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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99화 (99/375)

99화. 좋아하는 사람

장공주부는 주작항(朱雀巷)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청기와와 붉은 처마로 웅장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정미가 장공주부에 들리게 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 왔을 땐 정철이 고 선생을 스승으로 모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정미는 정동과 사소한 일로 다투고, 아버지는 다짜고짜 정미를 꾸짖었고, 조모님의 귀에까지 들어가 조모님은 사당에 무릎 꿇고 있으라 벌했다.

당시 정미는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때였다. 방석이 있더라도 사흘간 무릎을 꿇고 나니 무릎이 퉁퉁 부어올라 있었고, 보름 후에야 푸른 기가 사라졌다.

멀쩡히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정미의 둘째 오라버니가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조금 흐릿해진 기억 속에서, 정미는 고 선생의 신선 같은 풍채와 덕소 장공주의 긴 눈썹과 눈, 그리고 침착한 위엄만 떠올랐다. 그 신선 같은 부부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했었는지는 이미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마도 많은 말을 듣지는 않았으리라.

장공주부에서 돌아간 뒤론 어른들의 꾸중은 여전히 자주 있었지만, 사당에 가서 무릎을 꿇고 있으라는 벌은 다신 없었다.

정미는 고개를 돌려 눈을 들고 정철을 바라봤다.

‘그때의 오라버니는 지금처럼 크지 않았는데. 이 세상에서 오라버니보다 더 우수한 사람은 없을 거야. 오라버니는 무슨 일이든 항상 여유롭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 같아. 아, 아니다, 또 하나 더 있지.’

정미는 정요를 떠올렸다.

지금은 뼈에 사무칠 정도로 정요를 미워했지만, 정요가 훌륭한 사람임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정요는 금기서화를 선생이 없이도 스스로 터득했으며, 운문(韻文)으로 말하자면 더욱 뛰어났다. 게다가 자수까지 출류발췌(*出類拔萃: 무리 가운데 특출나게 뛰어난 사람)하며, 세상 물정에 대한 처세술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물론 예전의 부러움과 남들이 알지 못하던 질투심은, 지금은 모두 무시로 뒤바뀌어 있었다.

‘내가 최소한 한 가지는 정요보다 뛰어나지. 언제 어디서든 평탄하게 지내는 것.’

“미미, 긴장하지 마.”

정철이 고개를 돌려 웃음을 지었다.

“스승님과 장공주께서는 모두 아주 좋은 분이셔. 특히 장공주께서는 최근 아랫사람들에게 더욱 너그러워지셨거든.”

덕소 장공주는 현 황제의 친동생이며, 젊었을 때 군대를 통솔한 뛰어난 여장군이었다. 이후 황제를 구하다가 몸을 다쳤고, 어의의 진단으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했다.

덕소 장공주는 서른 살까지 혼자 지내다가, 자신에게 포기하지 않고 계속 구애하던 명사(名士) 고백안(顧白安)과 마침내 부부가 되었다.

이 두 사람은 사람들이 가장 동경하는 부부였다.

하지만 아름다운 옥의 작은 흠집처럼, 평생 그들 사이에 아이가 없을 것이라는 점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푸른 물결이 이는 호숫가에 있는 육각 정자에서 마침내 고 선생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고 선생은 홀로 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왼손과 오른손으로 대치하며 재미를 보는 중이었다. 그러다 인기척이 들리자 고개를 들고 손을 흔들었다.

“청겸(淸謙), 와서 이 스승과 바둑을 두자꾸나.”

청겸은 고 선생이 미리 정철에게 지어준 자(字)였다.

정철, 정청겸.

정철은 다가가서 고 선생의 맞은편에 앉아 검은 돌을 한 곳에 두었다.

고 선생은 제자를 한 번 쳐다보고는 망설임 없이 흰 돌을 내려놓았다.

두 사제는 속기(*速棋: 짧은 시간에 하는 바둑의 대국)를 두었다. 정미는 바둑 솜씨가 좋지 않아 옆에서 쳐다보니 눈이 어지러워 몰래 오라버니의 얼굴을 살폈다. 정철의 미간은 편안하면서도 여유롭고 즐거워 보였다. 하지만 매번 정미와 바둑을 둘 때는 눈썹을 찌푸리고 수심에 가득 찬 얼굴을 했던 것이 떠오르자 조금 마음이 불편했다.

‘오라버니를 서툰 바둑으로 괴롭힌 건 절대 고의가 아니야!’

향 하나가 다 피워질 만큼의 시간이 지났을 때, 두 사제는 바둑 한 판을 다 둘 수 있었다. 고 선생은 바둑알을 하나씩 황단목으로 만든 바둑통에 넣으며 웃었다.

“시험을 보러 가지 않았다고?”

“가지 않았습니다.”

정철이 일어나서 그제야 용서를 빌었다.

“제자가 스승님께 실망을 안겨드렸습니다.”

고 선생이 눈을 들고 웃었다.

“청겸, 이건 용서를 구하는 태도가 아니지 않느냐.”

정철이 따라 웃었다.

“그럼 스승님께서 제자를 혼내는 태도를 꾸며내셔야겠습니다. 게다가, 스승님도 원치 않으신데 제자가 어찌 스승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고 선생이 크게 웃었다.

“마음이 아프진 않다. 답답한 건 사실이지.”

그리고 정철의 옆에 서 있는 소녀를 한 번 쳐다보고는 물었다.

“여기는……, 네 셋째 여동생이냐?”

“스승님께서 기억력이 좋으십니다.”

정철이 정미를 잡아당겼다.

“처음 이 아이를 데리고 온 게 벌써 6년 전이네요.”

정미가 무릎을 살짝 굽히고 인사했다.

“선생님을 뵙습니다.”

“그리 예를 갖출 필요 없다.”

고 선생이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우고는 웃었다.

“바둑 구경이 재미없었지?”

“아닙니다. 많은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정미는 오라버니를 슬쩍 보고는 고 선생에게 알렸다.

“저도 바둑을 좋아해서, 자주 오라버니에게 같이 두어달라 하곤 합니다.”

“그러냐?”

고 선생이 웃었다.

“아가씨의 바둑 솜씨가 꽤 괜찮은가 보군.”

그러고는 바둑판을 한 번 쳤다.

“한 판 둘 텐가?”

정미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철은 손으로 입술을 가리고 가볍게 기침했다.

“스승님, 제 동생의 바둑 솜씨는 사모님과 비슷하니, 제가 생각하기엔 사모님과 두는 것이 더 재밌을 것 같습니다.”

고 선생은 매번 몇 수 두자마자 다음 수를 생각하지 못해 바둑판을 뒤집던 아내를 떠올렸고, 표정이 살짝 틀어지더니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렇군. 장공주가 연무장에 있으니, 시녀에게 데려다 달라 하겠네. 오늘 마침 다른 아가씨도 한 명 있어서 말이야.”

정미는 정철을 흘끗 보고는 고 선생에게 인사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시녀가 정미를 데리고 멀리 갔을 때, 고 선생은 그제야 정철에게 물었다.

“청겸이 시험을 보러 가지 않은 것은, 네 셋째 여동생과 관련이 있는 일이냐?”

정철은 고 선생이 속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당시의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고 선생은 제자를 놀렸다.

“어쩐지 홀가분한 모습이더니, 후회가 없는 모양이로구나.”

정철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훌륭한 스승에게서 훌륭한 제자가 나오는 법이었다. 고 선생은 정철의 스승으로서 명리에 욕심은 없었지만, 그래도 제자가 순조롭게 앞으로 나아가길 바랐다.

어쨌든 정철은 스승에게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고 선생이 눈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청겸, 한 달이 더 지나면 가관을 해야 하는데, 집안의 어른들이 네 혼사를 얘기하더냐?”

고 선생은 세속에 구애받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제자의 혼사에 대해선 그리 많이 묻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정철 같은 훌륭한 인재는 회시를 치고 나면 좋은 여인이 적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회시를 놓친 건 사실 예상 밖의 일이었다. 하필 이 결정적인 시기에 관례를 치러야 하니, 혼사에도 영향이 있을 터였다.

“어르신들께서는 아직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맹 노부인은 계산에 능한 사람이었다. 원래 손에 넣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공사인데, 회시를 치기도 전에 혼사에 대해 정해놓았을 리 없었다.

‘어머니는 내게 물어보신 적 있지만, 너무 일찍 혼인하고 싶지 않다고 말씀드린 뒤론 다신 언급하시지 않았지.’

한 씨는 자식들의 혼사에 있어선 특히나 너그러웠다.

“가관한 뒤엔 혼사를 얘기해야 할 것이다. 자네에게 무슨 생각이 있으면 이 스승에게 말해 보거라. 얌전한 숙녀를 좋아하느냐, 아니면 활발한 미인을 좋아하느냐? 장공주에게 말해 적당한 여인이 있으면 스승이 중매인이 되어주마.”

“스승님.”

은사가 자신의 혼사를 얘기하자 정철의 기분이 편치 않았다.

고 선생이 고개를 저었다.

“청겸, 넌 다른 건 다 좋은데 마음을 너무 깊게 숨기곤 한다. 혼인 대사는 부모와 중매인이 결정하는 일이니, 네가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나중에 혼사가 정해졌을 때 후회하지 않겠느냐? 그럼 스승이 네게 회초리를 들어야 할지도 모르지.”

정철은 두 손을 드리우고 공손히 서서 깊은 눈으로 한참을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스승님. 사실, 제자에겐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음?”

정철의 말은 고 선생의 예상을 크게 빗나갔다.

제자는 늘 여유로운 모습이었고 마음에 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혼인 시기가 가까워질수록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청년은 마음에 둔 여인이 이미 혼사가 정해졌을 때를 제외하곤 긴장하고 애타게 걱정하여 티가 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의 제자는 마음의 문이 닫혀 조금의 연정도 품고 있지 않은 느낌을 주곤 했다.

“청겸, 앉아서 말해 보거라.”

고 선생이 몸을 앞으로 기울여 제자의 옥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봤다.

“어느 집안의 아가씨인가?”

정철은 침묵했다.

그러자 고 선생이 눈썹을 치켜떴다.

“청겸, 그 여인의 신분과 출신이 너와 그리 맞지 않는 것이냐? 그런 거라면 나중에 기회를 봐서 네 사모에게 그 아이를 수양딸로 삼으라고 하겠다. 어떠하냐?”

고 선생은 자신의 제자를 잘 알았다.

‘제자의 마음을 움직인 여인이라면 분명 품행이 단정하고 선한 아가씨겠지.’

정철은 눈을 내리깐 채 긴 속눈썹으로 눈에 드러나는 감정을 숨겼고 눈가엔 그림자가 드리웠다.

“스승님,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와 그 여인은 이번 생엔 인연이 없습니다.”

제비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이며 지나가다가, 정자 모퉁이의 처마에 내려앉았다. 그 제비는 원래 그곳에 있던 다른 제비와 나란히 서서 서로 정답게 지지배배 지저귀었다.

호숫가에 푸른 물결이 일었다. 늘어진 버드나무는 천천히 흔들리며 어느새 신록이 돋아나고 있었다.

‘중춘(仲春)이 끝나가는구나.’

고 선생은 순간 제자에게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쓸쓸함을 느꼈지만, 정철은 아주 빠르게 그 기분을 거두었다.

제자는 태연하고 차분한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고 선생은 갑자기 마음이 아파 와, 똑바로 앉아서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젊은 녀석이 뭐 그리 김빠지는 소리를 하느냐. 나 고백안의 제자답지 않구나. 네 사모도 예전엔 시집을 가지 않으려 했고, 장공주의 위엄 때문에 아무도 거스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네 사부는 꼬박 8년을 기다려서 네 사모와 부부가 될 수 있었지.

봐라, 이 세상에 이어지지 않을 인연은 없다. 굳건한 마음이 없을 뿐이지. 만약 네가 평범한 집안의 공자였다면 내가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있지 않느냐? 청겸, 어느 집안의 아가씨인지 말해 보거라. 너희가 왜 이번 생에 인연이 없다는지 알고 싶구나.”

“스승님의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와 그 사람은 정말로 가능성이 없습니다. 저 또한 그 사람과 부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이 어리석은 녀석아. 그럼 왜 가능성이 없는지 말해 보거라. 그 여인의 신분에 문제가 있는 것이냐? 혹은 마음에 다른 사람을 품고 있는 것이냐? 아니면,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된 것이야?”

제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고 선생은 더욱 안타까웠다.

“만약 신분의 문제라면, 그 아가씨가 괜찮은 사람이기만 하면 된다. 높은 가문의 귀녀든, 시골의 아가씨든, 나 고백안의 제자가 마음에 품은 아가씨조차 얻지 못한다면 스승으로서의 면목이 없겠지. 만약 그 아가씨가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라면, 그건 더 쉽다. 스승으로서 네게 체면을 내려놓고 열심히 그 여인을 쫓을 수 있게 허락하겠다. 남은 생에 후회가 남지 않도록!”

고 선생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호숫가의 백조를 쳐다보며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만약 그 여인이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다면, 그건 조금 어렵겠구나. 그저 하늘이 네 편을 들어주는지 봐야겠지. 만약 그 여인의 부군이 명이 짧다면 더는 망설이지 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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