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대담함
정미는 한 씨의 표정을 보고 일이 잘못됐음을 알아차렸다.
‘어머니의 사고방식은 평범하지 않으니, 방심해선 안 되겠구나!’
“미 동생, 그날 동생을 놀라게 했지요. 오늘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이야. 정말 귀한 인연이에요. 언니가 여기서 동생에게 사과할게요.”
정미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가복 언니는 절 놀라게 하지 않았어요. 맞다, 그날 언니를 찾던 그 오라버니도 오늘 오셨나요?”
서가복이 대답했다.
“그 사람은 제 넷째 오라버니입니다. 지금 앞뜰에 있어요.”
말을 마친 서가복의 마음이 흔들렸다.
‘세상에, 나는 분명 하늘의 딸일 거야. 이런 행운이 있다니!’
서가복은 그날 만난 두 남매를 잊을 수 없었다.
‘절세미인인 여동생 쪽이 내 시누이가 된다면, 허구한 날 얼굴을 꼬집어보고 손을 만져보고, 손을 잡고 나가 내 친우들에게 보여주며 부러움을 살 거야. 오라버니 쪽은 더욱 좋지. 만약 내 부군이 된다면, 얼굴을 꼬집고 손을 만지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을 거다. 한 침상에서 같이 자게 될 테니…….
하하, 예전에 내가 가지고 놀았던 그 미소년들은 그날의 사내와는 비교도 되지 않잖아. 그날, 청풍명월 같은 사내가 마른 나뭇가지를 들고 내 오라버니의 목을 겨눴던 장면을 떠올리면, 아이고, 좋아 죽겠네, 정말!’
서가복은 속으로 싱글벙글 웃으며, 어머니가 회인백부에 가야한다고 했을 때 투정 부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와, 서가의 넷째 오라버니도 오셨군요.”
정미가 담담하게 웃으며 서가복을 바라봤다.
“사실 그날, 가복 언니는 저를 놀라게 하지 않았어요. 서가의 넷째 오라버니가 저를 놀라게 했지요.”
정미는 다른 사람이 묻기도 전에 말을 이어갔다.
“그날 말이에요, 서가의 넷째 오라버니께서 저와 오라버니를 막아서서는 제가 그의 동생이라고 우기셨잖아요. 그리고 가복 언니가 사랑의― 읍읍…….”
서가복이 정미의 입을 막고 한 씨에게 말했다.
“한 숙모님, 저와 미 동생이 어제 본 친우처럼 친근하게 느껴지네요. 함께 나가서 좀 걷고 싶은데요.”
서가복이 정미를 끌고 나가자 한 씨는 꽤 불만스러운 듯했다.
‘역시, 나무에서 뛰어내린 아가씨는 성정이 촐싹거리는구나. 철이와의 혼사는 그만두는 것이 좋겠어.’
한편, 서가복은 생각했다.
‘다른 사람에게 촐싹대는 것처럼 보이는 게 툭하면 사랑의 도피를 하려고 한다는 걸 알리는 것보다 낫지! 걸핏하면 내 속사정을 들추어내는 어리석은 오라버니가 있으니, 정말 살기 힘들구나!’
한 씨가 정요와 정동을 한 번 훑어보며 말했다.
“됐다, 너희도 나가서 놀거라.”
* * *
서가복은 힘이 좋은 편이었다. 정미는 최근 며칠 동안 덕소 장공주에게 승마와 활을 배웠지만, 서가복에게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화원까지 끌려와서야 정미는 그녀를 밀치며 화를 냈다.
“무슨 짓이야, 다른 사람이 네 속사정을 들춰냈다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거야?”
‘오라버니가 다른 사내와 사랑의 도피를 하려던 아가씨와 결혼하게 할 수는 없어!’
“미 동생, 내가 네 미움을 산 건 아니지? 사람에게 살길은 남겨줘야지. 우리 어머니 앞에서 그렇게 말하면 어머니가 돌아가서 나를 가만두지 않으실걸.”
서가복의 태도가 나쁘지 않자, 정미는 눈을 피하며 말했다.
“그래도 얌전한 소녀인 척 우리 어머니를 속이게 둘 순 없잖아. 어머니가 너와 우리 오라버니의 혼사를 정하게 되면 어쩌려고?”
서가복의 눈이 반짝였다.
“그럼 잘 준비하면 되지. 우리 집엔 딸이 나 하나밖에 없는걸. 우리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어. 나한테 혼수를 아주 많이 줄 거라고. 누가 내게 장가들면 평생 걱정하지 않게 해주겠다고.”
정미가 매섭게 노려봤다.
“우리 둘째 오라버니는 아내의 덕을 볼 필요 없어. 서가복, 얼빠진 척할 필요 없어. 네가 우리 오라버니한테 시집가고 싶다고 해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왜 불가능한데? 너 같은 어린 여자애가 불가능한 일을 얼마나 봤다고 그렇게 말하는 거니?”
서가복이 목련 한 송이를 꺾어 꽃잎을 하나씩 떼어내 비벼 부수며 바닥에 떨어트렸다.
“솔직히 말해봐, 나 못생기지 않았잖아?”
목련나무에 기대있는 소녀는 동그란 눈에 복숭아 같은 뺨을 가졌고, 꽃보다도 아름다웠다. 정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동의한 셈이었다.
“나는 거액의 혼사도 있어. 잠깐, 너희 오라버니는 그게 필요하지 않다고 해도, 나중에 네 조카들은 다르지 않겠어?”
정미가 생각해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백부에선 둘째 나리의 자녀가 가장 많았다. 하지만 다른 숙부네들보다 더 여유롭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혼사 덕분이라고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가복은 꽃잎을 다 떼어버린 목련을 바닥에 던지고 웃으며 말했다.
“그렇잖아. 내 성정은 너희처럼 얌전한 숙녀 같지 않아. 하지만 그런 얌전한 숙녀들이라고 다 좋은 여인일까? 확실하지도 않잖아. 내가 훨씬 나을지도 모르지.”
정미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가복이 멍청한 편은 아니구나. 말에 일리가 있어. 나와 일을 꾸미려는 건가? 하지만 나는 아쉽게도 절대 굽히지 않을 거야!’
“사랑의 도피니 뭐니 했던 건, 그저 내 성정이 별나서 소란을 피운 것뿐이야. 능남엔 정말로 그런 여인들이 많이 있는걸. 만약 내가 정말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왜 여기 있겠어?”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너와 우리 오라버니는 이루어질 수 없어.”
“왜 안돼? 그럼 내가 물을게. 만약 네 오라버니가 나를 좋아한다면?”
“우리 오라버니가 왜 너를 좋아해?”
정미가 진노하며 서가복을 한 번 노려보고는, 목련나무 가지를 밀어제치며 떠났다.
서가복은 자신과 닮은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역시 예쁜 사람은 다루기 어렵구나. 더욱 힘 써야겠어!’
“서가의 언니가 어찌 여기 계십니까? 저기 정자에 가서 차나 한잔 하시지요.”
어느새 정요와 정동이 서가복을 찾아왔다.
서가복은 정신을 차리고 두 자매를 한 번 쳐다보고는 입을 삐죽였다.
“안 마십니다. 두 분이서 드세요.”
‘정가의 셋째 아가씨만큼 예쁘지도 않은데, 시간을 낭비할 순 없지!’
서가복은 발걸음을 옮겼고 저 멀리 호숫가에 서 있는 정미를 보며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월동문을 지나 앞뜰로 향했다.
* * *
정미는 뒤쪽 화원의 인공 호숫가에서 누군가를 기다렸고,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자 고개를 돌려봤다. 마침 노란색 옷을 입은 사람이 월동문을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보이더니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정미는 입을 뻐끔거리며 깜짝 놀랐고, 한참 뒤에야 반응했다.
‘안 돼, 쟤, 쟤 지금 앞뜰에 오라버니를 찾으러 가는 거지! 저 뻔뻔한 것!’
정미는 급히 치맛자락을 들고 쫓았다. 월동문을 지나 두리번거리며 찾았지만 서가복의 자취가 보이지 않았다.
정미는 초조해졌다.
‘내가 너무 부주의했구나. 서가복 같은 사람은 방심해선 안 됐는데!’
정미는 수화문을 따라 이어져 있는 복도를 걸어갔고, 둘째 나리의 응접실에 도착해 발걸음을 멈추고 팔근에게 손을 흔들었다.
팔근은 셋째 공자의 사동, 청풍(淸風)과 함께 햇볕을 쬐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갑자기 태양 아래서 어떤 뽀얀 손이 나타나 그를 향해 흔들자, 팔근은 깜짝 놀랐다.
‘신이 드디어 나를 도우시는구나. 내게도 누님들의 호의를 받는 날이 오다니.’
공자님은 집안의 여종들을 절대 가까이 하지 않았기에, 팔근도 여종들과 대화를 나눌 엄두를 내지 못하곤 했다.
팔근이 청풍을 밉살스럽게 한 번 쳐다봤다.
‘지금은 그저 이 바보 같은 놈과 한담이나 나누며 시간을 때울 수밖에 없지만…….’
팔근은 침착하게 곁눈질로 다가오는 사람을 쳐다보다가 누군지 알아보고는 순식간에 침착해졌다. 그는 소변을 보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청풍에게 인사하고는 의기소침하게 정미에게로 다가왔다.
“셋째 아가씨.”
정미는 오라버니의 사동이 춘정에 눈뜨는 나이가 된 건지는 알 리 없었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팔근, 오라버니가 안에 있니?”
“공자님은 셋째 공자님과 함께 오늘 방문하신 몇몇 공자님을 모시고 장청원에 가셨습니다.”
“왜 오라버니가 지내는 곳에 간 거야?”
팔근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마도 장서루(藏書樓)에 책을 보러 가신 것 같습니다.”
장청원에는 장서루가 한 채 있었는데, 몇 대를 거쳐 회인백부에 보관된 서책들이 있었다. 수도의 부귀한 가문에는 이런 장서각이 하나쯤은 있어 풍아함을 자랑하곤 했다.
“그럼 왜 모시러 따라가지 않은 거야?”
정미가 멀리 있는 청풍을 보며 말했다.
“아가씨는 모르시지요, 어떤 공자께서 성질이 조금 이상하십니다. 출발할 때쯤 사람이 많으면 성가시다 하시며 그 공자의 사동을 남기셨고, 그래서 저희도 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 알았어. 이만 가봐.”
정미는 급히 몸을 돌려 장청원으로 향했다. 정철과 몇 사람들이 죽림 옆의 정자에서 한담을 나누고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정미가 더 다가갈까 말까 망설이던 와중에, 갑자기 정철이 몸을 일으켜 천천히 죽림으로 걸어왔다.
정미는 의심스러워, 정철이 죽림에 들어오는 것을 보며 기다렸고, 정철이 대나무 가지를 잡아당겨 자세히 고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대나무 잎을 골라 피리를 불려고 하는 거구나.’
정미는 참지 못하고 앞으로 몇 걸음 더 다가갔다.
‘아주 오랫동안 오라버니가 피리를 부는 걸 듣지 못했는데, 몰래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그때 시야에 노란색이 스쳐 지나갔다. 정미는 가슴이 철렁하여 시선을 위로 옮겼고,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서가복이 또 나무 위로 올라갔어! 뭘 하려는 거지?’
정미는 곧바로 긴장했다. 정철이 이 방향으로 걸어왔고, 곧 서가복이 있는 나무 아래로 다가왔을 때, 서가복이 갑자기 일어나서 양팔을 벌리고 뛰어내리려는 자세를 취했다.
‘안 돼, 오라버니의 품에 뛰어들려는 거구나! 그럼 오라버니가 무조건 서가복에게 장가가야 하는 거 아냐?’
그 순간, 정미의 머릿속엔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스쳤다. 그녀는 이내 곧바로 치맛자락을 들고 달리며 외쳤다.
“오라버니!”
정철이 이를 듣고 고개를 돌렸고, 정미가 달려오는 것이 보이자 여동생이 넘어질까 봐 급히 빠른 걸음으로 맞이했다.
그리고 곧 콰당 하는 소리와 함께 서가복이 정철 뒤의 바닥으로 떨어졌다.
* * *
일각(*一刻: 15분) 동안 모두가 당황해 우왕좌왕하고 나서야, 서가의 큰오라버니가 기절하여 얼굴이 새파래진 여동생을 안고 말했다.
“정 형, 저는 여동생을 데리고 돌아가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만나지요.”
정철도 마음이 복잡한 듯했다.
“서 형, 제 셋째 숙부님께서 의원이시니, 일단 모셔와서 서가의 아가씨를 봐달라고 하지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희 집안에 타박상 전문 의원이 있습니다. 이런 치료에 가장 자신이 있지요.”
정철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이 서가 아가씨는 자주 넘어지는가 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