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중도에 차질이 생기다
“미미.”
정철이 웃으며 정미의 머리를 가리켰다.
“머리가 헝클어졌어.”
정미가 머리를 만져보니 유모는 언제 어디서 떨어졌는지도 모르겠고, 틀어올린 머리도 다 풀어져 헝클어져 있으니, 사람들이 오해할 만했다.
정미는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더니 짜증을 냈다.
“왜 일찍 말하지 않았어. 그런데 오라버니의 머리도 헝클어져 있어.”
정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말할 생각이나 들었겠어? 방금 골목에선 하마터면 물을 뒤집어쓸 뻔했고, 어떤 아이는 여동생보고 엄마라고 불렀는데. 깜짝 놀라서 도망칠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고.’
두 남매는 길가로 가서 각자 차림새를 정리하고는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미미, 잠깐 기다려봐.”
정철은 사방을 둘러보더니, 누가 떨어트렸는지 모를 유모를 주워 깨끗하게 털고는 정미에게 건넸다.
“지금 사람이 많고 혼잡하니까, 우선 아쉬운 대로 이거라도 쓰자.”
두 사람의 머리는 정리되었지만, 옷차림은 이미 엉망진창이라 돌아가면 깨끗이 씻어야 할 꼴이었다. 정미는 이 유모가 다른 사람이 쓴 것이든 아니든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기에 곧장 머리에 썼다.
‘아이의 엄마는 찾아주었지만, 환안은 아직 찾지 못했어.’
정미는 환안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꿈에서 그녀와 오라버니가 쫓기고 있을 때, 환안도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미는 그 환상의 전체를 간파할 수 없었다.
‘그럼 이 시험장의 소란도 원래 일어날 일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그 신발창을 줬다면, 일어나지 않았을까?’
정미는 생각하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생각할수록 놀라움이 더해져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 소란은 하늘의 뜻인가, 아니면 인위적인 걸까? 만약 하늘의 뜻이었다면,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운명은 결국 바꿀 수 없다는 건가?’
“미미, 무슨 생각해?”
정미는 정신이 들었고, 등에 찬바람이 날카롭게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아직도 시험에 대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거야?”
정철이 정미의 등을 토닥이며 눈살을 찌푸렸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내가 말했잖아. 놓쳐도 다음번이 있다고. 게다가 세상일이 어떻게 변할지 누가 알 수 있겠어?”
정미는 극심한 공포 속에서 오히려 냉정해졌고, 정철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미가 손을 들며 물었다.
“오라버니, 왜 그래?”
거리의 사람들은 이미 봄옷으로 갈아입은 날씨였고, 정철은 죽청색 옷을 입고 있으니 풍채가 더욱 준수해 보였다.
정미가 그의 소매를 올리자 팔꿈치에 큰 찰과상이 보였다.
“오라버니!”
정미가 숨을 들이쉬며 상처를 보고는 무척 마음 아파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다른 곳도 다친 거 아니야?”
정철은 소매를 내리며 안심시켰다.
“조금 쓸려서 상처가 난 것뿐이야. 이따 제생당을 지날 때 거기서 치료하면 돼.”
정미는 더 이상 하늘의 뜻인지 뭔지 하는 것을 생각하는 대신, 그저 둘째 오라버니가 평온한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오라버니, 몸 좀 돌려봐.”
정철은 조금 당황했지만 정미의 말을 따라 몸을 돌렸다.
정미는 허리춤의 염낭에 넣어놓은 주사를 꺼냈고, 은침으로 손가락을 찔렀다.
선혈 한 방울이 솟아오르자, 빠르게 주사와 혼합되어 기이하고 선명한 붉은 색이 되어 정미의 손가락 끝에서 뭉쳤는데, 아주 신비하고 괴이하게 보였다.
손은 짙푸른 색이었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허공에서 은은한 빛을 내뿜는 기이한 문양을 그려냈다. 마지막엔 한 점으로 모여, 정미가 몸에 지니고 다니는 작은 찻잔에 떨어졌다.
“오라버니, 됐어.”
정철이 몸을 돌려 정미의 손을 바라봤다.
“이게 뭐야?”
“부수지.”
정미가 찻잔을 정철에게 건네며 말했다.
“오라버니, 이걸 마시면 그 상처들이 나을 거야.”
정철은 건네받은 물을 단숨에 마셨다. 곧장 소매를 걷어보니 팔꿈치가 깨끗해진 채였다.
정철의 안색이 조금 변했다.
“미미, 어떤 부수에 이런 효과가 있는 거야?”
“지혈생기부.”
정미는 정철의 표정이 진지해지는 것을 보고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고 급히 설명했다.
“이건 우리 정가의 조상에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거야.”
정철의 표정이 조금 풀리고, 소매를 다시 내리고는 찻잔 아래에 얕게 깔린 붉은 액체를 쳐다보았다.
“미미, 이 부수는 주사로 그리는 거지? 다른 건 넣지 않고?”
“응, 없어.”
정미는 저도 모르게 부인했고, 오라버니의 총명함에는 내심 화가 났다.
‘만약 오라버니가 부적을 그릴 때 선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 앞으로 다신 부적을 만들지 못하게 할지도 모르겠어.’
“부의라는 학문은 정말 신기하구나.”
정철은 엄숙한 태도로 정미에게 당부했다.
“오라버니가 부의에 대해 잘 알진 못하지만, 외상을 치료하는데 이렇게 놀라울 정도의 효과가 있다곤 들어보지 못했어. 미미, 이 부수에 제한이 없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있다면 신중히 사용해야 해.”
“알고 있어. 부적을 만드는 것도 힘든 일이야. 다른 사람이 다치면 그저 약을 바르라고 할 뿐이지, 절대 아무렇게나 호의를 베풀지 않을 거야.”
“네게 생각이 있으면 됐어.”
그렇게 두 사람이 앞으로 몇 걸음 더 나아갔을 때, 한 무리의 관차(*官差: 관에서 파견하는 관리)들이 다가와 그들을 막았다.
“이쪽으로는 가지 마십시오. 시험장에 압사 사고가 일어나서, 지금은 나올 수만 있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정철은 정미를 뒤로 당기고 그중 한사람에게 읍을 하고 말했다.
“축(祝) 형, 저를 기억하십니까?”
그 사람은 잠시 멍해 있다가는 정철을 자세히 보고는 깜짝 놀랐다.
“아, 기억났습니다. 회인백부의 둘째 공자 아닙니까?”
“기억력이 좋으십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정 형과의 인연은 문(聞) 형의 차남의 만월 연회 때 시작되었는데, 제게 정 형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 아니라 그 사동이 더욱 인상 깊었습니다. 기억하기로는 그가 우리가 데리고 간 모든 사동을 술로 이기고, 수석 사동이라는 명예까지 얻었지요?”
"예, 그래서 그 사동의 이름이 팔근이지요."
정철이 미소 지으며 말하자, 그 사람 뒤에 있던 관차들은 무릎을 꿇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무척이나 고민했다.
‘팔근(八斤)이란 이름은 그래서 그런 것이구나. 누가 들으면 태어났을 때 8근이라 그리 이름을 붙인 줄 알겠네!’
‘주량이 8근이라니, 이거 사람 잡는 거 아냐!’
마찬가지로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을 받은 축씨 사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정 형은 진정한 문인이시군요. 이름을 정말 잘 지었습니다. 아, 이분은?”
정철이 웃으며 말했다.
“제 여동생입니다. 갑자기 사고가 일어나 여동생의 여종이 인파 속에 밀려갔는데, 걱정이 되어 찾으러 와봤습니다.”
“그렇군요.”
축씨 사내는 저도 모르게 정미를 쳐다봤고, 유모에 얼굴이 가려져 있어 속으로 아쉽다고 생각했다. 정가의 둘째 공자도 외모가 선인처럼 준수하니, 그의 여동생은 어떨지 몹시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시선을 거두고 물었다.
“정 형, 솔직하게 말씀드리지요. 지금 안은 사상자가 많아서 들어가봤자 사람을 찾기 어려울 겁니다. 차라리 우선 누이분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 뒤, 우리가 사상자를 정리한 후 젊은 여인이 있으면 그쪽으로 서신을 보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럼 수고스럽지만 부탁드립니다.”
정철은 축씨 사내에게 읍을 하고 정미를 살짝 잡아당겼다.
정미는 잠시 망설이더니 정철을 따라갔다.
돌아가는 길에서 정철이 설명했다.
“저 사람은 오성병마사(五城兵馬司)의 부지휘관이야. 일은 믿음직스럽게 잘하니, 미미는 너무 걱정하지 마.”
“응.”
정철은 시험을 놓쳤고 여종은 생사가 불명하니, 정미는 힘없이 작게 대답했다.
이때 어떤 사내가 갑자기 달려들었다. 분명히 정미에게로 향하는 몸짓이었기에, 정철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사내를 걷어찼다.
그러자 사내는 곡선을 그리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뜻밖에도 그 사내는 무술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는지, 곧바로 버티며 일어나 화를 냈다.
“이 색마야, 내 여동생을 유괴한 것도 모자라 먼저 선수를 쳐!”
그가 달려들며 정철의 발을 걷어찼고 힘차게 주먹을 휘두르며 정철과 맞섰다.
정철은 이 자의 무술이 겉만 그럴싸한 것이 아니라, 동작과 자세가 절도 있고 힘 있는 것에 놀랐고, 순간 대항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방금 달려든 것은 뒤를 노린 것이었음도 알 수 있었다.
한편 그 사람도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사내가,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것 같은 꼴을 하고선 발의 힘이 아주 좋은 것에 내심 놀라는 중이었다.
‘나 서계붕(徐季鵬)이 걷어차여서 날아가다니, 오늘 끝장을 보지 않으면 내 성을 갈아야겠다!’
“형씨, 손을 떼지 않는다면 더 이상 봐주지 않을 것이오!”
정철이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퉤! 개뿔도 없는 색마 주제에, 뭘 봐주지 않는다는 거야? 내가 널 봐주지 않는 거겠지! 수도 사람들은 왜 다들 이런 것이냐. 다른 이의 여동생을 유괴하고 당당한 꼴이라니!”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정철은 사내의 말이 이상한 것을 느끼고는 공격 자세를 조금 풀고는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자세히 말하시오―”
“내가 너 같은 색마와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거냐!”
그 사람이 정미와 정철의 사이를 갈라놓으며 외쳤다.
“동생아, 어서 이리 와!”
정미는 허리를 숙여 흙덩이를 한 줌 주웠다. 그러고는 침착하게 다가가서 갑자기 손을 들고 그의 어깨에 흙덩이를 던졌다.
“왜 나한테 던지는 거야? 아, 잘못 던진 거지? 그럼 거기 서서 가만히 있거라. 내가 이 자식과 끝장을 본 다음에…… 아이고, 동생아, 던지지 말라니까. 어서 옆으로 비켜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거치적대지 말고!”
“누가 네 동생이라는 거야? 네가 뭔데 우리 둘째 오라버니를 색마라고 욕해? 너야말로 색마야. 너희 집안 사람 모두가 색마라고!”
소녀는 오라버니가 이 건장한 사내를 이기지 못할까 싶어 돌과 흙을 던지며 화를 내며 욕했다.
정미는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오늘은 정말 재수가 없구나. 오라버니가 시험을 놓친 일이 가장 재수 없는 일이고, 또 하마터면 물벼락도 맞을 뻔했지. 거기서 끝이 아니라, 멀쩡하게 길을 가다가 미친 사내가 나타나 오라버니를 색마라 욕하고 있다고?
이자는 참으로 간사해! 만약 오라버니가 이자를 이기지 못하면, 나를 데리고 가려고 하는 걸까? 아니면 오라버니를 데리고 가려 하는 걸까? 아니면, 혹시 우리 두 사람 모두를? 정말 음흉한 자로구나!’
‘작은 패왕’이 지 오라버니를 좋아한다는 비밀을 알게 된 이후로 정미의 생각이 그쪽으로 트여버린 바였다.
“잠깐!”
사내가 고함을 질렀고, 정철이 잠깐 멈춘 것을 보자 정미에게 물었다.
“동생아, 목소리가 왜 이렇게 변한 것이냐?”
“누가 네 동생이라는 거야? 사람들이 모인 앞에서 영문도 모른 채 우리를 귀찮게 굴고, 허튼소리까지 하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정미가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며 차갑게 웃었다.
그자는 외골수 같은 사람이었다. 정미의 말에 발을 들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거라. 수도에 들어오자마자 몰래 거자들의 시험을 보러 가지 않았느냐. 어머니께서 여기 사고가 났다는 걸 아시고 얼마나 걱정하셨는데. 큰형님도 여기저기서 너를 찾고 있다. 어서 돌아가자.”
“형씨, 더 이상 제 누이에게 가까이 다가오면, 정말 가만히 있지 않을 거요.”
정철이 얇은 입술을 꾹 다물며 불쾌함을 표했다.
‘언제부터 사람들이 대로에서 아가씨들을 강탈하는 수작을 부리기 시작한 건지, 정말 막으려야 막을 수가 없구나. 내가 만약 닭 한 마리 잡을 힘도 없는 서생이었다면, 여동생을 뺏겼을지도 모른다. 역시 무술을 배우길 잘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