웃기 시작했다.

방금까진 다섯째 공주가 있어 감히 자세히 살펴보진 못하고 그저 공주 옆의 낭자가 아주 아름답다는 것만 알 수 있었건만, 이제는 호기심이 일어 모두 목을 길게 빼고 정미를 바라봤다.

어떤 소년이 웃으며 말했다.

“한 세자께서 눈이 아주 높으신가 봅니다. 이렇게 아리따운 사촌 여동생도 마음에 들지 않아 한다니―”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소년은 작은 패왕에게 한 방 맞고 바닥에 굴렀다. 용흔은 성에 차지 않아, 발을 들어 발끝으로 그 소년의 턱을 세웠다.

“더 말해봐, 더 말해보라고! 한 번만 더 허튼소리를 하면 네 여동생들과 사촌 여동생들이 외출한 사이 데려다가 옷을 벗겨 거리의 사람들에게 어떤 배두렁이(*옛 중국에서 여성이 위에 입던 붉은색 속옷)를 입었는지 다 내보이게 할 것이다!”

그러고는 사람들을 훑어보며 포악하게 말했다.

“내가 못할 거라 생각 마라. 설마 너희 누이들이 외출하지 않는 건 아니겠지?”

소년들의 가슴이 철렁했다.

대량은 민풍이 개방적이었기에, 보통 백성은 물론이고 규수들조차 하인을 데리고 가기만 하면 외출해서 연지나 수분을 사는 일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소년들의 누이들이 외출하지 않을 거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 작은 패왕은 옷을 벗기니 뭐니 하는 짓을 분명 해낼 터였다!

그러고는 황가에서 ‘어린아이가 철이 없었다.’고 하며 기껏해야 이 개자식을 조금 때려주고 끝낼 일이겠으나, 소년들의 누이들은 살길이 없었다.

용흔의 파렴치한 말에 떠벌리길 좋아하던 소년들은 하나같이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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