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공주가 입을 열다
‘아혜, 다 그렸어.’
속성 부적이라 많은 절차를 생략했기에 사람이 복용하면 부작용을 야기할 수 있지만, 배우기엔 아주 편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열 번 정도의 실패 후, 정미는 속성판의 화어부를 그려내어 아혜에게 말했다.
「꽤 빨리 배웠네.」
아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럴 때마다 아혜는 속으로 조금 분개했다.
세상엔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 평소엔 멍청하고 둔해 장점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여도, 어떤 분야에선 사람들이 이를 갈며 질투할 정도의 재능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아혜가 팔찌에서 백여 년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재능을 타고난 계승자를 만나게 된 것이니, 신이 도와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됐다. 이제 내상이 있는 곳에 붙이면 돼.」
‘좋아, 내상은 어디 있어?’
「말꼬리 아래에서 대략 5촌 정도 오른쪽에 있는 엉덩이에 있어.」
아혜는 그러면서 속으론 분명 정미가 이 말에게 걷어차일 거라고 확신했다.
「빨리 해. 이따 빛이 흩어지면 또다시 그려야 된다고. 방금 배운 부적이라 익숙하지도 않은데 또 몇 번을 그려야 다시 그려낼 수 있을지 모르잖아. 여기 계속 앉아서 꼼짝도 안 하면 다른 사람들이 너를 변태로 볼 걸?」
아혜의 재촉에 정미는 이를 악물고 눈을 꼭 감고는, 가늘고 보드라운 손을 뻗어 말의 엉덩이를 만졌다.
말을 포함한 모두가 깜짝 놀랐다.
“히이잉!”
흑마가 길게 울며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이상한 여인일 줄 알았지만, 내, 내 엉덩이를 만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 걷어 차버릴 거야. 모욕을 당하느니 죽는 게 낫지! 어, 잠깐, 내가 지금 일어선 건가?’
흑마는 놀라며 의아해하다가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봤다. 그곳이 더 이상 아프지 않자, 흑마는 기쁘게 고개를 돌려 큰 얼굴을 들이대며 정미의 손을 핥았다.
이내 공주와 시녀가 깜짝 놀랐다.
‘설마 이 말이 계속 게으르게 굴고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가, 다른 사람이 엉덩이를 만져주길 바라서였나?’
그녀들은 뭔가 큰일을 발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후, 시녀는 무의식중에 이 일을 친한 마관(馬倌)에게 말해줬고, 마관은 마침 이와 같은 상황에 부닥쳐있어 똑같이 말의 엉덩이를 만져봤다. 그 결과는―
결과는 당연히 비극적이었다. 마관은 그 말에게 걷어차여 갈비뼈가 세 개나 나갔으며, 반년 동안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마관은 그 시녀와 끝장을 보려고 했으나, 시녀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아마 당신이 만진 말이 암컷이어서가 아닐까요?”
그렇게 마관은 곧바로 시녀와 절교했다!
당연히 이 일은 후일의 일이니, 지금은 굳이 더 언급하지 않겠다.
흑마가 친근하게 정미의 손을 핥자, 정미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정미는 이 흑마가 지금 감사를 표한다는 것을 알았고, 만약 피하면 흑마가 상심할 테니 피하지 않았다.
정미는 벗에겐 꽤 잘해주는 편이었다.
“아흑, 내 승마술이 좀 서투르지만, 널 타고 몇 바퀴 돌고 싶어. 그래도 될까?”
충격 속에서 마침내 정신을 차린 시녀가 몰래 웃었다.
‘이 아가씨는 정말 재밌구나. 말에게 말을 걸다니. 설마 정말로 말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다고 생각하는 건가?’
흑마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돌려 정미를 바라봤다. 누가 봐도 그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그 말은 정미에게 올라타 앉으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정미도 조금 놀랐지만, 흑마의 반짝이는 큰 눈을 잠시 마주보더니 사랑스럽게 웃었다.
“아흑, 고마워.”
정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고, 기쁘게 말 위로 올라탔다.
그러나 흑마는 생각했다.
‘계속 나를 아흑이라 부르다니, 정말 걷어차고 싶은 충동이 드는데, 어떡하지? 아니다, 자제해야 해. 우리 말들은 은혜를 보답할 줄 아는 동물이니까.’
공주와 시녀는 서로를 마주보며 턱이 빠질 지경이었다.
“공주 전하, 먼저 가보겠습니다.”
정미는 공주에게 읍을 하고 말의 배를 가볍게 찼다.
그러자 흑마는 화살처럼 빠르게 달려나갔다.
연무장은 거대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야외는 아니었기에 타원형의 모양을 하고 있었고, 몇몇 곳은 많이 굽어져 있어 승마술이 평범한 사람은 그곳을 돌 때 조금 위험했다.
정미의 승마술은 평범했기에, 원래라면 무서워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흑마의 등 위에 앉아서 그의 갈기를 잡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주 편했다.
귓가에는 바람소리가 휙휙 들려왔고, 2월의 봄은 아직 추워서 찬바람이 옷깃 속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한 바퀴 한 바퀴 달릴 때마다 온몸이 점점 달아올랐고, 이마와 등엔 땀까지 날 정도였다. 온몸의 땀구멍이 열린 듯, 숨을 쉬면 가슴속에서부터 상쾌한 느낌이 느껴졌다.
이때, 정미는 아혜의 말을 믿게 되었다.
‘세상 만물에게는 모두 영(靈)이 있구나. 진심으로 만물을 대하면 만물도 나에게 보답해주는 건가 봐. 예를 들어 지금, 내 승마술은 분명 서투르기에 이렇게 위험한 길에선 원래 내동댕이쳐졌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흑마가 절대 나를 떨어지게 두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
그녀는 마치 말의 등에 뿌리를 내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느낌은 흑마가 내게 전해주는 거야.’
정미는 마침내 깨달았다.
‘이런 느낌이 바로 신뢰라는 것이구나.’
정미는 아까 공주가 했던 것처럼 아슬아슬하고 화려한 동작을 하지는 않았다. 자신은 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흑마가 점점 속도를 늦추더니 덕소 장공주 앞에 멈췄고, 정미가 말에서 내렸다.
“장공주를 뵙습니다.”
덕소 장공주는 이미 시녀에게서 방금 마구간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들은 바였고, 아까보다 더욱 진지하게 정미를 쳐다봤다.
정미가 다가오자 덕소 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구나. 규수에게 이 정도의 승마술이 있는 것도 드문 일인데.”
정미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신녀의 승마술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저와 아흑이 잘 맞아서 그렇습니다. 만약 다른 말이었다면 이렇게 타지 못했을 겁니다.”
덕소 장공주는 이 겸손하고 우쭐대지 않는 아가씨가 더욱 마음에 들었고, 역시 청겸의 여동생이라 그런지 뭔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이 아름다운 소녀를 처음 봤을 때부터 묻고 싶었던 말을 했다.
“면면과 함께 나에게 무술을 배우고 싶지 않느냐?”
“저요?”
정미가 깜짝 놀랐고, 덕소 장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열서너 살의 소녀가 벌써 이 정도의 미모인데, 몇 년 뒤에 얼굴이 다 피게 되었을 때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부유한 집안의 딸들에겐 여종과 파자(*婆子: 나이 많은 여종)들이 따라다니지만, 어떨 때는 그들을 의지하는 것보단 차라리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 나았다.
장공주는 정미를 처음 만났을 때, 예전에 수도 제일 미녀였던 위국공부의 요절한 둘째 아가씨를 떠올렸다. 그리고 정미가 정철의 여동생임을 알고는 나중에 안 좋은 일을 당할까 걱정이 되었고, 무술을 가르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미에게 말을 타보게 한 것이었다.
정미가 만약 여리고 귀엽기만 한 소녀였다면, 아무것도 도울 수 없었을 것이다.
정미가 어릴 때, 외조부와 외숙부들에게 달라붙어 권법을 가르쳐달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외조모께서 화를 낸 탓에 아무도 가르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정미는 외조모의 총애를 이용해 애원해보기도 했지만, 늘 자신을 아껴주던 외조모는 무술을 배우는 데에 있어선 전혀 허락해주지 않았다.
나중에 큰언니가 몰래 정미에게 알려주기를, 외조모에겐 두 딸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성정이 시원스러워서 자신이 직접 남편을 골랐지만, 뜻처럼 잘살고 있지 못하고, 작은이모는 답청을 가서는 악운을 만났는데, 하필 그 닭 한 마리 잡을 힘도 없는 아가씨들만 살아남게 되었기에, 외조모는 손녀와 외손녀들이 무술을 배우는 걸 원치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천성은 바꾸기 어렵다고, 정미는 권법을 배우는 시간이 나무 아래서 바느질을 하는 시간보다 더욱 많았다.
“당연히 배우고 싶습니다. 하지만 신녀는 매일 오전에 저희 집안의 의관에 가서 셋째 숙부님께 의학에 대해 배워야 합니다.”
정미가 진심으로 기뻐하면서도 유감스러워하자, 덕소 장공주가 웃었다.
“그렇다면 매일 오후에 오거라. 면면과 함께 승마와 활 쏘는 법을 배우자꾸나. 무술은 재능이 필요한 일인데, 면면은 재능을 타고 났단다. 너는 면면과 다르니, 이 나이에 권법을 배우기엔 조금 늦구나.”
정미는 조금 의심스러웠다.
‘내가 예뻐지면서 운도 좋아진 건가? 어찌 방금 만난 사이인데, 덕소 장공주께서 먼저 승마와 활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시지?’
덕소 장공주의 젊은 시절 위대한 공적은 정미도 아주 잘 아는 것이었다.
“어때, 배우고 싶느냐?”
“신녀, 배우고 싶습니다.”
정미는 참지 못하고 함박웃음을 지어보였다.
‘역시 아직은 어린 아가씨구나.’
덕소 장공주가 미소를 지었다.
“너는 청겸의 셋째 여동생이지?”
“예, 신녀의 이름은 ‘미’라고 합니다.”
“정미?”
덕소 장공주가 정미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언대의(微言大義), 도심유미(道心惟微)이지. 좋은 이름이다.” (*미언대의: 대의란 큰 뜻으로서, 인간의 계산된 노력이나 행위로는 결코 이루지 못하는 커다란 뜻)(*도심유미: 《심경》의 구절 중 하나로, 도의 마음은 미약하다는 뜻)
“장공주의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정미는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 ‘미’ 자는 그런 의미가 아닌데.’
이 이름은 당시 어머니께서 아무렇게나 지은 이름으로, 그저 조용한 곳에 숨어서 눈에 덜 거슬리라는 뜻일 뿐이었다.
“앞으로 나에게 승마와 활을 배워야 하니, 더는 이렇게 겸손하게 굴지 말거라. 나는 네 사부도 되지 않는다. 그저 내게 고모라 부르거라.”
태자비를 생각하면, 정미는 장공주에게 고모라고 부를 수도 있었다.
정미가 순순히 대답했다.
“고모님,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덕소 장공주가 웃으며 면면 공주에게 말했다.
“면면, 앞으로 너희가 같이 배우게 되었으니, 정미를 데리고 이곳을 익히게 해주거라.”
공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뻗어 정미를 잡아당겼다.
정미는 공주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가며 조금 묘한 기분을 느꼈다.
‘우린 전혀 모르는 사이인걸, 게다가 공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잖아.’
사색에 잠겨있을 때, 공주가 갑자기 멈춰서서 고개를 들고 정미를 바라봤다.
“방금, 어떻게 한 거야?”
면면 공주가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렸다.
사과 같은 얼굴의 두 뺨엔 선천적인 홍조가 있었고, 말할 때 웃지 않아도 사랑스러운 보조개가 드러났다.
정미는 이 공주가 왜 말하는 걸 싫어하는지 왠지 알 것 같았다.
‘공주에게 검누런 이빨이 있었구나.’
정미는 공주의 끈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그저 이빨이 누런 것 때문에 입을 꾹 닫고 있진 않았을 것이다.
‘예전의 내 모습이 그랬다면 밖에 나가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됐을 텐데.’
“공주께서는 방금 그 흑마를 여쭈시는 겁니까?”
공주는 말을 마치고 곧바로 고개를 돌렸지만, 곁눈질로 계속 정미를 신경쓰고 있었다. 정미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마음이 조금 편안해져 다시 고개를 돌리고 끄덕였다.
아마 방금의 질문이 공주의 한계점인 듯했다.
“저는 그 말을 친우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그 말도 그걸 느끼고 제게 다정하게 대해주었지요.”
공주는 눈을 크게 떴다. 속눈썹이 반짝였고, 만족스럽지 않은 듯 입술을 깨물었다.
‘거짓말. 엉덩이를 만졌는데, 친우라는 이유로 화내지 않는다고? 만약 내 친우가 나의 엉덩이를 만지면, 아무리 친한 친우라도 화낼 텐데!’
공주는 말수가 적은 탓인지, 큰 눈만 봐도 어떤 감정인지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정미는 그녀의 눈빛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피식 웃었다.
“사실 그 말의 둔부에 내상이 있었습니다. 방금 저는 엉덩이를 만진 게 아니라, 내상을 치료해 준거랍니다. 제가 치료해줬으니, 그 말도 당연히 제게 잘 대해줬겠지요.”
공주의 눈에 당혹스러움이 스치더니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어떻게 치료했어?”
공주는 사람들과 얘기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듯, 말을 마치고는 입을 꾹 다물고 불편한 기색이었다.
“공주 전하께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저희 정가의 조상은 부의였답니다. 그리고 제가 마침 부의를 배우고 있지요. 방금 흑마에게 내상을 치료해줄 때 바로 부의의 방법을 썼습니다. 하지만 너무 복잡해서 설명해드리기는 어렵네요.”
공주는 알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고, 더는 묻지 않고 손을 뻗어 정미를 잡아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