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진료비를 독촉하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설융이 어떤 것 같아?”
만약 오라버니가 그를 좋게 말한다면, 정미는 바로 소매로 입을 닦은 일을 꺼내려 했다.
그러나 정미의 말에 정철은 기분이 아주 불편해졌다.
‘여동생이 벌써 이런 깊은 고민까지 하게 된 건가? 내 의견까지 물어보다니.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한데?’
“미미 생각은 어때?”
정철은 속이 뒤집히는 듯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물었다.
정미는 조금 부끄러웠다.
‘오라버니가 정확히 말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먼저 경고하는 것은 좋지 않겠지?’
반면 정철은 가슴에 화살이 꽂힌 듯한 느낌을 받는 중이었다.
‘정미가 부끄러워한다. 부끄러워하고 있어. 부끄러워하고 있다고!’
정철은 한참 뒤에야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쑥스러워 하지 않아도 돼. 무슨 생각이 있으면 모두 오라버니에게 알려줘. 오라버니가 도와줄게.”
‘그럴 리가. 미미가 만약 그 설융에게 시집간다고 하면, 평생 다신 미미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만들 테다!’
정철은 아무리 거인이라고 하더라도 설융과 같은 상황이 될 때까지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는 것은 정말 무능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설융을 도울 수는 있겠지만, 자신의 여동생은 절대 그런 사람에게 시집보낼 수 없었다.
누가 어렵지 않은 적이 있겠는가? 하지만 어떤 사람은 역경 속에서 볏짚을 잡고 상황을 역전시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상황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기도 하는 법이었다.
모든 사람의 용감한 행동이 칭찬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특히 그 용기의 대가가 가족들의 피눈물일 경우엔 더더욱 그랬다.
백부의 처지가 어렵더라도 여동생에게 좋은 연지 물분과 장신구를 사주기 위해, 열몇 살 때부터 몰래 서재를 열어 음란 서적을 써왔던 정철은 속으로 그렇게 다짐했다.
정미는 정철의 말에 담긴 의미에 깜짝 놀랐다.
‘오라버니는 나를 가장 아끼고, 내가 부탁하면 반드시 들어주는 사람이잖아. 괜히 꾀를 부리다가 일을 망쳐 내가 설융에게 마음이 있다고 오해하게 만들어서는 안 돼!’
“오라버니, 나는 아무 생각 없어. 나는 시집을 가고 싶지 않다는 걸 기억해줘.”
정철이 안심했다.
‘시집가고 싶지 않다면 다행이지……. 잠깐, 그럼 문제가 더 심각한 것 같은데?’
정철은 관자놀이가 아파왔다.
‘아니다. 생각을 달리하면 미미는 이제 그저 열네 살이니, 이 문제가 심각하긴 하더라도 급한 건 아닐 거야…….’
생각이 정리된 정철은 여동생을 데리고 기쁘게 집으로 돌아갔다.
* * *
정철은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방으로 돌아가 씻었고, 곧 정미가 그를 데리고 비서거로 갔다.
“미미가 오라버니를 왜 불렀을까?”
정미는 여종들을 내보내고, 비단으로 감싼 물건을 꺼내 안의 신발창을 건넸다.
“오라버니, 봐봐.”
“이건?”
정철은 신발창을 건네받은 뒤, 흰 천 위에 적힌 내용을 보고는 얼굴을 굳혔다.
경서를 숙독한 그가,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리는 없었다.
그는 조용히 정미를 바라보며 설명을 들었다.
“오라버니, 시험 전날 기억나? 내가 오라버니에게 덧신을 선물했잖아. 사실, 그 덧신 외에도 내가 이 신발창을 주려고 했는데 결국 주지 못했어.”
정미가 다른 한 짝의 신발창을 꽉 쥐었다.
“내가 왜 주지 않았는지 궁금하지?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그 순간 이상하게도 오라버니에게 정요와 연관된 물건을 주고 싶지 않았거든.”
정미는 정요가 신발창을 들고 비서거에 온 일을 아주 자세히 설명했다.
“오라버니, 내게 증거는 없지만 이건 분명 정요가 한 짓일 거라고 생각해!”
정철은 이를 듣고 잠시 침묵하더니 물었다.
“미미, 이 일을 다른 사람한테도 말했니?”
정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증거가 없어서 그저 추측만 한 거야. 그 글씨가 정요의 손에서 나왔다는 것을 증명할 수도 없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말해봤자 내가 허튼소리를 한다고 생각할걸.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게 되겠지.”
“미미가 많이 컸구나.”
정미가 입을 꾹 다물고 웃었다.
“난 원래 다 컸거든? 그게 문제가 아니라, 나는 혹시나 정요가 또 손을 써서 오라버니의 시험에 영향을 줄까 봐 지금에야 알려주는 거야.”
만약 우연이 하나하나 다 들어맞지 않았다면, 누가 그 부드럽고 선량하며 늘 자신을 신경 써주던 사람이 이런 악독한 마음을 품었으리라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걱정 마. 오라버니가 주의할게.”
정미는 조금 안심되어 물었다.
“오라버니, 바로 나를 믿어주는 거야? 내, 내게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정철이 웃으며 반문했다.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가 신뢰를 잃을까 두려웠다면서, 오라버니에겐 왜 말했는데?”
“오라버니니까 두렵지 않았던 거지.”
정미가 무의식중에 곧장 대답하자 정철이 웃었다.
“그래. 오라버니도 미미가 말한 거니까, 네가 솔직했을 거라고 믿는 거야.”
타인에게 신뢰를 받는 기분은 정말 좋았기에, 정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럼 앞으로 정요를 상대하지 마. 정요 같은 사람은 가까이 하지만 않으면 별일 없을 거야.”
“알겠어.”
정철은 내일 또 시험을 치러 가야 했기에, 정미의 처소에서 나온 후 일찍이 잠에 들었다.
정미도 내일 오라버니를 배웅해야 했으므로 일찍 잠들기로 했다.
* * *
다음 날 정미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정요와 정동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지금의 정미에겐 정요는 사갈과도 다름없었기에 마음속에 경계심이 일었지만, 얼굴에 조금도 티 내지 않고 물었다.
“둘째 언니랑 넷째 동생이 어쩐 일이야?”
정동이 정미를 흘끗 쳐다봤다.
“무슨 소리야. 둘째 오라버니가 시험을 치러 가서 여동생으로서 와본 것 뿐인데, 언니만 되고 우리는 안 된다는 뜻이야?”
정요는 늘 그래왔듯이 이때도 그저 웃음을 머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선량하고 차분한 모습을 보였다.
“넷째 동생이 이렇게 둘째 오라버니를 신경 쓰는 줄 몰랐네.”
정미는 정요를 없는 사람처럼 여기기로 했다.
‘말뚝이 되길 원한다면, 말뚝이 되라지.’
“그건 당연한 거지.”
정동이 가볍게 미소 짓자, 정미가 까치발을 들고 멀리 바라봤다.
“뭘 보는 거야?”
“아, 셋째 남동생이 아직도 안 왔나 해서.”
정동의 웃는 얼굴이 한순간에 굳었다.
공부만 아는 셋째 남동생은 둘째 오라버니가 시험을 치자 매일 서재에 틀어박혀 열심히 공부했고 오로지 원시(院試)에 통과하려는 마음뿐이었기에, 배웅을 나올 리 없었다.
정동은 방금 정철의 시험을 신경쓴다고 했으면서도 곧바로 친동생의 일로 창피를 당하자 수치스럽고 화가 나 정미를 한 번 노려보고는 침묵했다.
정철이 나와 이들을 보고는 의외라는 듯 말했다.
“여동생들이 모두 나와 있었구나?”
“다 같이 오라버니가 시험을 잘 치길 응원하러 배웅을 나왔어.”
정요가 맞이하자, 정철은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는 바로 시선을 거두고 담담하게 말했다.
“고마워. 나 때문에 고생할 필요 없어. 날이 추우니 얼른 처소로 돌아가.”
정요가 말을 더 하려고 할 때, 정미가 끼어들었다.
“좋아. 오라버니, 그럼 우리 먼저 돌아가 볼게. 조심히 가.”
‘정요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간에, 오라버니에게서 멀리 떨어트려 놓으면 될 일이야.’
정미가 곁눈질로 정요를 훑으며 생각했다.
‘정요는 마치 쫓아내도 나가지 않는 파리처럼 짜증이 나는구나. 때려죽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정미는 자신이 돌아가지 않으면 두 사람도 움직이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정철에게 손을 흔들고는 먼저 처소로 돌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정요와 정동도 각자의 처소로 돌아갔다.
* * *
해가 뜨자, 정미는 그제야 환안을 데리고 제생당으로 갔다.
곧 정오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정미가 셋째 숙부에게 인사를 드린 후 백부로 돌아가려고 할 때, 뜻밖에도 팔근이 돌아왔다.
팔근 뒤에는 농부 사내가 있었는데, 사내는 어깨에 설융을 짊어지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이냐?”
셋째 숙부가 설융을 알아보고 그를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가자, 팔근이 급히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소인이 벽돌로 기절시킨 겁니다.”
팔근은 말하면서 그 사내더러 설융을 침상에 올리게 했고 이어서 설명했다.
“도무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 거인 나리가 부엌칼을 쥐고 목숨을 걸려고 하니,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셋째 숙부는 더는 묻지 않고 약상자를 가져와 은침을 꺼내 설융에게 침을 놓았다.
정미가 팔근을 따로 불러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니?”
팔근은 일찍이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 셋째 아가씨의 말을 둘째 공자의 말처럼 여겨야 한다고. 그것이 맞다고 말이다.
그는 정미 같은 어린 소녀가 이런 일을 알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곧바로 대답했다.
“소인이 팔교진에 도착해서 알아봤습니다. 이 거인 나리는 아마도 현의 관리 나리 집안의 자제와 동창이었는데, 어쩌다 원수가 된 듯합니다. 거인 나리의 여동생이 목매달아 죽었는데…….”
팔근이 잠시 멈칫하더니, 설융의 여동생이 몸을 능욕당해 목을 매 자살한 거라는 사실은 숨기고 이어서 말했다.
“이 거인 나리는 이 일이 그 동창과 관련이 있을 거라며, 현성에 가서 끝장을 봐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데리고 온 것이냐?”
팔근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데리고 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거인 나리의 노모는 나리와 몇 마디 나누고는 숨을 거두셨습니다. 공자께서 소인에게 이 나리를 잘 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집에 아무도 남지 않았는데, 그 동창과 끝장을 보러 가지 않더라도 살길이 없을 듯했지요. 소인이 보기에 아무 방도가 없는 것 같아 그 마을사람들에게 은냥을 조금 쥐여주고 그의 노모와 여동생의 뒷일을 부탁하고는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이때, 설융이 깨어났다.
그는 멍하니 사방을 둘러보다가 정미를 발견하고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처량하게 ‘어머니, 동생아!’하고 외치며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다리가 풀리더니 정미의 발치로 넘어지고 말았다.
정미가 쪼그리고 앉아 물었다.
“설융, 어딜 가고 싶은 겁니까?”
설융은 두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일어나려고 했으나,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자꾸만 넘어졌다.
힘이 있을 리가 없었다. 지통부의 효과가 사라진 후 오른손의 통증은 둘째치고, 시험장에서 나온 뒤로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으니, 아무리 튼튼한 사람이라도 힘이 없을 터였다.
설융이 바닥을 짚고 고개를 위로 들었는데, 이는 정미의 눈에 설융이 눈을 부라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신경 쓰지 마시오. 비켜주시오. 날 보내주시오!”
정미의 말투가 차가워졌다.
“신경 쓸 생각 없습니다. 하지만 설융, 세 번의 진료비를 아직 내지 않았잖아요? 어린 아가씨에게 빚을 지다니,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뭐가 세 번이나 됩니까?”
설융 같은 지식인들은 자존심이 하늘보다 컸기에, 세 번의 진료비를 내지 않았다는 말은 정말 모욕적이었다.
‘분명 두 번밖에 되지 않았는데!’
“첫 번째는 손을 치료해 줬을 때. 당신이 그때 낸 진료비는 제 셋째 숙부님에게 낸 것이었지, 제게 낸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손은 매번 시험 후 나를 다시 찾아와 부수를 받아 가야 했기에, 원래는 마지막에 한꺼번에 계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어제 기절하고, 오늘 또 기절했으니, 이게 세 번이 아니라면 몇 번이란 말입니까?”
“그, 그럼 얼마입니까?”
정미는 잠시 중얼대며 가늠해보더니, 얇은 천 뒤에 가려진 두 눈을 휘며 말했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은 100냥으로 하지요.”
“뭐라고요?”
계속 바닥을 짚은 채 힘이 없던 설융이 갑자기 펄쩍 뛰었다. 은 100냥이 큰 충격인 듯했다.
“은 100냥이라고요? 서, 설마 가…… 강도입니까? 진료 세 번에 은 100냥이요?”
정미가 차갑게 웃었다.
“세 번이 아니라, 한 번의 진료비입니다. 제 셋째 숙부께선 마음이 선하시기에, 당신을 구해준 그 두 번의 진료비는 아마 면해주실 겁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의 손을 치료해준 진료비 은 100냥만 내시면 됩니다.”
설융이 사납게 노려보자, 정미는 그의 오른손을 흘끗 쳐다보고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설융, 설마 제가 당신의 손을 치료해준 능력이 은 100냥의 가치도 없다는 겁니까?”
‘부수 한잔마다 내 선혈이 담겨 있는 것도 모르면서. 내가 선혈 한 방울을 쓸 때마다 내 정기가 깎이게 되고, 꼼꼼히 몸조리를 잘해야 천천히 회복할 수 있다고.’
이것이 바로 아혜가 아무에게나 병을 치료해줘선 안 된다고 한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