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102화 (102/375)

102화. 잘못을 인정하지 않다

정미가 공주를 따라갔고, 두 사람은 연무장의 한쪽에 있는 병기방(兵器房)에 도착했다.

온갖 종류의 훌륭한 병기들을 본 정미는 감탄하며 혀를 찼다.

‘외조부님의 병기방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어릴 때 정미는 한지를 따라 몰래 외조부의 병기방에 간 적이 있었다.

‘작은 검도 가지고 나와 지 오라버니와 한 자루씩 들고 대련을 했었지.’

한지는 당시 몸이 그리 좋지 않아 아직 무술을 배우지 않은 때였고, 정미는 키도 크고 힘도 좋아 한지의 팔을 찔러 피를 내고 말았다.

그래서 이 일을 들키게 되었고, 어른들 귀에 들어가 어머니에게 큰 창피를 안겨주게 되었다. 어머니는 정미를 호되게 매질하려 했지만, 한지가 그녀를 감싸준 덕분에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쉽게도 그 작은 검은 외조모님에게 압수당해버렸고, 정미가 계속 아쉬워하자 한지는 그녀에게 아름다운 비수를 선물해줬다. 정미는 지금까지도 그 비수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어릴 때의 일이 떠오르자, 정미는 마음이 조금 쓰라렸다.

‘똑같은 사람들인데, 왜 어른이 되면 달라지는 걸까? 그때만 해도 지 오라버니는 내게 아주 잘 대해줬는데.’

공주가 정미를 잡아당겼다.

정미는 갑자기 느껴진 슬픔 속에서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공주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공주는 잠시 멈칫하더니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정미는 당황했다.

‘내가 무슨 짓이라도 한 건가? 소녀의 마음은 소녀인 나조차도 잘 모르겠네!’

공주가 정미를 잡아당겨 손을 뻗어 벽을 가리켰다.

벽에는 길고 짧으며 소재가 제각각인 활들이 걸려있었다.

정미가 깜짝 놀랐다.

“공주 전하, 제게 활을 고르라 하시는 겁니까?”

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동무와의 소통이 힘들지 않아 만족스러운 듯 눈빛에 기쁨이 묻어나왔다.

“전하께서 제게 하나 골라주세요. 사실 저는 활을 잘 알지 못한답니다.”

공주는 살짝 놀라더니 정미를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벽에서 활 하나를 꺼내 정미에게 써보라고 하였다.

정미가 힘을 아무리 써도, 활시위는 당겨지지 않았다.

무안한 듯 공주를 바라보자, 공주는 침착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기더니 긴 의자를 옮겨 밟고 올라가서 까치발을 들고 가장 위에 있는 활을 꺼냈다.

그 활은 단궁(短弓)으로, 우각(牛角)으로 만든 것으로 보였으며 활에 핏대가 감긴 채였다.

정미는 그 활을 보고 기뻐했다.

좋아하지 않을 리 없었다. 방금 그 활은 정미 키의 반만 했고, 키도 작아 보이는 공주가 어찌 침착한 얼굴로 그 활을 건네줄 수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정미가 힘을 주자 우각으로 만든 활시위가 당겨졌다.

공주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염낭에서 반지(扳指)를 꺼내 건넸다.

정미는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다.

맑은 청록색의 반지는 한눈에 봐도 고가의 물건이었다.

정미가 한참 동안 받지 않자, 공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줄게.”

그리고 반지를 정미의 손에 쑤셔 넣고는 그녀를 가리켰다.

“사매(師妹).”

정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공주는 큰 눈을 가늘게 뜨며, 정미가 자신을 ‘사자(師姉)’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 불만스러운 듯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뭔가 떠오른 듯 정미를 병기방 밖으로 데리고 나가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두 손에 입김을 불며 비비고, 다리를 쭈그리고 앉아 길가의 바위를 들어올렸다.

정미는 깜짝 놀랐고, 공주는 바위를 든 채 정미를 바라봤다.

“사자!”

정미의 입꼬리가 씰룩이더니 재빨리 외쳤다.

공주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고,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위를 바닥에 던져버렸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흔들리는 느낌까지 들어 정미는 몸에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면면 공주는 힘이 타고났다는 덕소 장공주의 말은 이런 뜻이었구나. 너무 겸손한 말 아냐!?’

두 사자매는 팔짱을 끼고 돌아갔다. 덕소 장공주는 정미의 손에 단궁이 쥐어진 것을 보고 의외라는 듯 공주를 한 번 쳐다보고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정철 남매가 떠난 뒤, 덕소 장공주가 고 선생에게 말했다.

“청겸의 여동생, 정말 괜찮더군요.”

“음?”

“오늘 면면과 그 아이가 아주 잘 놀더군요. 면면이 예전에 북제(北齊)가 바친 우각궁을 주기까지 했어요. 원래는 그 아이의 용모가 절색하여 자신을 지킬 수 있게끔 가르쳐주려고 했을 뿐인데, 생각지도 못하게 면면이 사매와 어울리며 과묵한 성정을 조금 고칠 수도 있겠어요.”

고 선생이 크게 웃었다.

“그건 당연합니다. 청겸이 데려온 동생이 나쁠 리 없지요. 내가 제자를 잘 골랐군요.”

덕소 장공주가 눈을 부라리며 꾸짖었다.

“내 앞에서 자랑하지 마세요. 그렇게 훌륭한 인재가 당신 때문에 낭비되고 있으니.”

“운조(云照), 그게 무슨 뜻입니까?”

덕소 장공주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당시 제자를 받을 때, 내가 청겸의 골격이 좋으니 내게 무술을 배우면 새로운 땅을 개척할 훌륭한 장수가 될 거라 했지요. 당신이 굳이 그 아이에게 쓸모없는 글이나 가르쳐서 내 제자를 빼앗아가지 않았습니까. 근데도 지금 내 앞에서 자랑을 하다니, 간이 부었군요.”

“큼큼, 운조, 당신에겐 면면이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청겸은 계속 위국공에게 창법을 배웠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위국공부의 창법은 명성이 자자했기에, 덕소 장공주는 더는 원망하지 않고 얼굴을 피며 웃었다.

“백안, 우리 바둑이나 둡시다.”

고 선생은 당황하고 말았다.

* * *

정철 남매는 백부로 돌아오자마자 염송당에 불려갔다.

정가의 둘째 나리는 하인에게 불려 관아에서 집으로 돌아왔고, 두 남매가 들어오자 안색이 바로 어두워졌다.

“철아, 방금 고 선생에게서 돌아온 것이냐?”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앞으론 공부에 전념하고 3년 뒤에 다시 시험을 보거라. 안채에는…… 앞으로 적게 오고.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말이다.”

둘째 나리는 정철 옆에 바싹 붙어있는 정미를 흘끗 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정철이 꼿꼿이 서서 차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잘 알겠습니다.”

“알아들었으면 장청원으로 돌아가거라. 그쪽이 공부하기에 청정하니.”

둘째 나리가 방 안의 다른 아이들을 훑어봤다.

“앞으로 누구도 이유 없이 둘째를 방해하면 안 된다.”

정요 등의 아이들이 동시에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정철이 정미를 흘끗 쳐다보자, 정미는 정철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철은 방 안의 어른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방을 나갔다.

정철이 나가자마자 둘째 나리는 더욱 어두운 표정으로 정미를 쳐다보며 탁자를 내려쳤다.

“못된 것, 꿇어라!”

정미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서서 말했다.

“아버지,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뭘 잘못했냐고? 그걸 지금 나한테 묻는 것이냐?”

둘째 나리는 화가 나 탁자를 내리쳤고, 찻잔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방 안의 다른 사람들은 이 소리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아이들 중 정요만 침착한 표정이었고, 정동과 다른 아이들은 겁에 질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오늘 내가 일부러 네 형제자매들을 불러모은 건, 너처럼 소란을 피우면 백부에 얼마나 큰 화를 불러오는지 보라는 뜻이다!”

정미가 턱을 치켜들고 차분하게 물었다.

“하지만 아버지, 저는 정말 아버지께서 왜 노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제게 설명해주신 뒤 질책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모른다고 했느냐? 그럼 내가 묻겠다. 네 둘째 오라버니는 왜 시험을 놓친 것이냐?”

둘째 나리는 이 딸이 약으로도 고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딸을 때릴 순 없었기에, 참지 못하고 한 씨를 한 번 노려봤다.

“당시 시험장에 소란이 일었고, 오라버니는 저를 구하기 위해서 시험을 포기했습니다.”

정미는 말을 마치고 잠시 둘째 나리와 시선을 마주하다가 망설이며 물었다.

“아버지, 오라버니가 저를 구하지 않았어야 했다고 말씀하시려는 겁니까?”

둘째 나리는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고, 또다시 탁자를 내리쳤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청화자기로 만들어진 찻잔이 흔들려 바닥으로 떨어졌고 결국 산산조각이 났다.

정동은 놀라서 입을 막고 소리를 질렀으나 둘째 나리가 쳐다보자 급히 고개를 숙이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녀는 곁눈질로 몰래 정미를 훑었고, 아무렇지도 않은 정미의 모습에 속으로 또 부러우면서도 화가 날 지경이었다.

어떤 일을 마주쳐도 무서워하지 않을 것 같은 정미의 대담함과 여유로움이 부러웠다. 그리고 정미가 무엇을 믿고 이렇게 용감한지 화가 났다.

‘정미가 적녀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둘째 오라버니가 정미를 아끼기 때문일까?’

“그럼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둘째 나리가 벌떡 일어섰다.

“뭘 잘못했냐고? 만약 네가 거기 있지 않았다면, 위험한 처지에 놓이지 않았을 것 아니냐? 만약 네가 위험에 처하지 않았다면, 네 둘째 오라버니가 너를 구하려고 시험을 포기했겠느냐? 정미, 지금도 네 잘못을 모르겠느냐?”

정미는 아름다운 긴 눈썹을 찌푸리며, 맹 노부인과 다른 사람들을 한 번 쳐다보고는 말했다.

“그럼 아버지께선 오라버니의 시험에 제가 배웅하지 않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둘째 나리는 대답할 수 없었다.

과거 시험 같은 대사에 사이좋은 형제자매가 배웅하는 일은 비난할 것이 아니었다. 배웅하지 않았어야 한다고 하면, 형제자매간의 우의를 부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배웅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군자불립어위장지하(*君子不立於危墻之下: 견식이 있는 군자는 곧 무너질 것 같은 위험한 벽 아래에 서 있지 않는다.)’라 했다. 여자아이가 배웅을 마치고 곧장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인파 속에서 무슨 재미를 보려 했던 것이냐? 넌 늘 마냥 놀고만 싶어 하는구나!”

둘째 나리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 씨를 한 번 흘겨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급계(*及笄: 여자가 시집을 갈 수 있는 나이)를 해야 할 아가씨인데, 밖으로만 나도니 정말 되먹지 못했구나!”

정미는 조용히 서서 둘째 나리의 꾸중을 들었다.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하는 쓸데없는 말은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뿐이었다.

“정미, 내 말을 듣고 있는 것이냐?”

“듣고 있습니다.”

둘째 나리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래, 네 오라버니가 이번 회시를 놓친 일은 너에게도 교훈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로는 충분치 않으니, 내일부터 비서거에만 있거라. 공부를 해도 좋고, 바느질을 해도 좋다. 그러나 어른들의 허락 없이는 밖에 나갈 수 없다!”

“아버지, 내일 저는 나가야 합니다.”

“정미, 네 아버지에 대한 태도가 그게 무엇이냐? 네 어미가 너를 너무 오랫동안 가르치지 않았나 보구나!”

줄곧 조용히 차를 마시며 아들이 손녀를 교육하는 것을 듣던 맹 노부인이 입을 열었다.

그녀가 한 씨를 바라봤다.

“내 말이 맞지? 내가 듣기로는, 네가 정미가 매일 외출하는 걸 허락했다던데?”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하면 안 되지. 내가 이 집을 몇십 년이나 관리했는데. 지금에서야 여유를 누린다고 해도 귀가 멀지도, 눈이 멀지도 않았거늘! 너희가 소란을 피워 웃음거리를 만들어오면, 상황을 수습해주고 잘 타일러주는 정도는 내가 할 수 있지. 그런데도 정미 이 사고뭉치가 소란을 피웠다 하면, 큰일로 번져 우리 회인백부의 눈앞에 있던 진사를 놓치게 할 줄은 몰랐구나!’

맹 노부인은 생각할수록 한스러워 목소리를 높였다.

“둘째야, 네가 이렇게 도량이 큰데 어찌 아이를 잘 훈계할 수 있겠느냐. 방 안에서 공부만 해서 뭐가 되겠느냐. 이렇게 하자. 내일부터 정미는 사당에서 경서를 베껴 쓰거라. 베껴 쓰고 나서 내게 가져와서 보여주고.”

맹 노부인은 이내 손주들을 둘러보았다.

“너희도 이것을 감계(*鑑戒: 지난 잘못을 거울로 삼아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경계)로 삼아야 할 것이다.”

“예, 조모님.”

정요와 다른 아이들이 대답했다.

오직 정미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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