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107화 (107/375)

107화. 신제의 방문

서가복의 기절로 인해 서가의 사람들은 급히 백부를 떠났다.

가는 도중에 서가복이 조용히 눈을 떴다.

“가복, 도대체 무슨 일이니? 내가 네 오라버니들에게 물으니, 절대 대답하지 않더구나!”

서가복이 눈을 깜빡이더니 이마를 짚었다.

“넘어졌더니 머리가 어지러워서 기억이 잘 안 나요. 어머니, 저 바보가 된 거 아닐까요? 시집을 못 가진 않겠죠?”

왕 씨가 매섭게 눈을 부라렸다.

“그럴 리 없다! 네가 조금이라도 덜 사고를 치고 다니면 천지신명께 감사할 텐데 말이다!”

서가복이 일어나 앉아 왕 씨의 팔짱을 끼고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어머니, 그, 그럼 오늘 일은 어떻게 됐어요? 정해졌나요?”

왕 씨가 정색했다.

“가복, 정가의 둘째 공자가 마음에 들었니?”

서가복이 모처럼 수줍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이 귀찮아지겠구나. 내 딸의 마음에 들다니!’

왕 씨에겐 이미 이런 경험이 있었다. 5년 전에도 서가복이 어떤 아주 잘생긴 가난한 놈에게 빠졌었는데, 어려서부터 모은 돈으로 그 가난한 놈과 몇 개의 큰 산을 넘었었다.

서가복을 찾았을 때, 그 사내의 몸엔 구멍이 여러 개 나 있었고,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딸의 말로는 그 사내가 딸을 나무 위로 밀고는 자신은 열몇 마리의 사나운 늑대와 맞섰다고 했다.

그때부터 딸의 성정은 엇나가기 시작했다. 심심하면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용모가 아름다운 사람을 보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희롱하곤 했다.

능남의 민풍은 개방적이어서 용감한 아가씨들이 젊은 사내들과 시시덕거리는 일은 그리 드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딸은 같은 여인들도 절대 그냥 보내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가 딸의 취향이 독특하다고 생각해 아무도 혼담을 꺼내지 않게 된 것이었다.

“가복아, 내가 보기에도 정가의 둘째 공자가 좋긴 한데, 능남에도 그 공자만큼 잘생긴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잖느냐. 왜 하필 그가 마음에 든 것이니?”

서가복은 차분한 표정이었다.

“그가 여동생에게 잘해주기 때문이에요. 처음 봤을 때 여동생을 필사적으로 지키고, 여동생을 위해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회시도 포기했다고요. 이번에도 여동생의 안전만을 생각했어요. 어머니, 이런 사람이 저를 좋아하면 제게도 똑같이 해줄 거라고 생각해요.”

왕 씨는 마음이 조금 씁쓸했다.

‘딸이 또 그 가난한 놈을 떠올린 거구나.’

맹세는 쉬웠다. 하지만 생사의 기로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가복아, 유념해야 한다. 여기는 수도야. 우리 능남보다 규율이 더 엄격하지. 계속 네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면 한 부인의 눈에 들 수 없을 거다.”

“그럼 어떡해요?”

왕 씨가 의견을 냈다.

“나와 한 부인이 담소를 나누었을 때, 그 부인의 뜻으로 봐선 자녀들의 혼사에 아주 너그러운 듯하더구나. 비슷한 집안의 혼인이라면 자녀의 의사를 더욱 중요시 여기는 것 같고.

정가의 둘째 공자가 여동생을 아주 아낀다고 했지? 그렇다면 회인백부와 왕래를 자주하여 그 미 아가씨와 좋은 친우가 되거라. 그럼 그 아가씨가 제 오라버니에게 좋은 말을 해줄 수도 있지 않겠니. 사실 이 어미는 이 혼사를 강행하고 싶지 않다. 정가의 둘째 공자가 네게 마음이 있어야 너도 앞으로 잘 지낼 수 있는 것이니.”

어머니의 말을 들은 서가복은 곧바로 웃어 보이고는 홀가분한 듯 말했다.

“어휴, 어머니. 사실 정가의 둘째 공자가 아니더라도 저는 정미와 좋은 친우가 되고 싶어요.”

왕 씨는 어이가 없었다.

‘이유를 찾을 생각이 전혀 없구나!’

* * *

회인백부, 이연원의 서재.

둘째 나리는 아주 화가 난 채로 세 딸을 불러다 물었다.

“서가의 아가씨가 어쩌다 기절한 것이냐?”

정요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동은 입술을 오므리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서가의 아가씨는 계속 셋째 언니와 함께 있었어요. 나중에 저와 둘째 언니가 화원으로 갔을 땐 둘 다 보이지 않았고요.”

둘째 나리가 정미를 바라봤다.

“그럼, 네가 서가 아가씨를 데리고 장청원에 간 것이냐?”

“아닙니다.”

정미는 둘째 나리를 빤히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아버지, 제가 왜 서가 아가씨를 데리고 장청원에 가겠습니까?”

“아니라고? 아니라면 서가 아가씨가 어찌 장청원의 죽림에서 기절한 것이냐?”

정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제가 한눈판 사이 아가씨가 그쪽으로 가버리신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아버지, 아버지 동방의 따님께선 아주 이상한 것 같습니다. 다른 집에 손님으로 와서 아무렇게나 돌아다녀도 되는 건가요?”

둘째 나리는 정미의 말에 말문이 막혔고 기른 수염마저 떨려올 지경이었다. 그는 버릇없는 셋째 딸의 모습에 화를 냈다.

“정미,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네가 접대한 사람이 장청원의 죽림에 잘못 들어갔고, 기절하여 깨어나지도 못한 채 우리 집을 떠났는데, 네게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느냐? 이러면 네 아비의 체면이 어찌 되겠느냐?”

그 동방은 오랫동안 수도에 있진 않았지만, 배후 세력이 두터워 수도에 와서도 관직이 그리 차이가 나지 않았다. 둘째 나리는 좋은 혼사가 시작되려는 찰나에 이런 일이 생겨 몹시 화가 났다. 그리고 정미가 더욱 꼴보기 싫어졌다.

‘장자(長子)가 공사를 놓친 것도 이 계집의 잘못이었지!’

정미는 둘째 나리의 이런 시선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어릴 때부터 항상 이래왔어. 예전엔 정동과 다툴 때마다 이렇게 실망하고 분노한 눈빛으로 나를 보곤 했지. 마치 모든 사람에게 내 존재가 그의 골칫거리라는 것을 알리지 못해 아쉽다는 듯이.

정말 이상해. 정실의 딸을 골칫거리이자 치욕으로 여기고, 첩의 딸을 보물처럼 여기는 사내라니.’

정미는 이런 아버지를 도저히 경외할 수 없었고 담담하게 말했다.

“아버지, 체면을 구긴 것은 서 백부님이시겠지요. 아버지께서 나중에 서 백부님을 놀리시지 않으면 됩니다.”

‘다른 집안의 딸이 우리 집에 손님으로 와서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사고가 났다면, 그건 그 집의 창피이지, 자신의 딸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사람은 본 적도 없다고!’

“방자하구나, 정미. 한 번만 더 어른들을 비방했다간 호되게 혼내줄 것이다!”

정동은 옆에서 몰래 초조해했다.

‘아버지, 얼른 혼내시라니까요. 오랫동안 정미를 혼내지 않으셨어요. 정미가 지금 얼마나 오만방자한지 보세요. 저를 상대도 하지 않은 지 꽤 되었다구요!’

요즘 정미는 아침 일찍 나가 늦게 돌아왔기에, 정동은 정미에게 시비를 걸어보려 해도 말을 붙일 기회조차 나지 않았다. 그래서 정동은 마음이 쓸쓸하여 이유 없는 허전함을 느낄 지경이었다.

“아버지께서 혼내고 싶으시면 혼내세요. 하지만 조금 빨리 해주시지요. 저는 내일 아침에도 장공주부에 가서 다섯째 공주와 경마를 하기로 해서요.”

둘째 나리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정미, 너도 올해 열네 살이 되었다. 인륜과 삼강오륜을 알 때도 되었어. 다른 사람이 어떻든 간에 집안에서 아버지가 딸을 가르치는 것을 참견할 수 없다.”

정미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당연히 압니다. 하지만 최근 공부하다 이런 문장을 읽었어요. ‘일실지불치(*一室之不治: 집안일도 관리하지 못하는데), 하이천하가국위(*何以天下家國爲: 나랏일은 어찌 잘 관리할 수 있겠는가?)’, 아버지께서 제게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정미!”

둘째 나리는 이 못된 계집이 이런 대원칙을 가지고 말대꾸를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런 말이 있었다. 말로 이기지 못하면 주먹이 나가곤 한다고.

둘째 나리도 마찬가지로 손을 높게 들어 정미의 얼굴에 내리치려고 했고, 정미는 이를 보고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며 차갑게 말했다.

“얼굴은 때리지 마세요. 다른 곳을 때리시지요. 내일 외출했을 때 남들이 보지 못하게요!”

둘째 나리의 올라간 손은 허공에서 굳었고, 입술이 파들거리더니 겨우 말을 뱉었다.

“썩 꺼지거라!”

“그럼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정미가 무릎을 내밀며 절을 한 뒤, 문 입구에 다다랐을 때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 앞으로 서가 아가씨께서 다신 저희 집에 오지 않으시겠지요?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곧바로 둘째 오라버니에게로 가다니, 혹시나 새어나가면 좋지 않을 것 같네요.”

“입 닥치거라. 서가 아가씨가 어찌 그런 경박한 여인일 수 있겠느냐. 정미, 너도 여인이 되어서 말을 그렇게 각박하게 해선 안 된다!”

둘째 나리가 눈썹을 치켜뜨며 꾸짖었다.

“아, 서가 아가씨에게 그런 마음이 없다면, 나중에 아가씨를 뵈었을 때 사과드려야겠습니다. 그 아가씨가 오라버니에게 기웃거리지만 않으면 됩니다.”

정미는 비웃음이 담긴 입꼬리를 한 채 둘째 나리를 한 번 쳐다보고는 천천히 떠났다.

둘째 나리는 어두운 표정으로 한마디도 하지 않는 정요와 정동을 한 번씩 쳐다보고는 언짢은 듯 말했다.

“너희 둘도 물러나 보거라.”

정요와 정동이 나가자, 둘째 나리는 의자에 앉아 답답한 가슴을 두들겼다.

‘요즘 아가씨들은 모두 왜 이런 걸까. 그 서가의 아가씨도 겉으로는 우아하고 얌전해 보이더니, 마음대로 돌아다녔다고? 한 씨에게 이 혼사를 입 밖으로 꺼낼 수조차 어렵게 만드는구나.’

둘째 나리는 정미의 마지막 말들을 떠올리며 얼굴을 더욱 굳혔다.

‘말해봤자 내 창피만 되겠어! 됐다, 일단 며칠 지나고 다시 생각해보자.’

* * *

다음 날, 정미는 평소와 같이 제생당으로 갔다. 그러나 오시(*오전 11~오후1시)가 되기도 전에 화미가 갑자기 찾아왔다.

“마을에서 사람이 찾아온 거야?”

화미를 보자마자 정미는 가슴이 철렁하여 바로 물었다.

정미가 정가촌에서 돌아온 이후, 매일 제생당에 오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계속 아홉째 당숙부네의 일이 마음에 걸렸던 바였다. 혹시나 그쪽에서 사람이 왔는데 정미가 밖에 있느라 놓칠까 봐, 일찍이 화미에게 제때 보고하라 분부했다.

역시, 화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온 지 조금 되었고, 소인이 외출할 기회를 찾아 나온 것입니다.”

정미는 곧바로 일어나서 셋째 숙부에게 인사를 하고는 급히 백부로 돌아갔다.

염송당에 들어오자마자 곽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부인, 안색이 갈수록 좋아지십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저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줄 알겠어요.”

“당치 않는 말을, 내게 아부를 떠는구나.”

맹 노부인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목소리에 기쁜 기색을 드러냈다.

정미는 고개를 저었다.

‘오라버니가 아홉째 당숙부네에서 양자로 왔으니, 다른 집안이었다면 당숙부네에서 백부에 오는 것을 금했을 거야. 하지만 저 부인은 이렇게 자주 드나들 수 있으니, 결국 무슨 말이든 내뱉을 수 있게 될 테지!’

백모님은 말주변이 없었고, 어머니와 조모님은 늘 사이가 좋지 않으며, 셋째 숙모님은 항상 무기력했으니, 조모님을 이렇게 띄워줄 사람이 필요했다.

“조모님, 아홉째 당숙모.”

“아이고, 정미구나. 한동안 못 봤는데, 정미는 갈수록 얼굴이 피네.”

“당숙모의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정미는 무릎을 내밀며 감사 인사를 했고, 곁눈질로 얼른 주변을 한 바퀴 훑어보았다. 곽 씨 옆에 서 있는 신제를 본 정미는 기쁘면서도 긴장하는 눈빛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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