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담 모퉁이에서 엿듣다
“어찌 이 시간에 왔느냐?”
맹 노부인은 최근 정미를 대하는 태도가 꽤 미묘해졌다.
한편으론 정미가 자주 덕소 장공주부에 드나드는 것을 높이 사고 싶으면서도, 정미가 저지른 사고들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올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뒤엉킨 마음 때문에, 맹 노부인은 정미가 자신 앞에서 할 일 없이 싸다니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성가시지 않다는 뜻이었다.
“조모님, 다섯째 공주께서 오후에 같이 경마를 하자고 초대하셔서 준비를 하려고 백부로 돌아왔는데, 아홉째 당숙모님께서 오셨다고 하셔서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아이고, 우리 정미가 정말 철이 들었군요. 노부인, 역시 노부인께서 잘 키우셨습니다.”
곽 씨는 기뻐하며 자연스럽게 맹 노부인에게 아첨했다.
“공주와도 함께 어울릴 수 있다니, 다른 집이었다면 생각도 못했을 일이지 않습니까. 역시 노부인의 손녀들은 모두 복덩이들입니다.”
맹 노부인은 이 말에 기분이 꽤 괜찮아져 정미가 조금 마음에 들었고, 정미에게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했다.”
정미는 눈을 돌려 신제를 한 번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아홉째 당숙모님, 그날 마을에서 신제가 아주 마음에 들었는데, 이번에 정말 데리고 오실 줄은 몰랐네요.”
“그래, 이 녀석이 모처럼 정미의 눈에 들었고, 영이는 요즘 몸이 좋지 않아서 외출을 하지 못하게 한지라, 이 녀석을 데리고 왔단다.”
정미가 신제에게 온화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손을 뻗으며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신제, 자, 고모랑 저기 가서 놀자.”
신제가 곽 씨를 한 번 쳐다보자, 곽 씨는 답답한 듯 신제를 노려봤다.
“쳐다보긴 뭘 쳐다보느냐, 미 고모가 부르면 가면 되지. 소란을 피우지 않게 주의하거라.”
두 사람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곽 씨가 웃었다.
영이는 늘 정미와 잘 어울리지 못하곤 했다. 올 때마다 좋아지기는커녕 투닥거려야 마음이 풀리는 아이였다.
그러나 신제는 달랐다. 신제는 정미보다 아랫사람이었고, 정미의 태도를 보아하니 신제와 친하게 지내고 싶은 듯했다.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 매일 올 때마다 빈손으로 돌아가게 되진 않을 터였다.
곽 씨는 집에 돼지우리를 하나 더 증축해야 했고, 지금 주머니 사정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기에, 저절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 * *
정미는 신제를 데리고 비서거로 향했다. 표정은 아주 침착했지만, 가슴은 두근거렸다.
‘신제는 분명 무슨 소식을 들고 왔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나를 봤을 때 무의식적으로 긴장하지 않았겠지.’
정미는 마음이 급해 얼른 거처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돌아가는 길에서 뜻밖에도 정동과 진령운을 만났다.
“누굴 데려온 거야?”
정동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신제를 아래위로 훑어봤다. 신제의 차림새가 집안의 여종만도 못한 것을 보고 몰래 얕보고는 웃었다.
“셋째 언니는 매일 다섯째 공주와 같이 있는 거 아니었어?”
신제는 어렸지만, 멍청하진 않았다. 오히려 마을의 소녀들보다 약삭빠르고 억척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신제는 정동이 자신을 비꼬는 것을 알아차렸고, 열등감에 고개를 숙였지만, 속에서 억척스러운 면모가 올라와 곧바로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정미가 위로하듯 신제의 손을 토닥이고는 정동을 흘겨봤다.
“네 말은, 내가 다섯째 공주와 함께 있으면 다른 사람과 왕래할 수 없다는 거야? 네가 그렇게 여기더라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걸. 봐, 그래서 이렇게 멈춰서서 너와 얘기하고 있잖아.”
“너―”
정동이 입술을 깨물었고, 눈가가 글썽이며 울지 말지 망설이다가 결국 참아냈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기에, 울어봤자 아무 소용도 없었으므로, 결국 조용히 눈물을 삼킨 것이다.
“신제, 가자.”
정미가 신제를 데리고 정동을 스쳐 지나갔고, 정동은 갈수록 불쾌감을 느꼈다.
근래 처음으로 정미와 마주친 것이건만, 어찌 그냥 보낼 수 있겠는가. 정동은 곧바로 손을 뻗어 가로막았다.
“잠깐, 셋째 언니. 아직 데리고 온 사람이 누군지 말하지 않았잖아. 우리가 사는 곳에 어찌 아무 어중이떠중이를 들일 수 있겠어.”
정미는 더 이상 정동에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냉담하게 말했다.
“신제는 아홉째 당숙네의 장손녀야. 너한테 동 고모라고 불러야 하는 아이인데, 절대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지. 정동, 이 말이 조모님 귀에 들어가면 좋지 않을 텐데.”
정동은 신제의 신분이 아주 의심스러워 시선을 돌려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 애가 둘째 오라버니의 조카라고? 정미는 역시 교활하구나. 왜 이렇게 신경쓰나 했더니, 오라버니에게 예쁨을 받으려고 그런 거였어. 안 돼, 절대 양보할 수 없지!’
“아홉째 당숙집에서 온 아이구나. 셋째 언니, 왜 이제 말한 거야. 모처럼 신제가 왔는데, 나도 고모로서 조카를 냉대할 순 없지.”
정미는 깜짝 놀랐다.
‘정말 웃기게도 군다. 분명 신제와 몇 살 차이나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어른스러운 척 말하다니.’
정미는 신제에게 몰래 아홉째 당숙네의 일을 알아보라 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만약 신제에게 너무 긴장한 티를 내면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도 쉬울 것이다. 그래서 그저 성질을 참고 정동이 비서거로 따라오도록 내버려두었다.
* * *
한편, 쇄옥거의 정요도 이쪽을 신경쓰고 있었다.
정동의 생각처럼, 정미가 최근 너무 오랫동안 백부에 나타나지 않았기에, 정요도 이유 없이 불안해진 바였다. 정미가 지금 백부에 돌아왔으니, 정요의 주의를 끌지 않을 리 없었다.
특히 교용이 정미가 어떤 아가씨를 데리고 왔다고 한 것을 듣자, 정요는 더욱 호기심이 일었다.
정요가 아는 정미는 자신의 사람이라 생각하는 사람만 기꺼이 거처로 들였기 때문이다.
“정말 그 아가씨가 아홉째 당숙부의 손녀라 했어?”
“예, 셋째 아가씨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소인이 꽃과 나무 뒤에 서서 셋째 아가씨와 넷째 아가씨의 대화를 들었고, 넷째 아가씨와 령운 아가씨가 함께 비서거로 가셨어요.”
정요가 손을 들고 그 말을 제지했다.
“됐다. 이제 알겠으니 물러나 봐. 오늘 일은 잘했어. 어떤 일들은 때를 가리지 않고 유념해야 해.”
칭찬을 받은 교용은 매우 기뻐하며 물러났다.
교용이 나가자 방 안에 홀로 남은 정요는 곧바로 상자를 열어 담록색 승마복을 꺼냈다.
이런 승마복은 소매와 바지의 폭이 좁아 움직이기 아주 편했다.
옷을 갈아입은 후 정요는 머리를 질끈 묶고 창밖으로 나갔다.
정요와 정미가 예전에 가장 사이가 좋았던 것엔 쇄옥거와 비서거의 거리가 가장 가깝기 때문인 이유도 있었다. 두 거처는 월동문 하나만 지나면 되었다.
정요는 그 월동문으로 가지 않고 뒤로 돌아가 웃자란 풀들을 제치고, 가려져있던 구멍으로 몸을 숙여 들어갔다.
여기서 나와 꽃과 나무 뒤로 몇 걸음 가면 비서거 동차간의 창밖에 도착했다.
회인백부는 공간은 좁고 사람은 많았기에, 아가씨들의 거처에는 모두 작은 세 칸의 정방(正房)만 있었다. 안채의 가운데 방인 응접실에서는 손님을 맞았고, 동차간은 일상생활을 하는데 쓰였으며, 서차간은 서재로 쓰였다.
정미가 만약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을 얘기한다면, 분명 여기 있을 것이다.
정요는 창밖에 숨어서 조심스럽게 자신을 가렸고, 정미는 성질을 꾹 누르며 정동과 진령운을 보낸 뒤, 마침내 신제를 데리고 동차간으로 들어왔다.
“환안, 문 앞을 지켜.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해.”
“예.”
환안이 물러나자, 정미가 신제를 바라보며 물었다.
“신제, 나한테 말해줄 소식이 있는 거지?”
“미 고모, 저, 저는…….”
신제가 창백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정미는 신제가 그렇게 소심하고 겁이 많은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신제는 그 강한 제 조모를 상대로, 회임한 어머니에게 몰래 고기를 갖다 줄 정도로 용감한 아이였다.
그렇게 용감하던 소녀가 사람들을 물러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입을 열지 못하다니, 보통 일이 아님은 분명했다.
정미는 신제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몸을 일으켜 차탁 옆으로 걸어가, 신제에게 차 한잔을 따라 건넸고, 자신에게도 한잔 따랐다.
“신제, 겁내지 마. 뭔가 들은 게 있으면 고모에게 말하면 돼.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 거야.”
두꺼운 청자 찻잔에서 찻물의 열기가 전해져왔고, 신제는 그 온기에 마음이 조금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신제는 고개를 들어 정미를 바라봤다.
자신과 몇 살 차이나지 않는 소녀가 우아하고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신제의 마음속엔 하늘도 놀랄만한 비밀이 들어있었고, 이 순간이 되자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미 고모, 제가 들은 게 하나 있어요. 하지만 그 일은 너무 놀랍고 무서워서, 마, 말할 용기가 안 나요…….”
정미가 신제의 손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천천히 말해. 고모가 네게 들려 달라 한 거잖아. 아무리 놀라운 일이라도 너 같은 어린 소녀와는 아무 상관없을 거야.”
“네…….”
신제는 고개를 끄덕인 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나서야 말하기 시작했다.
“그날 둘째 숙부네가 돌아오시고는 고모와 열셋째 숙부님이 다녀가신 것과, 우리에게 선물을 주고 가신 것을 알아채셨거든요. 그러곤 바로 할머니와 싸우셨어요.”
여기까지 말했을 때, 신제는 꽤 난처해졌지만 평온한 정미의 표정을 보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열셋째 숙부까지 끌어들이게 되었고, 저는 장롱에 숨어서 듣고 있었어요. 둘째 숙부는 계속 할머니를 질책했어요. 그때 왜 자신이 아니라 열셋째 숙부님을 양자로 보냈냐고요. 만약 그때 자신이 양자로 갔다면 지금 품위 있고 멋진 귀공자가 된 것은 열셋째 숙부님이 아닌 자신이었을 거라고 하셨어요.
둘째 숙부가 싸움을 마치고 나가신 뒤, 할아버지가 속상해하시며 할머니에게 말씀하는 것을 들었어요. 만약 그때 누구도 보내지 않았다면 온 가족이 평온하게 잘 지낼 수 있었을 거라고요. 그럼 큰숙부와 둘째 숙부도 이 일을 늘 마음속에 두지 않았을 거고, 이 일 때문에 수시로 싸우지도 않았을 거라고요. 그러니까 할머니께서―”
잇따를 말은 아주 중대한 것인지, 신제는 잠시 말을 멈췄다. 용기가 필요한 듯 고개를 숙여 차를 한 모금 마셨고, 찻물이 아직 뜨거운 탓에 소녀는 혀를 내밀다가 이어서 말했다.
“할머니께서 말씀하시기를, 저희 아버지와 둘째 숙부 같은 사람을 백부에 양자로 보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하셨어요. 위에는 세자가 있고 아래로는 친자가 있는데, 양자가 중간에 끼어서 어떻게 살 수 있겠느냐고요.
당시 할머니께선 열셋째 숙부님이 계신 둘째 항렬이 분가를 한 뒤, 양자가 가장 노릇을 하기엔 너무 고생일 테니 일부러 열셋째 숙부를 양자로 보낸 거라 하셨어요. 하지만 뜻밖에도 몇 년 뒤 열셋째 숙부의 아버지께서 돌아오셨고, 자식들까지 데리고 오셨죠. 그래서 당시의 결정이 옳다고 여기셨어요. 할머니께서는 또……”
신제는 정미를 쳐다보며 한 글자씩 똑바로 내뱉었다.
“만약 친자식이었다면 그런 처지에 어찌 잠을 잘 잘 수 있겠냐고, 역시 이렇게 아들 하나가 백부에서 부귀를 누리면서 겸사겸사 집안에 협력해주는 데다, 걱정도 할 필요 없는 게 낫다고 하셨어요!”
“뭐라고?”
정미는 창백한 얼굴을 한 채 벌떡 일어났다.
창밖의 정요는 입을 꼭 틀어막고 있어 놀라 소리 지르지 않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