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손님의 방문
맹 노부인이 눈을 부릅뜨고 정미를 쳐다봤다.
“왜 그러냐, 정미. 네 조모의 처분에 불만이 있는 것이냐?”
“불만은 없습니다. 그저 도대체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생각 중이었습니다. 저는 오라버니를 배웅하러 갔다가 소란에 휘말렸고, 오라버니는 저를 구하기 위해 시험을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이게 제 잘못이라고요? 그럼 이런 논리로 따지자면, 손녀가 사당에서 경서를 베껴 쓸 때 사당이 무너져서 지나가던 사람이 깔려 죽으면, 그때도 제가 사당에 있었기 때문에 제 책임이 되는 건가요?”
이 말에 정요와 정동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방금까진 정미가 사당에 가서 경서를 베껴 쓸 때, 가서 조롱 섞인 위로를 해주려고 했는데, 사당을 지나가는 사람이 깔려 죽느니 뭐니 하는 말을 하다니, 정말 악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조모님, 아버지, 어서 저 미천한 것을 호되게 혼내주세요!’
“입 닥치거라!”
맹 노부인은 화가 나 지팡이로 땅을 내리치며 한 씨에게 말했다.
“이게 네가 가르친 잘난 네 딸이다! 이렇게 생떼를 부리며 어른에게 대드는 아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구나!”
“조모님, 그렇게 박식하고 경험이 많으신데 어찌 한 번도 본 적 없으실까요.”
정미가 침착하게 말했다.
“전에 제가 조모님께서 큰고모님과 다툴 때, 고모님께서 집안의 은전을 큰언니에게 주지 않았어야 한다고 하시는 걸 들었는걸요.”
“너!”
맹 노부인은 화가 나 털썩 주저앉았고, 가슴을 부여 잡고 말했다.
“여봐라, 저 애를 사당으로 데리고 가 무릎 꿇게 하여라!”
두 여종이 다가와 정미를 잡아당겼고, 그러자 정미는 긴 눈으로 차갑게 그 둘을 흘겨보았다. 두 여종은 순간 정미를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정미가 맹 노부인을 바라봤다.
“조모님, 내일 손녀는 외출해야 합니다. 덕소 장공주께서 앞으로 매일 공주부에서 무술을 가르쳐주시기로 하셨는걸요.”
말을 마친 정미는 조롱이 담긴 입꼬리로 맹 노부인을 바라봤다.
이 문을 넘어올 때, 정미는 당연히 울고 불며 모든 잘못을 덮어쓰고 스스로 벌을 청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했다면 좋은 말을 몇 마디 들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죽어도 그렇게 하기 싫었다.
‘이 세상에서 내가 머리를 조아리며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내게 소중한 사람들뿐이야. 하지만 이 방 안엔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지.
저 사람들이 분노하고 애석해하는 이유는 회인백부의 품격을 내가 떨어트렸다고 여겼기 때문이잖아, 둘째 오라버니의 3년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기 때문인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렇다면 내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이 방 안의 사람들 앞에서 바닥을 기며 인정할 수 없지.
오라버니에게 하는 사과는 힘이 없어. 만약 나였더라고 해도 오라버니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희생할 수 있었을 테니까.
나의 안위를 신경 쓰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무사히 돌아왔으니 이렇게 무섭게 몰아붙이면서 당장 벌하려고 하지 않을 거야. 그저 권력과 지위만을 신경쓰는 사람에게는, 나도 남의 힘을 이용해서 맞설 수밖에 없지.’
아니나 다를까, 방금 그 말에 방 안의 사람들 모두의 표정이 제각각 달라졌다. 맹 노부인은 마치 파리 한 마리를 삼켰는데 뱉으려 해도 뱉어지지 않고 삼키려고 해도 삼켜지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역시 둘째 나리가 처음으로 침묵을 깨트렸다.
“장공주께서 네게 무술을 가르쳐주신다고? 덕소 장공주를 말하는 것이냐?”
정미가 담담하게 웃었다.
“덕소 장공주입니다. 오늘 아버지께서 오라버니를 장공주부의 고 선생께 용서를 빌라고 보내시지 않았습니까? 장공주께서 저를 보시고는, 제 골격이 훌륭하여 무술에 알맞다고 하시며 저를 제자로 받으셨습니다.”
정미가 웃으며 맹 노부인을 쳐다봤다.
“조모님, 손녀는 사당에 가고 싶지 않은 게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내일 장공주부로 가 무술을 배울 때 지장이 있지 않겠습니까? 장공주께서 제 태도가 좋지 않음을 보시고 저를 다시 돌려보내실지도 모르는데, 그럼 저희 백부에게 망신이 되지 않을까요?”
이 말에 맹 노부인은 따귀를 맞은 듯했다. 하지만 아프다고 소리를 지를 수도 없이 그저 화끈거리는 치욕을 참으며 힘들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장공주께 열심히 배우거라. 백부의 체면을 구겨서는 안 된다!”
“조모님의 양해에 감사드립니다. 손녀는 기필코 열심히 배울 것입니다. 다섯째 공주께선 몇백 근의 바위도 번쩍 드시던걸요. 손녀도 나중에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요.”
정요와 정동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뭐라고, 몇백 근의 바위를 들었다고? 지금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거지?’
‘게다가, 정미 같은 아가씨가 몇백 근의 바위를 들어서 뭐 하려고, 설마―’
정요와 정동은 앞으로 정미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곧바로 사람을 들어 호수로 던져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 상상은 너무나도 섬뜩해서 두 자매는 동시에 몸을 부르르 떨며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섯째 공주도 있다고?”
둘째 나리가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다른 두 딸을 보았다. 하나는 얌전하고 철이 들었으며, 하나는 애교가 많고 사랑스러웠다. 그 누구도 이 못된 녀석보다 못나진 않았다고 생각했다.
‘왜 늘 사고만 치는 이 못된 녀석이 높으신 분들의 눈에 드는 걸까?’
둘째 나리에게는 덕소 장공주의 무게가 태자비보다 무거웠다.
그는 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 태자가 태자비에게 냉담하며, 지금은 백 년 전의 유조(*遺詔: 임금의 유언)에 걸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지만, 태자가 황제에 즉위한 뒤로는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라는 것을.
‘유조에는 회인백부의 적녀를 태자비에 앉힌다고 했지, 황후로 앉힌다고는 하지 않았다!’
전대의 황조부터 지금까지 폐후는 그리 적지 않았고, 지금의 황후는 폐위되지는 않았지만 조정의 위아래 사람들 모두가 황후가 평생 유폐될 거라 생각했고 그저 유명무실한 자리라고만 생각했다. 진정으로 후궁들을 관리하는 사람은 역시 태자의 생모인 화 귀비였다.
그러나 덕소 장공주는 달랐다.
장공주에게는 젊었을 때 황제를 구한 공로가 있으며, 그 일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황제는 지금까지도 그 친여동생에게 미안하면서도 존경스러워했다. 심지어 황제의 마음속 황후의 무게가 장공주보다 가볍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이 녀석이 덕소 장공주의 마음에 들었다면, 오늘의 일은 그저 넘어갈 수밖에 없겠구나.’
둘째 나리는 고집불통의 셋째 딸을 힐끗 보고는 속으로 화를 눌렀다.
‘결국엔 정철 때문이다! 만약 정철이 고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지 않았다면, 이 녀석이 장공주부에 갈 일이 뭐가 있었겠는가!’
당연히, 이렇게 뛰어난 양자가 있는 건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양자는 아버지인 자신에게 데면데면했으며, 트집을 잡으려고 해도 잡을 것이 없었다.
양자가 여동생 하나에게 잘해준다고 아버지로서 간섭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둘째 나리는 양자가 마치 한 마리의 미꾸라지처럼 잡기 어렵다고 생각했고, 그 미꾸라지는 후안무치하게도 공손하고 예의 바른 겉모습을 해 무슨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으며 화를 내고 싶어도 화낼 곳이 없었다.
그렇게 철든 양자에게 화를 내면 둘째 나리가 괜히 소란을 피우는 것처럼 보일 터였다.
둘째 나리의 표정이 변화를 겪자, 정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예, 다섯째 공주도 계십니다. 공주께선 제 사자이신걸요.”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열심히 배우거라. 하지 않아야 할 말은 하지 말고, 하지 않아야 할 행동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귀인들에게 무례하게 굴어선 안 된다.”
“알겠습니다.”
둘째 나리가 파리를 쫓듯 손을 휘저었다.
“됐다, 됐어. 알았으면 이만 물러나거라.”
정미는 어른들에게 몸을 숙여 인사하고는 문 입구로 걸어가서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 사람들이 압사당하는 그 상황에서 혼란스러웠던 딸에게, 다친 곳은 없었는지 묻지는 않으시는 건가요?”
둘째 나리는 말문이 막혔고, 정미는 한 씨를 흘끗 훑어보고는 몸을 돌려 나갔다.
* * *
봄기운이 회인백부를 물들였고 청석길의 양쪽엔 푸른 빛이 가득하며 꽃이 만발해있었다. 화장(*花匠: 꽃을 관리하는 사람)이 공들여 가꾼 꽃도 있었고, 야생에서 제멋대로 자란 이름 모를 들꽃도 있었다.
정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느린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역시, 내가 강하게 나가야 미운 사람들에게 화를 안겨줄 수 있구나. 하지만 남에게 의지해 얻어낸 힘은 헛된 것이다. 언젠간 나도 스스로 강해지고 말 거야.’
“오라버니―”
봄볕 아래, 익숙한 그림자가 옥란화(*玉兰花: 목련꽃) 아래에 서 있었고, 쏴쏴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청포가 흔들렸다. 그 모습은 마치 적선(謫仙)과도 같았다.
정미가 다가가 맞이하자 정철은 여동생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아버지께서 책벌하지 않으셨지?”
“응, 오라버니가 오늘 일을 사실대로 말하면 된다고 했잖아. 내가 앞으로 매일 덕소 장공주부에 가야 한다고 하니까 아무도 나를 벌주지 않았어.”
이 말을 하는 정미는 조금도 득의양양하지 않았지만, 말투에는 담담한 비웃음이 묻어나왔다.
정철이 손을 들어 정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바보야, 그렇게 화내고 미워할 필요 없어. 오라버니가 있잖아.”
“알겠어.”
정미가 정철의 손을 피했다.
“만지지 마. 헝클어지면 다시 빗어야 해.”
정미는 그렇게 말하고는 조금 울적한 듯 말했다.
“환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네.”
“내가 이미 사람을 보내 알아보라고 했어. 곧 소식이 있을 거야.”
* * *
정철의 예상대로, 반 시진 후 환안은 관차의 호송 아래 백부로 돌아왔다. 다행히 그 혼란 속에서 환안은 그저 다리만 까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환안이 돌아옴과 함께 그 재난 같은 사고의 소식도 알 수 있었다.
이 사고로 스물세 명이 사망했고, 백여 명이 다쳤다고 했다.
이 일은 제왕의 귀에 들어갔고, 창경제(昌慶帝)는 격노하여 이를 철저히 조사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인산인해 속에서 폭죽을 던진 사람을 찾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 찾기나 다름없었다.
이 사고는 결국 아무 성과도 없이 한동안 수도 사람들의 화제로 떠올랐다가 점점 묻혀갔다. 오히려 행방(*杏榜: 과거 합격자를 발표하는 방문)의 발표가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인백부에 손님이 찾아왔다.
마침 둘째 나리의 휴가일이었고, 일찍이 한 씨에게 동방(*同榜: 같은 회차에 과거에 함께 급제한 사람) 친우가 방문할 테니 외출하지 말라 알렸던 바였다.
정미가 이연원에 문안 인사를 올리러 왔을 때, 한 씨는 정미에게 당부했다.
“오늘은 제생당에 가지 말거라. 네 아버지께서 이따 동방이 가족을 데리고 방문해 너희들도 만나게 한다고 하시더구나.”
아버지도 만나기 귀찮아하는 정미가 그의 동방이니 뭐니 하는 사람을 만나려고 할 리 없었다.
“어머니, 얼마 전 셋째 숙부께서 저희 집안에서 내려오는 부법 집록을 제게 주셨습니다. 마침 가장 중요한 부분을 배우고 있어요. 저는 뵙지 않을게요. 어차피 제가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을 테니까요.”
“어찌 그럴 수 있겠니. 그 동방이 딸을 데리고 온다고 했는데, 정요와 정동만 인사를 하면 실례가 될 거다.”
이 동방은 얼마 전 둘째 나리가 한 씨에게 그 집안의 딸과 정철을 정혼시키자고 말했던 사람이었다.
한 씨는 원래 내키지 않았지만, 둘째 나리가 그 동방과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왔고 멀리서 수도까지 오는 것이기에 원래 양가끼리 만나야 했으니, 그 딸이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는 만나고 나서 얘기해도 늦지 않다고 했다.
한 씨는 이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뒤늦게 제안을 승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