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100화 (100/375)

100화. 내상(內傷)

“스승님…….”

정철이 어이없다는 듯 부르자, 고 선생이 정철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아하니 이 세 가지 상황 모두 아닌가 보군? 그럼 이 스승도 무슨 이유인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구나. 오, 설마 그 여인이 사내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냐?”

고 선생은 이것은 도와줄 수 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정철이 이마를 짚었다.

“스승님, 제자를 놀리지 마세요.”

“그럼 도대체 무슨 일이냐. 말해 보거라. 네가 말해주면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을 것 아니냐.”

고 선생이 한숨을 쉬었다.

‘이 제자 녀석은 왜 이렇게 마음을 무겁게 먹는 건지!’

정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스승님, 이번 일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더 이상 묻지 마세요. 제자는 그저 문무에 열중하여 나중에 관리 혹은 백성들의 시름을 덜어주거나, 국토를 지키고 싶습니다. 다른 남동생들의 나이가 아직 어리니, 혼인은 최대한 미루고 싶습니다. 나중에 남동생들이 혼사를 논할 나이가 되면 집안 어른들이 제게 아무렇게나 적당한 혼사를 정해주시면 됩니다.”

“황당하구나!”

고 선생이 탁자를 내리쳤다.

“아무렇게나 혼사를 정해주다니, 네 마음속에 그 여인이 없는데 어찌 즐겁게 그녀와 잘 지낼 수 있겠느냐?”

정철이 옅게 웃었다.

“당연히 미래의 부인에게 잘해줄 것입니다. 이 세상에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경우는 드물고, 손님을 대하듯 서로를 존경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까. 제자는 미래의 부인을 존경하고 잘 보살필 것입니다.”

고 선생은 그를 한참 쳐다보다가 탄식했다.

“알겠다. 만약 네 아래에 형제가 없었다면, 평생 장가가지 않았을 테지?”

“그랬다면 더욱 마음대로 하지 못했을 겁니다. 적자로서 대를 이을 책임이 있으니까요.”

고 선생이 깊게 한숨 쉬었다.

“어리석은 것!”

“스승님, 제자와 다시 한 판 두시지요.”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 정자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제의 널찍한 옷자락이 바람에 나부껴 펄럭였고, 바둑돌이 뒤섞여 떨어져 낭랑한 소리를 냈다.

통통한 백조가 물 밖으로 헤엄쳐 올라왔고, 호기심 가득한 듯 다가와서는 잠시 멈춰서더니, 다시 팔자걸음으로 뒤뚱뒤뚱 호수로 걸어 들어가 멀리 헤엄쳐갔다.

* * *

정미는 시녀와 함께 연무장으로 가고 있었다.

덕소 장공주부의 연무장은 아주 넓어서 말이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 마침 검은 옷을 입은 소녀가 말을 타고 달리고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정미가 멀리 내다보자, 그 소녀는 갑자기 말 위에 일어서서 달렸고, 말 위에서 공중회전을 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차분하게 말 등으로 착지한 후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고 말채찍을 휘둘렀다.

정미는 가슴이 벅차올라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그 소녀의 모습을 자세히 보려 했다.

소녀가 점점 다가오자, 정미는 깜짝 놀랐다. 그 소녀는 정미가 아는 사람으로, 현 황제의 다섯째 딸 면면(綿綿) 공주였던 것이다.

면면 공주는 대외적으로 과묵한 이미지였고, 올해 열네 살이 되었지만 아직도 봉호를 받지 못했다.

공주는 빠르게 다가왔지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지나가 수십 장을 다시 달려나간 뒤 갑자기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준마(駿馬)의 앞발이 높게 올라갔고 긴 울음소리가 들린 뒤, 공주가 말에서 내려 중년 부인의 곁으로 갔다.

정미는 걸음을 재촉하여 두 사람 근처로 갔다.

정미를 데려다준 시녀가 다가가 인사했다.

“장공주, 청겸 공자께서 여동생분을 데리고 오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제게 정가의 셋째 아가씨를 모시고 와 만나 뵙도록 하게 하셨습니다.”

덕소 장공주가 이쪽을 바라봤다.

그녀는 키가 크고 늘씬했으며, 마흔이 넘은 나이였지만 풍채가 여전히 출중하여 겉으로 봐서는 여장군을 맡았던 인물임을 알아볼 수 없었다. 복숭아와 오얏꽃처럼 아름다웠으며 고귀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신녀(臣女)가 덕소 장공주와 다섯째 공주를 뵙습니다.”

검은색 승마복을 입은 다섯째 공주는, 숨을 살짝 헐떡이며 아무 말 없이 정미를 살펴봤다.

덕소 장공주가 정미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리 오거라.”

정미는 황가의 귀족을 만나든, 평범한 백성을 만나든, 편한 마음을 가지곤 했다. 이것은 정미의 장점이기도 했다.

정미는 덕소 장공주의 앞으로 가 침착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여 예의를 갖췄다.

덕소 장공주는 잠시 정미를 자세히 훑어보다가 대뜸 물었다.

“말을 탈 줄 아느냐?”

정미는 조금 당황했지만 곧바로 대답했다.

“압니다.”

“면면, 가서 정가의 셋째 아가씨께 말을 하나 골라드리거라.”

면면 공주는 정미를 데리고 마구간으로 가 마음대로 고르라는 듯한 손짓을 했다.

면면 공주는 말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특징이었기에 정미는 신경 쓰지 않고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는 말들을 살펴보았다.

정미는 말을 탈 줄은 알았지만, 면면 공주 앞에서 큰 창피를 당할 순 없으니 좋은 말을 고르는 것이 중요했다.

그녀는 말을 한 마리씩 살펴보다가 누워있는 흑마에 시선이 꽂혔다.

그 말은 몸 전체가 검고 윤기가 흘렀다. 오직 네 발만이 하얀색이었고, 누워있어도 건장한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정미가 쳐다보자, 그 말은 총명한 눈빛으로 시선을 마주하며 큰 눈을 반짝였다.

정미는 저도 모르게 앞으로 한 발짝 다가갔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 그녀를 잡아당겨 고개를 돌려보니 면면 공주가 고개를 저어보였다.

두 사람을 모시러 온 시녀가 웃으며 설명했다.

“정가의 셋째 아가씨, 이 말은 얼마 전 뒷다리를 다쳤는데, 다 나은 뒤로 이상하게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한번 보지.”

정미는 말하면서 머릿속으로 아혜와 대화를 나누었다.

‘아혜, 이 말의 뒷다리는 나은 것 같은데, 다른 곳에 내상이 있는 거야?’

정미는 말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방금 마구간에 도착했을 때 아혜의 박학다식함이 떠올라 머릿속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뜻밖에도 아혜가 곧바로 흥분하며 끊임없이 말을 쏟아냈고 나중엔 정미의 눈을 빌려 보려고까지 했다.

정미가 이 흑마를 봤을 때, 아혜가 ‘멈춰’라고 크게 외치며 이 말이라고 감격하며 알려준 바였다.

아혜는 정미의 승마술은 평범하니 이따 창피를 당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경험이 많은 말을 골라야 한다고 했다. 게다가 이 말은 내상이 있으니, 내상을 치료해주면 서로 마음이 통하여 잘 맞을 수 있다고 했다.

정미가 그 말에게로 다가가려고 하자 또 옷깃을 붙잡혔다.

“공주 전하?”

면면 공주가 고개를 저었다.

정미는 어이가 없었다.

‘공주가 벙어리라고 들은 적은 없는데, 왜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 거지?’

그 시녀가 또다시 설명했다.

“아가씨, 이 말이 움직이지 않는 것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성정도 사나운걸요. 공주 전하께선 이 말이 아가씨를 해칠까 걱정하시는 겁니다.”

“괜찮습니다. 공주 전하, 제게 방법이 있으니 저를 놓아주세요.”

정미가 웃으며 면면 공주에게 말했다.

머릿속에선 아혜에게 다시 확답을 받았다.

‘들었지? 말이 사납대. 내가 가까이 다가갔을 때 나를 걷어차지 않을 거라고 확신해?’

「확신해. 최대한 선한 태도로 다가가면 아무리 사나운 말이라도 일부러 사람을 해치지 않을 거야. 미친 말도 아닌데.」

정미는 어떤 방면에선 아혜를 믿는 편이었다. 예를 들어 지금처럼, 정미가 말에 차여 죽는다면 아혜에게도 좋은 점이 하나도 없을 때 같은 경우였다.

면면 공주의 검은 눈동자가 정미를 빤히 쳐다보았고, 정미가 입장을 고수하자 조금 내키지 않는 듯 옷깃을 놓았다.

정미는 빙그레 웃고는 그 말에게로 몸을 돌렸고, 조용히 숨을 들이쉬고 용기를 내어 다가갔다.

‘최대한 선한 태도를 보이자.’

정미는 아혜의 말을 떠올리며 맑고 반짝이는 눈동자로 흑마를 마주했고 웃음기를 띠었다.

둘째 오라버니가 저절로 떠올랐다.

‘이 말이 오라버니라고 생각하면, 충분히 선하게 보일 수 있어.’

흑마는 깜짝 놀랐다. 만약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어서 누구라도 와 봐. 어떤 여인이 나를 쳐다보는데, 눈빛이 심상치 않아. 분명 모르는 사람인데, 나를 아주 익숙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다고!’

정미가 숨을 멈칫했다.

‘……저건 무슨 표정이지?’

정미는 오랫동안 망진을 본 덕분에 다른 이들의 미세한 표정 변화도 관찰해낼 수 있었다. 이 말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긴 하지만, 결국엔 마찬가지로 얼굴이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망진을 하게 되었다.

정미가 조마조마한 가슴을 안고 더 가까이 다가갔다. 혹시나 이 이상한 표정의 말이 갑자기 자신을 걷어찰까 겁이 났다.

아혜가 언짢은 듯 말했다.

「말을 믿어야지. 겉으로만 괜찮은 척 해선 안 돼. 속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이어야 한다고! 만물에게는 모두 영성(靈性)이 있어. 네가 부적을 만드는 데 어느 정도 수준에 다다르면 생명들과 부적을 통해 소통할 수 있다고. 부의의 열세 가지 과목 중 ‘서금과(書禁科)’가 바로 사악함을 물리치고 악귀를 내쫓는 거야.」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정미는 진심으로 배우고 싶었다.

「마음속에서부터 그 말을 너와 동등한 생명체라고 여겨야 해. 그 말을 타고 싶으면, 그 말의 도움이 필요하지. 그저 말이라고 무조건 너를 태워줘야 하는 건 아니잖아. 알겠어?」

‘응, 조금 알 것 같아.’

아혜의 말에 정미가 조금 밝아졌다.

정미는 말을 마주 보며 마음을 천천히 가다듬었다.

‘이 말을 오라버니나 벗으로 여기진 못하지만, 처음 만나 많은 걸 알지 못해도 옛 친우와 같이 친해진 친우처럼 여길 수는 있어.’

정미는 조청공이 떠올랐다.

‘좋아, 말의 표정이 다시 돌아왔어.’

아혜의 말이 정말 효과가 있자, 정미는 경계심을 내려놓고 말에게 온화하게 웃어보였다.

“아흑(阿黑), 날 걷어차지 마. 네 상처를 봐줄게.”

흑마가 생각했다.

‘원래는 차고 싶은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은 몹시 걷어차고 싶네. 어떡하지? 둘도 없이 건장한 준마인 나에게 어찌 아흑이라 부를 수 있는 건지!’

정미가 쭈그려 앉아서 손을 뻗어 말의 뒷다리를 만졌다.

말의 장딴지에 딱지가 앉아있었고, 튼튼하고 부드러운 것으로 보아 다 나은 것 같았다.

‘아혜, 내상이 어디 있어? 내가 할 줄 아는 지혈생기부와 지통부 모두 알맞지 않은 것 같은데.’

이런 내상을 고치는 데는 상절과(傷折科)의 부적을 써야 했다.

「내상이 어딨는지 신경쓰지 마. 이 내상은 상절과의 화어부(化瘀符)를 써야 해. 화어부는 하루 이틀 만에 배울 수 없지만, 사람을 치료하는 게 아니라 말을 치료하는 거니까 속성방법을 알려줄게. 사람에게 쓰면 부작용이 커서 쓰면 안 되는데, 말에게 쓰는 거니 문제가 되지 않을 거야.」

‘속성? 설마 지금 바로 쓰라는 거야?’

「안 될 게 뭐 있어? 주사랑 다른 물건을 늘 몸에 지니고 있는 거 아냐? 기를 넣어서 물을 만들 필요도 없어. 허공에 부적을 그리고 응집한 부적의 빛을 말의 내상 쪽에 붙이면 돼.」

‘좋아, 배울게.’

아혜가 정미의 머릿속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정미는 흑마의 뒷다리 쪽에 쭈그려 앉았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소매에 넣었던 손을 빼내, 몰래 아혜의 설명을 따라 부적을 그렸다.

공주는 정미 뒤의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시녀는 공주의 뒤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정미가 말의 뒷다리 쪽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는 모습이 무슨 의미인지 전혀 알 수 없었고, 그저 정가의 셋째 아가씨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설마 거기 쭈그려 앉아서 흑마의 다쳤던 다리를 보기만 하는 것으로 말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만약 보기만 하는 것으로도 이 흑마의 게으른 성정을 고칠 수 있다면, 말을 훈련하는 사람이 왜 필요하겠어!’

공주와 시녀의 신분은 하늘과 땅 차이였지만, 지금 이 순간엔 마음이 서로 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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