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109화 (109/375)

109화. 갑자기 닥친 위험

정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붉었던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린 채로 신제의 팔을 덥석 잡았다.

“신제, 저, 정말로 네 조모가 그리 말했어?”

“네, 정확히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미 말을 꺼낸 이상 신제는 그 이후의 일들까지도 뱉어내야 했다.

“할아버지께선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기분이 좋지 않은 듯 말씀하셨어요. 열셋째 숙부가 친자식은 아니지만, 우리 집에 왔으니 친자식과 다를 게 없다고 하시며 할머니께 그런 서운한 말을 하지 말라고 하셨죠.

할머니는 바로 할아버지에게 욕하셨어요. 그때 만약 증조할머니께서 할머니에게 그리 각박하게 대하지 않으셨다면, 회임 8개월 차인 할머니를 밭으로 보내지 않으셨다면, 조산해서 사생아를 낳지 않으셨을 거라고. 다행히 강을 따라 내려오던 나무판 위의 열셋째 숙부를 주워갔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증조할머니께서 아주 괴롭히셨을 거라고…….”

정미는 찻잔을 들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미 고모?”

정미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본 신제는 걱정이 되었다.

정미가 미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괜찮아, 신제. 무서워하지 마.”

정미는 목소리를 높여 환안을 불렀다.

“환안, 신제를 데리고 응접실로 가서 간식을 좀 내줘.”

“미 고모―”

신제가 정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신제, 고모는 잠시 조용히 있고 싶으니, 이따 환안을 따라 나가줘.”

정미는 말을 마치고, 염낭에서 은으로 만든 작은 물고기를 몇 개 꺼내 신제에게 쥐여주었다.

신제가 급히 사양했다.

“고모, 필요 없어요. 고모께서 저희 어머니 배 속의 동생을 구해주셨으니, 신제가 고모께 도움을 드리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정미는 마음이 혼란스러웠으나 억지로 웃음을 지어냈다.

“신제, 네 마음은 잘 알겠어. 하지만 여기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면 혼날 테니, 가지고 가. 네가 고모를 위해 이렇게 중요한 일을 들어줬는데, 고모가 네게 어찌 고마워하지 않을 수 있겠어. 대신 기억해. 이 일은 앞으로 마음속에 묻고 절대 남에게 말해선 안 돼.”

“네.”

신제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환안이 걸어들어왔다.

“신제 아가씨, 소인이 모시고 가서 간식을 내어드릴게요. 화미가 오늘 아침 매실병을 만들었는데, 아주 맛있답니다.”

신제가 나간 뒤, 정미는 눈을 감은 채 병풍에 기대었다. 마음속에선 폭풍이 몰아치는 듯했다.

‘오라버니, 둘째 오라버니가 아홉째 당숙부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어찌 이럴 수 있어!’

정미는 생각할수록 아연했다.

악몽 속에서 본, 관복을 입은 아홉째 당숙부의 모습과 오라버니의 잔혹한 죽음을 비교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일이 이렇게 예사롭지 않을 줄은 몰랐다.

‘오라버니의 신세가 알려지면 정말 큰일이야!’

정미는 찻잔을 든 채 서성거렸다.

철이 없는 정미에게도 상식은 있었다.

어떤 집안이든 양자를 들일 땐 가족 중에서 골랐다. 가까운 친척이 먼저고, 그 다음이 방계혈족이며, 혈연이 가까울수록 좋았다.

‘당시에는 아버지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어. 백부(伯父)에게는 아들이 하나밖에 없었고, 셋째 숙부는 아직 혼인하기 전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방계에서 양자를 들인 거라고.’

때문에 이 양자도 반드시 정가의 혈통이어야 했다.

‘그, 그럼 만약 오라버니가 정가의 사람이 아니라는 게 알려지면, 오라버니를 집에서 쫓아내야 하는 거야?’

정미는 저도 모르게 찻잔을 꽉 쥐었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안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가, 입을 데이는 바람에 곧바로 찻물을 뿜고 말았다. 짜증이 나 그 찻물을 바로 창문 밖으로 뿌려버렸다.

창밖에 숨어 듣던 정요가 충분히 들었다고 생각해 몸을 움직여 몰래 떠나려던 찰나, 갑자기 뜨거운 찻물이 목에 쏟아졌고 그대로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다행히 계속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기에 비명을 지르지 않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고, 정요는 급히 나무 뒤로 숨었다.

정미는 소리를 듣고 창가로 와 고개를 내밀어 살펴봤고, 마침 어떤 고양이가 나무를 오르는 것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고양이가 왜 개소리를 내는 거야. 정말 재수 없게!”

정미는 창문을 쾅 닫아버렸다.

이미 시간은 정오였다. 창틈으로는 햇살이 들어와 실내에는 먼지가 떠다니며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정미는 한참 동안 병풍에 기대 꼼짝도 않고 있었다.

‘오라버니가 정가의 사람이 아닐 거라곤 한 번도 생각지 못했어.’

예전의 정미는, 조모의 외면과 아버지의 뻔뻔함으로 둘째 오라버니의 양자 신분을 강제로 빼앗고 정희와 다른 아이들에게 자리를 내어줄까 봐 늘 걱정했다. 하지만 이런 걱정은 진심으로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정미에게 너무 잘해준 나머지 오라버니를 잃을 모든 가능성을 두려워한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 그 걱정은 현실이 되었고, 조모님과 아버지가 어떻게 보든 간에 이 비밀이 드러나면, 오라버니는 정가의 사람으로 남기조차 못할지도 몰라.’

정미는 오라버니의 얼굴을 다신 못 볼지도 모른다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정미의 삶에서 결코 버릴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건 분명 둘째 오라버니였다.

정미는 이 비밀을 영원히 마음속에 묻어두기로 결정했다.

“아가씨, 식사 시간입니다.”

환안이 문 입구에서 외쳤다.

“들어와.”

환안과 화미가 들어와 상을 차렸다.

고기를 올린 계란찜과, 조향메추리, 매운 고사리와 돼지고기를 넣은 죽순탕이었다. 그리고 밥 대신 화려한 색깔의 장미 찐빵이 놓였다.

장미 찐빵은 두 가지 색으로 나뉘어 있었고, 노란색에는 호박 앙금을, 자색에는 자색고구마 앙금을 넣어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 모양과 꽃이 활짝 피어있는 모양이 섞여 있어 아주 보기 좋았다.

정미가 화미를 한 번 쳐다봤다.

그러자 화미가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소인의 생각에 이 장미 찐빵이 맛만 좋은 게 아니라 보기에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아서요. 드셔보세요. 이번은 소인이 처음 만들었을 때보다 더 맛있어요.”

정미는 잠시 넋을 놓고 아름다운 장미 찐빵을 보다가 명령했다.

“이것들을 잘 포장해서 장청원에 가지고 가자.”

* * *

정철은 최근 외출이 뜸했다. 그가 주인으로 있는 육출화재가 몇 군데 분점을 내고 점점 수도 밖까지 확장되어가고 있었기에, 그 서재들이 두각을 나타내려면 책을 부지런히 써야만 했다.

경사자집(*經史子集: 경서, 사서, 제자(諸子), 시문집을 말함)들은 대부분의 서재가 다 비슷했기에, 가장 경쟁력 있는 것은 소설책이었다. 물론, 당연히 소설책보다 그림책이 조금 더 인기가 많긴 했다.

개장한 지 수년이 지난 육출화재가 경성의 서재 중 점점 유명해져 경성 제일의 서재 기세를 얻게 된 것은, 사람들을 애타게 하는 소설 덕분이었다.

그래서 정철은 더욱 분발해야 했다.

한창 열심히 글을 써 내려가던 정철은 문 입구에서 기척을 느끼고 붓을 멈췄다.

“미미?”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버니, 나야. 같이 밥 먹으러 왔어.”

“아, 잠깐만―”

정철은 반쯤 썼던 소설책을 급히 모전(*毛氈: 카펫) 밑으로 넣었다. 이번 소설 속 삽화는 절대 아가씨들이 보면 안 되는 것이었기에, 잽싸게 행동했다.

그래서 정미가 들어왔을 때,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다.

“오라버니, 뭐 하고 있는 거야?”

“아, 방금 글자를 몇 개 연습했거든.”

정철은 일부러 차분하게 기침한 뒤, 책상에서 일어나 정미의 시선을 가렸다.

“미미가 오늘은 어찌 집에서 밥을 먹을까?”

평소 정미가 제생당에 갈 때는, 오후엔 장공주부에 가야 했기에 점심은 제생당에 남아 셋째 숙부와 먹곤 했다.

“오후에 다섯째 공주와 경마를 하기로 해서 미리 돌아왔어. 마침 화미가 장미 찐빵을 만들었는데 점심이 꽤 푸짐해서 오라버니랑 같이 먹으려고 가져왔지. 아직 점심 안 먹었지?”

정미가 알기로는, 아직은 정철은 식사를 할 시간이 아니었다.

정철이 대답했다.

“아직, 마침 배고프던 참이야.”

배고프지 않을 리 없었다.

‘오전 내내 붓을 들고 머리를 얼마나 많이 썼는지.’

정미는 손을 뻗어 환안이 들고 있는 찬합을 건네받았고, 직접 음식들을 차렸다. 그녀는 곧 젓가락을 정철에게 건네고 마주 앉아 조용히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식사를 할 때 말을 하지 않는 것이 규율이긴 하지만, 두 남매가 만날 때는 그리 엄격히 지키지 않곤 했다. 늘 정미는 맛있게 식사를 하며 즐겁게 떠들곤 했다.

그러나 오늘 정미는 유난히 조용했고, 눈앞에 맛있는 음식이 있는데도 젓가락질을 몇 번 하지 않았다. 손에는 자색의 장미 찐빵을 들고 조금씩 주물럭거리며, 다른 손으론 턱을 괴고 정철을 바라봤다.

정철은 처음엔 눈치채지 못하다가 점점 불편한 느낌이 들어 정미를 한 번 흘겨봤다. 그러곤 젓가락을 놓고 손수건으로 입을 닦았다.

“미미, 걱정거리가 있는 거야?”

“어, 없어.”

정미가 흠칫하더니 급히 대답했다.

“있나 보구나?”

정철은 노란 장미 찐빵을 들고, 조금 떼어내서 정미의 입에 넣어주었다.

“달지?”

“달아.”

정철이 가볍게 웃었다.

“그럼 많이 먹어.”

‘소녀들의 걱정거리는 어쨌든 비슷한 것들뿐이겠지. 그때 한지가 미미를 거절했을 때도 종종 이렇게 넋을 놓고 있었으니까.’

이 생각이 들자, 정철은 웃음으로 쓸쓸함을 가렸다.

‘미미가 나중에 시집가는 사람은 미미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

“오라버니―”

정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턱을 괸 채 조금 불안한 표정이었다.

“오라버니, 우리가 계속 함께 할 수 있을까?”

정철은 하마터면 손 옆의 국그릇을 엎을 뻔할 정도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미미?”

정미는 하도 주물럭거려서 형체를 잃은 장미 찐빵을 상 위에 놓고 한숨 쉬었다.

“언젠간 지금처럼 오라버니를 찾아오고 싶을 때 찾아오지 못할까 봐 무서워. 그럼 어떡하지?”

정철이 실소했다.

“미미, 어린아이 같은 말 하지 마. 나중에 네가 출가하면 확실히 지금처럼은 할 수 없을 거야. 어느 집이든, 어느 집 남매든 다 그런 거야…….”

“오라버니!”

정미가 화를 내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예전에 말했잖아. 나는 시집가고 싶지 않다고!”

정철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정미는 손을 뻗어 정철의 손을 잡아당기고 애원했다.

“오라버니, 아이 같은 말을 하는 거 아니야. 나는 진심이라고. 나 좀 도와주면 안 돼?”

정철은 여동생의 맑은 눈동자를 보며 생각했다.

‘이 세상에 어떤 일들은, 내가 원한다고 하더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구나.’

정철이 침묵하자 정미는 조금 실망했다. 하지만 오라버니에게 이런 식으로 요구하는 것은 조금 고집스러운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럼 됐어. 단지 앞으로 오라버니가 올케언니를 들이고 나서도, 미미를 멀리하지만 않으면 돼.”

정철은 정미를 보며 아주 옅은 웃음을 지었다.

“당연하지.”

정미는 장미 찐빵을 모두 오라버니에게 남겨주고는 빈 찬합을 가지고 비서거로 돌아갔다.

* * *

정미는 새로 알게 된 비밀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아, 오후에 다섯째 공주와 말을 타고 산에 들어갈 때도 몸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너, 왜 그래?”

공주는 계속 정미를 살펴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제 너무 늦게 자서 조금 정신이 없네요.”

공주가 말에서 내렸다.

“내려서 걷자.”

정미도 경마할 기분이 아니었기에, 말에서 내렸다.

공주의 결따마(*말과의 하나로, 몸이 붉은색에 가까운 누런색임)는 잘 길들여진 말이었고, 정미의 흑마도 엉덩이를 맞았던 그 기억 때문에, 고삐를 놓아도 알아서 두 사람의 곁에서 천천히 걸었다.

이 산은 위병과 수위들이 지키고 있어, 왕손과 귀족의 자제들만이 들어와서 경마와 사냥을 할 수 있었다. 때문에 두 아가씨들에겐 아주 안전한 곳이었고, 정미와 공주도 그렇게 생각했다.

두 사람이 점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을 때,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었다.

두 사람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예리한 화살 하나가 곧장 날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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