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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105화 (105/375)

105화. 폭로

“미미.”

정철이 눈을 꾹 감았다가 피곤한 얼굴로 정미를 쳐다봤다.

“오라버니가 네게 너무 잘해준 걸까? 갈수록 용감해지는구나. 그런 일들이 너 같은 여자아이가 걱정할 일일까?”

“오라버니…….”

정미가 천천히 일어났다.

정철은 한 번도 이렇게 귀찮다는 듯 정미를 책문한 적이 없었다.

정미는 억울하면서도 괴로웠다. 고개를 숙이고 울지 않으려 했지만, 눈물이 저절로 눈가를 따라 주르륵 떨어졌다.

“오라버니, 오늘 엄청 이상해. 내가 오라버니를 놀린 것도 아닌데, 왜 화를 내!”

정미는 흐느끼며 말했고 조금 당황하는 오라버니를 흘끗 보고는 벗겨놓은 잣을 움켜쥐고 말했다.

“잣을 주지 않을 거야.”

그러고는 몸을 돌려 뛰어나갔고, 죽림의 끝에서 멈춰서서 눈물을 닦았다.

‘역시, 누구든 간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이상해지는구나. 하지만 나는 오라버니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어떡하지?’

정미는 아주 괴로웠다.

그녀는 자신의 이기심이 몹시 미웠다. 하지만 이렇게 이기적이더라도, 오라버니가 자신을 미워하고 무시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정미는 그저 오라버니가 계속 자신을 좋아해주기를 바랐다.

정미는 대나무 가지를 내팽개치며 소리 없이 울었다.

이제 막 열네 살을 넘긴 소녀는, 자기 자신이 죽도록 미웠다.

“미미.”

누군가 정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정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뒤에서 낮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미미, 울지 마. 오라버니가 잘못했어.”

정미는 더욱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미미, 오라버니가 그렇게 마음대로 네게 화내선 안 됐어. 오라버니가 마음이 복잡해서 괜히 너에게 화풀이한 거야. 오라버니를 용서해줘. 응?”

등을 돌리고 있어 정철의 모습을 보지 못해서인지, 그 익숙한 목소리가 정미의 귀에 들려오자 목소리 속의 씁쓸함은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정미가 몸을 돌려 정철의 품에 안겼다.

“오라버니, 미안해……. 앞으로 내게 성내지 마. 나 무서워.”

정철의 몸이 굳었다가도, 손으로 소녀의 여린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알겠어.”

정미는 정철을 놓고 울다가 웃으며 손을 벌렸다.

“그럼 잣 먹을 거야?”

정철이 그녀의 머리를 두드렸다.

“눈물 콧물 범벅인 손으로 뭘 먹어. 가자, 오라버니가 잣을 벗겨줄게.”

“오라버니는 나보다 빠르지 않은걸!”

“그럼 네가 해줘.”

정철이 정미를 데리고 푸른 죽림 속으로 사라지자, 대나무 잎이 흔들리는 소리만이 그곳에 남았다.

* * *

그 동방의 성은 서(徐)씨였고, 능남의 포정사(*布政使: 지방의 재정, 세금, 민사를 맡아보던 벼슬)로 정치에 참여했다가 지금은 수도에 남아 대조(*待詔: 왕명을 문서로 작성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던 관원)가 됐다고 했다.

손님이 방문하자 둘째 나리는 앞뜰에서 서가의 부자를 맞이했고, 한 씨는 여인들을 이연원에서 대접했다.

“왕(王) 부인, 차를 드세요.”

한 씨가 왕 씨를 상좌에 모시고 설란에게 분부했다.

“아가씨들을 모셔오거라.”

한 씨의 시선이 왕 씨의 곁에 꼭 붙어있는 소녀에게로 꽂혔다.

“이분은 따님이시지요?”

왕 씨가 웃었다.

“그렇습니다. 가복(嘉福), 어서 한 부인께 인사드리렴.”

서가복이 일어나서 사뿐히 예를 갖췄다.

“가복이 한 부인을 뵙습니다.”

소녀는 아주 아름답고 예의 있었다. 한 씨는 보자마자 꽤 마음에 든 듯 생각했다.

‘서가의 아가씨가 열여덟이 되도록 시집을 가지 못했다 하여 용모에 문제가 있는 걸까 걱정했는데, 그 부분은 안심해도 되겠구나.’

한 씨가 손목의 비취옥 팔찌를 빼서 건넸다.

“숙모에게 별로 좋은 물건이 없구나. 이 팔찌를 줄 테니 가지고 놀렴.”

서가복은 왕 씨를 한 번 쳐다봤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손을 뻗어 건네받고는 방긋 웃었다.

“감사합니다, 숙모님.”

한 씨가 웃었다.

“왕 부인, 따님을 정말 잘 가르치셨군요. 가복은 정말 출중합니다.”

서가복은 고개를 숙이고 몰래 웃었다.

왕 씨가 경고하듯 딸을 한 번 훑어보고는 겸손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아들을 연달아 넷이나 낳고 이 딸을 얻었는데, 제가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혼자 능남에 남겨두기에 마음이 놓이지 않더군요. 그래서 그동안 계속 기다리다 이제야 수도에 오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서가복이 지금까지 시집가지 못한 이유를 완곡하게 설명한 것이었다.

한 씨는 왕 씨의 말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고, 서가복을 바라보는 눈빛은 더욱 따뜻해졌다.

“어머니―”

서가복이 뾰로통하게 왕 씨를 노려봤다.

“이것도 말하지 못하게 하다니.”

“여자아이가 활발하면 좋지요.”

왕 씨와 한 씨가 같이 웃었다.

그때, 주렴이 살짝 흔들리는 소리가 났고 설란이 한쪽에서 주렴을 걷어올리자 두 소녀가 앞뒤로 나란히 걸어들어왔다.

앞에 있는 소녀는 적당한 체구에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했으며, 입가에는 부드러운 웃음기를 띠고 있어 난초처럼 단아했다. 뒤의 소녀는 나이가 조금 어렸으며,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처럼 여려 보였다.

왕 씨가 눈을 반짝이며 칭찬했다.

“백부의 아가씨들인가요? 저희 집 딸아이도 어디 내놓기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백부의 아가씨들과 비교하니 모자라네요. 역시 인걸은 지령이라고, 황제가 있는 수도는 능남 같은 변두리와 비교할 수 없군요.”

사실 속으로는 수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회인백부의 셋째 아가씨가 무척 못생겼다는 말을 들었는데, 보아하니 이 둘은 아닌 듯하다고 생각했다.

‘설마 남 앞에 내놓을 것이 못 되어서, 손님을 맞이하러 나오지 않은 건가?’

정요와 정동이 다가와 인사했다.

“어머니를 뵙습니다.”

한 씨가 눈살을 찌푸리고 설란에게 물었다.

“셋째는?”

설란이 급히 말했다.

“셋째 아가씨께선 목련을 몇 송이 꺾어오신다 하셨습니다.”

한 씨는 그제야 웃음기를 띠고 정요와 정동에게 말했다.

“어서 왕 부인께 인사드리지 않고.”

“왕 부인을 뵙습니다.”

한 씨가 왕 씨에게 소개했다.

“키가 조금 큰 아이가 둘째이고, ‘요’ 라는 외자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다른 한 명은 넷째이고, 이름은 ‘동’입니다.”

왕 씨는 두 사람을 일으켜 세우려는 듯 손짓했고, 팔찌 두 개를 꺼내 두 사람에게 나눠주었다. 건네주는 움직임은 왕 씨의 말투만큼 친절하지 않았다.

능남은 남란국에 인접해 있었고, 남란국의 영향을 받아 여인들의 지위도 꽤 높았다. 때문에 첩을 들이는 일이 매우 드물었고, 서자나 서녀 또한 아주 적었다.

그녀는 만약 할 수만 있다면 딸을 능남에서 시집보내 아이를 낳게 하고 싶었다. 그곳은 수도만큼 번화하진 않았지만, 여인들도 편하게 살 수 있었다.

다만 딸의 사나운 과거를 생각하면,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었고 그냥 수도에서 적당한 사내를 찾아 얼른 시집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쪽은 서가의 아가씨이고, 이름은 가복이란다.”

정요와 정동이 서가복과 인사를 나눴다.

잠시 후, 설란이 문 입구에서 말했다.

“부인, 셋째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주렴이 걷히자 늘씬한 소녀가 걸어들어왔다.

연청색 치마의 소녀가 백목련을 한 아름 안고 있었고 가까이 다가오지 않아도 꽃향기가 날아 들어왔다.

왕 씨는 참지 못하고 머리를 내밀어보았고, 눈처럼 새하얀 피부와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소녀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정미가 다가왔다.

“어머니.”

한 씨는 기분이 꽤 좋아졌다.

‘오늘 미가 입은 치마가 아주 잘 어울리는군. 여기 있는 다른 여자아이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구나. 역시 내가 낳은 딸이야.’

“얼른 꽃을 내려놓고 왕 부인께 인사드리거라.”

정미는 백목련을 상란에게 넘기고 왕 씨에게 예를 갖췄다.

“왕 부인을 뵙습니다.”

“이 아이는 셋째 정미입니다. 어려서부터 고집불통이었는데, 목련을 꺾어오기 위해서 시간을 지체하다니, 왕 부인께 실례가 되었군요.”

정미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가 목련을 꺾어오기 위해서라는 거야. 방금 울었던 티가 나서 방에서 계란으로 붓기를 빼고 있었는걸.’

왕 부인은 가까이서 정미를 보면 볼수록 놀라워했다.

이렇게 절색한 소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역시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되는구나.’

그녀는 정미를 덥석 잡아당겨 자신의 머리에 꽂은 난새(*봉황과 비슷한 전설상의 영조靈鳥) 비녀를 빼서 정미의 머리에 꽂아주며 칭찬했다.

“역시 부인의 적녀이군요. 딱 봐도 다릅니다. 정말 마음에 쏙 드는군요.”

한 씨가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정요와 정동의 안색은 조금 나빠졌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정미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슬쩍 돌려 눈을 들었고, 왕 씨의 옆에 기대어있는 소녀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한 씨는 정미가 놀라는 것을 보고 말했다.

“이쪽은 서가의 언니고, 이름은 가복이라 한다.”

서가복도 정미를 알아보았지만, 아무런 티도 대지 않고 활짝 웃으며 정미의 손을 잡았다.

“미 동생, 정말 예쁘네요. 보자마자 넋을 놓을 뻔했어요.”

정미가 손을 빼며 옅게 웃었다.

“가복 언니는 이미 저를 두 번째로 만나는 건데 넋을 놓기는요. 저는 공교로워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내가 미안해서 폭로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나 본데, 미안, 난 그런 거 모르거든.’

만약 그저 평범하게 집안끼리 아는 사이로 만난 거라면 성가신 일을 굳이 만들지 않았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조심하지 않으면 오라버니에게 정혼녀가 생기는 건데, 어떻게 방심할 수 있겠어. 게다가 오라버니에겐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버렸으니, 오라버니를 도와줘야지!’

이 생각에 정미는 조금 맥이 풀렸다.

‘결국 오라버니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내지 못했지만, 어떤 일들은 자신만의 비밀로 남기기도 하는 거야. 예를 들어 아혜와 오라버니만큼 친해지더라도 비밀을 공유할 계획이 없는 것처럼.’

이렇게 생각하니 정미는 더는 오라버니를 원망할 수 없었고, 그저 이 일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오라버니 때문에 조급해질 뿐이었다.

“서로 만난 적이 있니?”

한 씨가 궁금해했다.

왕 씨는 담담한 표정의 정미를 보고는 다시 경직된 웃음을 띤 딸을 봤고, 갑자기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정미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있습니다. 전에 시험장에서 소란이 일었을 때, 오라버니가 저를 구해 나오는 길에서 여동생을 찾고 있는 사람을 마주쳤어요. 그러다가 가복 언니가 나무에서 뛰어내렸습니다.”

‘나무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이 말에 한 씨와 왕 씨의 머리가 동시에 윙윙 울렸고 어지러움을 느꼈다.

‘나무에서 뛰어내렸다고? 이런, 안 되지. 많이 쳐봤자 열 살 전에 할만한 짓인데. 서가의 아가씨는 열여덟이나 되었는걸. 아직도 나무에서 뛰어내리는 행동을 하다니!’

한 씨는 놀라며 생각에 잠겼다.

“가복, 셋째 아가씨와 정말로 만난 적이 있느냐?”

왕 씨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서가복은 어머니를 잘 알았기에 살짝 떨리는 눈썹에서 그녀가 화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왕 씨는 당연히 제 딸이 나무에 오르는 행동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최소한 다른 사람에게 덜미를 잡히진 말았어야지!’

서가복은 무법천지로 지내는 데 익숙해졌고, 잘못을 저지른 후 현장에서 잡히는 일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미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사랑스러운 얼굴로 나를 궁지에 빠트리다니! 수도의 귀녀들은 온화한 면모를 가장 중시한다고 여겼는데, 설마 죽도록 미워하더라도 친근하게 언니 동생이라 불러야 하는 건가?’

서가복은 자신이 찾은 정보들이 조금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전술을 바꿔 침통한 표정을 꾸며냈다.

“어머니, 미 동생의 말을 들으니 생각났어요. 그날 그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얼마나 무서웠는데요. 거리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밟고, 많은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어요. 밟힌 사람들은 얼굴을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였고요. 저는 어쩔 수 없이 나무 위로 올라가 피해 있었어요. 그래서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던 거랍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어머니께선 더 이상 딸을 못 봤을지도 몰랐을 거고, 저는 미 동생을 만날 수도 없었을 거예요.”

서가복의 변명에 한 씨의 마음이 동요했다.

한 씨는 위험을 직면했을 때 침착하게 나무에 올라 피난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그저 죽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보다 강인하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이런 며느리라면 나중에 집안에 무슨 일이 생겨도 잘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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