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숨어서 욕하다
“저리 비켜!”
정철이 손을 뻗어 앞을 막자, 그 사내가 크게 노했다.
“어이, 기생오라비. 경고하지. 잘생겼다고 내가 널 때리지 않을 거라 생각 마라!”
그는 능남(陵南)에서 왔으며, 능남은 남란국(南蘭國)과 인접했다. 남란의 풍습에 영향을 받아 그곳의 젊은 여인들은 잘생긴 도련님들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그런 젊은 여인들을 희롱하는 색마들에게 주먹을 날린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러나 그가 구해준 여인들은 도리어 그를 욕하곤 했다. 때문에 그는 불의를 지나치지 않는 영웅으로 살기는 정말 힘들다는 생각도 자주 했다.
그 이후로 그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여동생의 일이라면, 도무지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동생은 최소한 그가 색마들을 때려서 쫓아낼 땐 그를 욕하지 않았다.
‘그저 나와 싸울 뿐이었지!’
정철은 ‘기생오라비’라는 말에 더는 참을 수 없었고, 길가의 마른 나뭇가지를 힘껏 차 손에 들었다. 나뭇가지를 창으로 삼아 손목을 휘두르며, 눈 깜짝할 새 나뭇가지를 사내의 목에 겨누었다.
정철이 차갑게 웃었다.
“형씨, ‘기생오라비’라는 말을 돌려주겠소!”
“너, 너, 너……!”
늘 무력으로 일을 해결해왔던 사내는, 나뭇가지 하나로 위협을 당하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고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정미가 비웃었다.
“‘너’는 무슨 ‘너’? 설마 네가 좀 우람하게 생겼다고 힘도 더 좋을 줄 안 거야? 우습구나. 외모만 보는 세상도 아니거늘!”
“동생아, 오라버니가 매번 네 사랑의 도피를 막긴 했지만, 지금 이 녀석이 오라버니의 목숨도 앗아갈 판인데 기름을 부으면 안 되지!”
이때, 소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넷째 오라버니―”
새가 놀라 날아가자, 나무에서 열여덟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노란색 옷의 소녀가 뛰어내렸다.
소녀는 키가 꽤 컸고 몸집만 보면 정미와 비슷했는데, 둥근 눈과 복숭아 같은 뺨을 가져 아주 아름다웠다.
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넷째 오라버니, 사람을 잘못 봤잖아!”
사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소녀를 보다가, 또 정미를 바라봤고, 손가락을 뻗어 가리켰다.
“그, 그럼 저 사람이 왜 네 유모를 쓰고 있는 거야? 네 것도 위에 매가 한 쌍 수놓아져 있잖아.”
정미는 정철의 곁에 서서 그를 몰래 꼬집었다.
‘함부로 물건을 주워서 성가신 일이 생겼잖아. 오라버니도 못 미더운 구석이 있었구나!’
정철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태연한 얼굴로 침착하게 나뭇가지를 내려놓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오해로 생긴 일이니 되었소.”
노란 옷을 입은 소녀의 아름다운 눈이 정철의 얼굴을 훑고는 빙그레 웃었다.
“아이 참, 계속 하시지요. 저희 넷째 오라버니가 저 때문에 당신에게 죄를 지었으니, 당신이 포기한다면 제가 할 것입니다!”
‘이 남매는 정말 신물이 나는 구나!’
정철은 사내에게 공수를 하고는 정미를 데리고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노란 옷의 소녀가 등 뒤에서 급히 외쳤다.
“급히 가지 마시지요, 낭군. 저희 오라버니를 더 상대하지 않더라도 유모는 돌려줘야지요. 낭군의 여동생이 제 유모를 이렇게나 오래 빌렸는데, 다른 건 몰라도 저희 남매에게 차 한 잔은 대접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정철이 대답하기도 전에 정미는 발걸음을 멈추고 유모를 벗어 몸을 돌려 성큼성큼 노란 옷의 소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품에 유모와 은전 한 조각을 집어넣었다.
“유모를 돌려드리지요. 감사합니다. 은은 찻값입니다.”
그러고는 그 사내를 불쾌하게 쳐다봤다.
‘그저 유모 하나를 썼을 뿐인데 친동생도 알아보지 못하다니, 별 볼 일 없는 놈이군. 만약 둘째 오라버니였다면 내가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다 알아볼 텐데. 역시 우리 오라버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정미는 정철을 잡아당기며 빠르게 떠났고, 남은 그 남매는 멀어져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넋을 잃은 채였다.
“넷째 오라버니, 수도는 정말 너무 좋은 것 같아. 오라버니는 어때?”
사내는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수도에 잘생긴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앞으로 여동생을 어찌 간수한담!’
* * *
“뭐라, 시험을 보지 않았다고?”
염송당 안, 맹 노부인이 토항 위에 앉아 건과를 먹고 있었고, 정요는 안마 방망이로 노부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중이었다.
정요가 멈칫하더니, 눈을 반쯤 내리깔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두 남매를 한 번 훑어봤다. 그러고는 다시 두드리기 시작했다.
맹 노부인이 손을 들었다.
“요야, 가서 네 백모와 어머니를 데려오거라. 그리고 네 백모에게, 집안 사내들에게 이를 알리라고도 하고.”
“네.”
정요가 일어나서 정미의 곁을 지나쳤다. 치맛자락이 살짝 흔들리며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왜 시험을 보지 않은 것이야?”
맹 노부인이 토항 위의 탁자를 내리치자, 탁자 위의 접시에 놓여 있던 행인(*살구시)이 날아올라 그중 한 알이 모처럼 집에 있는 노백야(*老伯爺: 백부의 전前 주인을 가리키는 말)에게 떨어졌다.
노백야는 그 행인을 집어 들어 입에 넣고는 빙그레 웃었다.
“바닥이 꽤 차갑소. 두 아이들 보고 일어나라 하시오.”
맹 노부인이 눈을 부릅뜨고 화를 냈다.
“당신은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아직 어찌 된 일인지 정확히 묻지도 않았는데 뭐 하러 일어납니까?”
노백야가 웃음을 거두고 일어났다.
“일어서서 물어도 똑같지 않소. 맞다, 장(蔣) 노후야(老侯爺)께서 연극을 보여준다 하셨소. 먼저 가보겠네.”
그는 정철을 지나치다가 멈춰서서 말했다.
“괜찮다. 이번에 보지 않아도 다음 번이 있지 않느냐. 그저 시험이다. 볼 수 있으면 보고, 안 봐도 상관없는 것이야. 고작 시험 때문에 즐거움을 잃어선 안 된다. 그만 무릎 꿇고 일어나거라. 날씨가 아직 춥구나.”
그는 정철의 어깨를 힘차게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네 조모를 잘 모시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노백야가 소탈하게 걸어 나갔고, 남은 맹 노부인은 화가 나 속이 쓰렸다.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저런 늙다리와 함께하게 되었는지!’
노백야에게 늙다리라고 하는 것은 사실 그다지 잘 맞는 말은 아니었다.
노백야는 맹 노부인보다 다섯 살이나 어렸고, 이 나이가 되어서도 살이 오르지 않아 여전히 홀쭉한 몸이었다. 양쪽의 귀밑머리에는 흰머리 한 가닥도 보이지 않았고, 슬쩍 보면 사십 대의 중년처럼 보일 정도였다.
맹 노부인이 시집 올 때는 스물한 살쯤이었고, 그녀의 눈에 노백야는 그저 어린아이처럼 보였기에, 여태까지 그를 마음에 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특히 나이가 든 뒤로는,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자면 맹 노부인은 노백야의 본처처럼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어머니처럼 보이곤 했다. 때문에 맹 노부인은 노백야가 그녀의 방에 들어오는 것을 특히나 좋아하지 않았다.
“철아, 말해 보거라.”
맹 노부인은 이미 노백야의 엉뚱한 소리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빠르게 마음을 다잡았다.
“조모님, 손자가 불효를 저질러 조모님께 실망을 안겨드렸습니다.”
정철이 한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손자가 오늘 조금 늦게 나섰는데, 뜻밖에도 시험장에 소란이 일어나 압사 사고가 있었다 하여 시험장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럼 왜 조금 일찍 가지 않은 게야!”
맹 노부인의 머리가 또 심하게 아파왔다. 손을 들어 이마를 짚으며 실망과 분노가 담긴 눈빛으로 정철을 바라봤다.
“철아, 나는 네가 진중한 아이인 줄 알고 그리 걱정하지 않았는데, 네, 네가 나를 이리 실망 시키다니!”
“아니요, 조모님. 제 잘못입니다.”
정미가 허리를 세우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미미.”
정철이 힘없이 불렀다.
정철은 정미가 자존심이 강해, 다른 사람이 자신을 대신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특별히 신신당부하기까지 했는데, 이 녀석이 결국 말을 듣지 않다니.’
정미는 정철과 나란히 섰고, 소매 속에 넣고 있던 손을 빼 정철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유감스러움을 표하면서도 절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조모님, 사실은 제가 오라버니를 데려다주다가, 누군가 인파 속에서 폭죽을 아무렇게나 던져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오라버니는 저를 구하기 위해 시험장에 입장하지 못했고요.”
만약 정철이었다면, 맹 노부인은 그래도 조금 기탄하여 화가 나더라도 체면을 세워주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미는 어려서부터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 최근 외모가 예뻐져 조금 태도가 온화해지긴 했다만, 정철이 시험을 보지 못한 이유가 정미에게 있고, 회인백부에서 공사(貢士)가 나올 기회가 이렇게 사라졌다는 것을 들으니, 그 조금의 온화함조차 깨끗이 사라지고 말았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이 불길한 것! 너만 붙으면 좋은 일이 없어!”
맹 노부인이 탁자 위의 찻잔을 들어 정미에게 던졌다. 찻잔 안에는 뜨거운 차가 반쯤 들어있었다.
정철이 손을 뻗어 그 찻잔을 받아쥐고 송구스러운 듯 말했다.
“조모님의 가르침이 옳습니다. 손자가 후일에 사원에 가 향을 피워 불운을 떨쳐내겠습니다.”
“너를 말한 게 아니다!”
맹 노부인은 정철이 정미를 감싸는 것을 알고는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조모님, 이 손자에게 체면을 남겨주시기 위해 그러시는 걸 압니다. 괜찮습니다. 얼마든지 욕하세요. 천부당만부당(*천번 만번 부당함)입니다. 손자가 조모님에게 실망을 안겨드려서도 안 됐고, 정미를 말려들게 해서도 안 됐습니다.”
“너…….”
맹 노부인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정철은 손자들 중 가장 출중한 아이였다. 문무에 능하고, 신축자재하며, 회인백부가 정철의 손에 들어간다면 백 년이 흥할 거란 얘기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차남의 아들이었고, 친아들도 아닌 양자로 들인 아들이었다. 그래서 노부인은 오히려 늘 이 손자가 지나치게 우수하여 점점 욕심이 커져 둘째의 집안은 물론이고, 회인백 세자의 위치까지 노릴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노부인은 만약 정철이 순조롭게 관직에 취임하게 되면 회인백부에게 두루 좋은 일이 될 거라 생각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맹 노부인은 정미에게 더욱 화가 났지만, 정철이 이렇게 정미를 감싸는 것을 보고는 결국 체면을 조금 남겨주기로 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공주부에 가서 고 선생에게 용서를 빌거라.”
맹 노부인이 말한 고 선생은 덕소(德昭) 장공주의 부마이자, 정철의 은사였다.
“예, 바로 가보겠습니다.”
정철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럼 가보거라, 그만 무릎 꿇고.”
맹 노부인이 재촉했다.
‘정철이 나가면 이 손녀에게 본때를 보여줘야겠다. 이 재수 없는 계집이 앞으로 다신 소란을 피워 백부 전체를 말려들게 하지 못하게 해야겠어!’
“조모님의 관용에 감사드립니다.”
정철이 일어나며 정미를 일으켜 세웠다.
“조모님, 사모(*師母: 스승님의 아내)님께서 저번에 미미를 한 번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미를 데리고 가면 스승님께서 제가 시험을 보지 않은 것에 대해 격노하시진 않을 겁니다. 정미가 있으면 손자에게 조금 체면을 살려주실 테니까요.”
말을 마친 정철은 정미를 데리고 천천히 나갔다.
두 남매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도, 정요가 데리러 간 사람들은 아직 오지 않았다.
맹 노부인은 화가 나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정철의 교활함에 화가 나면서도, 다른 손주들을 생각하면 한스럽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왜 이 손자는 내 장자의 친아들이 아닌 걸까!’
* * *
정철이 정미를 데리고 백부를 나오자, 정미가 그의 손을 뿌리쳤다.
“오라버니, 중은 도망가더라도 절은 도망갈 수 없어. 오라버니가 지금 날 데리고 간다고 해도 다시 돌아오면 어쨌든 피할 수 없는 일이야. 괜찮아, 그저 욕을 좀 듣는 것뿐인걸. 이미 익숙해.”
정미는 스스로를 가엾게 여기지 않았고 담담한 말투로 사실을 얘기했다.
정철은 이를 보고 더욱 참을 수 없었다.
오라버니로서, 집안 여인들의 일로부터는 정미를 완벽하게 지켜낼 수 없었다. 그래서 정미가 그동안 고생을 하게 된 것이다.
‘역시, 소설을 써서 돈을 버는 것만으로는 안 되겠구나.’
정철은 속으로 어떤 결심을 내리고는 정미를 데리고 덕소 장공주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