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양육갱
설융은 오른손을 들고 멍하니 바라봤다.
상흔이 가득했던 손이 새것처럼 깨끗해졌고, 극심한 고통도 눈 깜짝할 새 사라지지 않았던가.
이런 능력이면, 당연히 은 100냥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설융은 솔직한 사람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지요.”
정미가 아름답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가고 싶거든 가도 되는데, 제게 돈을 갚은 후 가세요.”
설융이 벼락을 맞은 듯한 모습을 하자 정미가 물었다.
“왜 그러시지요? 지식인이라고 빚을 인정하지 않으려고요?”
“아닙니다!”
설융이 흥분한 듯 얼굴을 붉히며 변명했다.
“빚을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라, 제, 제겐 그리 많은 은냥이 없단 말입니다!”
“그건 별거 아닙니다. 저희 의관에 마침 사람이 부족하니, 여기 남아서 일을 하고 월급으로 갚으면 됩니다. 만약 제 돈을 갚지 않으려고 도망가서 다른 사람에게 목숨을 바치거나, 자살한다면 저도 당연히 방법이 없겠지요. 하지만 제가 당신의 비석에 빚진 돈을 새겨 잊지 못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다, 다, 당신―”
설융이 아연실색했다.
‘이 세상에 어찌 이런 아가씨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정미는 설융의 옆을 지나가 한쪽의 의자에 앉고는 차분하고 느긋하게 말했다.
“속으로 저더러 수전노라고 욕하고 있는 걸 압니다. 하지만 제가 제 능력으로 정당하게 돈을 벌었다는 것은 천지의 대의(大義)이지요. 당신이 불쌍하고 불행하다고 진료비를 내지 않을 이유가 되진 않습니다. 그렇지요?”
“네, 맞습니다.”
설융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고, 완전히 정미에게 말려들고 말았다.
“그럼 됐습니다. 오늘 남아서 제 셋째 숙부님에게 할 일이 있는지 여쭤보십시오. 이틀 정도 일하고 나서 얼마의 급여가 적당한지 여쭤보고, 그때가 되면 우선 팔교진으로 돌아가 집안일을 처리할 수 있게 해주겠습니다. 처리하고 나서 일찍 돌아오세요. 누구와 끝장을 보니 뭐니 하는 일은 은냥을 다 갚고 나서 다시 생각하고요!”
정미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남은 정가의 셋째 나리와 설융은 서로를 빤히 쳐다보았고, 결국 셋째 나리가 어색한 표정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효렴은 우선 의관에서 매일 소비하는 약재를 기록해주시오. 우리 의관의 장부를 관리하는 선생이 마침 집에 무슨 일이 있어 사직서를 냈으니.”
“예.”
설융이 비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8대의 조상에게 창피를 줄 순 없었다. 묘비에 빚을 갚지 않았다고 새겨지느니, 차라리 성실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정미는 칸막이방에 가서 유모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는 아무 의서 한 권을 꺼내 침상에 기대어 읽었다.
잠시 후 셋째 숙부가 들어와 정미의 곁으로 왔고, 손을 뻗어 그녀의 매끈한 이마를 살짝 톡 쳤다.
“셋째 숙부?”
정미가 의서를 옆에 두고 그를 바라보자, 셋째 숙부가 물었다.
“이 녀석, 거자를 남게 한 건 그자를 살리려고 한 것이지?”
“서로 좋은 일이잖아요. 근데도 저를 때리시다니!”
정미가 이마를 어루만지며 투정 부렸다.
정미의 피부는 막 껍질을 벗긴 달걀처럼 희고 부드러웠고, 셋째 숙부가 한번 툭 쳤던 것으로 정말이지 조금 빨개진 채였다.
셋째 숙부는 조금 난처한 듯 말했다.
“내가 너무 세게 때렸느냐?”
정미는 입을 꾹 다물고 웃었다.
셋째 숙부는 어린 소녀가 자신을 놀린 것임을 알아챘지만, 조금도 화내지 않았다.
최근 이 조카의 의술에 대한 진심과 열정은 그의 마음에 쏙 들었고, 날이 갈수록 기쁨과 안심이 깊어져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자의 신분으로는 우리 의관에서 오래 일할 수 없을 테지…….”
셋째 숙부는 벌써부터 설융을 어느 일에 배치할지 열심히 고민하고 있었다.
‘미가 엮인 일이니, 숙부로서 당연히 일을 망칠 수 없지.’
정미가 웃으며 셋째 숙부를 바라봤다.
셋째 숙부는 융통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런 정직함은 결코 고지식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믿음직스러웠다.
‘만약 아버지가 셋째 숙부님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내가 못생겨도, 우둔해도 싫어하지 않고, 어머니의 부드럽지 않고 억센 성정도 싫어하지 않았을 거야. 그럼 가족끼리 화목하게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이런 악역무도한 생각이 마음속에 스쳤으나, 정미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내일모레까지만 남도록 했잖아요. 걱정 마세요. 모레 둘째 오라버니가 두 번째 시험을 다 보고 나오니, 그때 오라버니가 어떻게 할지 한번 보면 되죠.”
정미가 굳이 입씨름을 해서 설융을 남게 한 까닭은, 하나는 당연히 그가 젊은 나이에 목숨을 버리지 않았으면 바랐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둘째 오라버니가 직접 팔근에게 설융과 함께 팔교진에 가라고 분부했기 때문이었다.
오라버니가 신경 쓰는 일은 정미의 마음에도 걸리기 마련이었다.
* * *
어느덧 2월 14일이 되었고, 정철은 시험을 마치고 나온 후 제생당에서 성실하게 장부 관리를 하는 설융을 보고는 순간 잘못 찾아왔나 싶어 어리둥절해졌다.
정미가 조용히 상황을 설명해주자, 정철은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듣고는 배를 누르며 말했다.
“미미, 여기 먹을 것이 좀 있니? 위가 조금 아프네.”
정미가 긴장하며 급히 물었다.
“위가 아프다고? 안에 있으면서 계속 찬물과 찬밥만 먹은 거야?”
그러고는 손을 뻗어 정철의 복부에 댔다.
“오라버니, 내가 만져줄게.”
정철은 얼굴을 붉히더니 급히 여동생의 손을 치우고는 마른기침을 해댔다.
“만질 필요 없어. 따뜻한 국물을 마시면 나아질 거야.”
“의관에 맛있는 게 어디 있다고…….”
그때, 정미의 눈이 반짝이더니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래, 백미재의 양육갱! 오라버니, 기다리고 있어. 내가 가서 사 올게.”
“팔근에게 시키면 되지.”
“아니, 내가 환안을 데리고 가면 돼.”
정미가 나간 뒤, 정철은 그제야 웃는 얼굴을 거두고 설융을 불렀다.
“설 형제, 여기 와서 이야기 좀 합시다.”
어린 소녀는 사람을 많이 만나보지 못했기에, 한 사내를 좋아하게 되는 건 그 사람을 신경 쓰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일이란 것 또한 잘 모를 터였다. 매번 돕고 이해해줄 때마다 저도 모르게 은근히 마음을 내어주게 되는 법이었으니, 정철은 지금 일이 일어나기 전에 방지하고자 했다.
정철은 일주향(*약 30분) 넘게 설융과 이야기를 나눴고, 두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정미가 돌아왔을 때, 일을 하며 빚을 갚던 설 거인은 이미 팔근과 함께 제생당을 떠난 뒤였다.
정미는 대수롭지 않아 하며 양육갱을 들고 웃었다.
“오라버니, 아직도 위가 아파?”
설 거인이 떠났으니, 정철의 위는 당연히 아프지 않았다. 그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이 따뜻한 양육갱을 보기만 해도, 위가 한결 편해지는 것 같아.”
정미가 양육갱을 내려놓고 부드러운 수건을 건네 손을 닦게 했다.
“오라버니, 그럼 따뜻할 때 먹어.”
시험장에서 이틀간 고생한 정철은 정말 조금 배가 고파왔기에, 손을 닦고 숟가락을 들어 천천히 양육갱을 먹기 시작했다.
정미는 옆에서 턱을 괴고 그를 바라봤다.
정철은 그런 정미의 시선이 조금 불편한 듯 여동생을 흘겨봤다.
“미미, 왜 보기만 하고 안 먹어?”
정미가 방긋 웃었다.
“방금 오라버니 위가 아프다는 말에 마음이 급해서 내 것도 사 오는 걸 잊었어.”
정철은 반쯤 먹은 양육갱을 쳐다보다가 잠깐 망설이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먹었다.
‘어리지도 않은데, 남매끼리 국을 같이 먹을 순 없겠지.’
하지만 정철은 혼자만 먹고 여동생은 옆에서 보기만 하니, 더는 음식이 목 뒤로 넘어가지 않아 몇 숟갈 뜨고는 정미에게 말했다.
“미미, 이만 집으로 돌아가자.”
정미는 많이 남은 양육갱을 보며 잠시 걱정이 일었다.
‘오라버니도 나만큼 백미재의 양육갱을 좋아하는데, 왜 오늘은 더 먹지 못하지? 위가 많이 아픈가 보구나!’
정미가 정철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봤다.
아직 대방맥과는 자세히 알지 못하기에, 그저 망진만으로는 정철의 위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아낼 수 없었다.
정미는 더욱 걱정이 되었다.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증상은 더욱 심각한 병일 수도 있어!’
그러고는 엄숙한 표정으로 정철에게 다가갔다.
“미미, 왜 그래?”
정철은 여동생의 갑작스러운 표정 변화에 어리둥절했다.
정미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정철의 복부에 얹고 좌우로 눌러보며 말했다.
“오라버니, 어디가 아파? 정확히 말해봐.”
정철은 깜짝 놀라며 정미의 손을 잡았고 귀 끝까지 빨개진 채로 외쳤다.
“미미, 함부로 만지지 마. 오라버닌 괜찮아!”
“정말 괜찮아?”
‘괜찮다면서 왜 식은땀까지 나는 건데?’
정미는 의심이 되어 재차 말했다.
“오라버니, 얼굴이 붉고 뜨거워. 게다가 위도 아프다고 하니, 아마 위에서 열이 나서 그런 것 같아. 만약 위에 궤양이라도 있으면 큰일이야.”
정미는 아주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함부로 만진 게 아니야. 내가 아직 대방맥과는 잘 알지 못해서, 망진만으로는 병증을 알아낼 수 없고, 촉진으로 통증 부위를 정확히 알아내야 결론을 낼 수 있어. 그래야 오라버니를 치료해줄 수 있으니까.”
정미가 아무리 논리정연하게 말한다고 해도, 정철은 동의할 수 없었다.
그는 평소 무술을 연마해 몸이 아주 건장했기에 위가 아플 리 없었다. 얼굴이 붉고 열이 나는 것은 당연히 위통과 아무 관련이 없었다.
“미미, 이제 정말 안 아프다니까. 얼굴의 땀은 양육갱 때문에 난 거야.”
‘정미가 많이 컸구나. 사람의 병도 봐줄 줄 알다니. 거짓말은 신중히 해야겠어!’
정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꾸짖었다.
“안 아프면 다행이고. 하지만 만약 어디가 아프면 절대 날 속이면 안 돼. 나는 부의잖아. 보통 의원들이 치료할 수 없는 것도 나는 가능할지 몰라.”
“이 오라비는 당연히 널 속이지 않을 거야.”
정철은 여동생을 달래다가 어떤 생각이 떠올라 기분이 나빠졌지만 태연하게 물었다.
“미미, 다른 사람에게 진료를 봐줄 때도 촉진을 해야 하니?”
‘보면서 만지기까지 하는 건 나 정도로 끝나야지, 다른 사내에게도 그래야 한다면 여동생에게 너무 큰 손해다!’
“절대 아니야.”
정미는 정철의 말을 듣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정통하게 배운 후엔 망진만으로도 충분해.”
정철이 진지한 표정으로 신신당부했다.
“그럼 정통하게 배우고 나서 다른 사람 진료를 봐줘야 해. 오진해서 말썽이 생기면 의관에 오는 것조차 하지 못할걸.”
정미가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 마. 잘 모르는 과목은 절대 진료해주지 않으니까.”
정철은 그제야 반쯤 안심했고, 정미를 데리고 백부로 돌아갔다.
* * *
다음 날, 봄볕은 맑았고 하늘은 씻은 듯 푸르렀다.
정미는 정요가 눈에 거슬리게 나타나지 않자 잠시 안심하고, 첫날처럼 우선 정철을 시험장까지 데려다준 후 제생당으로 가려 했다.
길가엔 초록빛이 점점 짙어져 가고 있었고, 어떤 버드나무는 벌써 가지를 내린 채였다.
정미가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시험이 끝나면 같이 답청을 가자.”
“좋아.”
시험장 앞에 도착하자, 마지막 시험이라 그런지 오늘 배웅 온 사람이 첫 시험 때보다 훨씬 많았다. 게다가 삼 년에 한 번 열리는 회시는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끄는 대사(大事)라 원래도 많은 백성들이 와서 구경하곤 했기에, 오늘의 시험장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북적거렸다.
“미미, 일찍 돌아가.”
정철은 정미에게 당부하고는 앞으로 가서 줄을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