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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92화 (92/375)

92화. 시험장 밖의 비극

정미는 자신의 자극적인 말과 그 미소 때문에, 늘 점잖고 깍듯하던 국공 세자가 대낮에 황당한 일을 저지르게 만들고 나중에는 더 큰 소란을 피우게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중이었다.

지금 정미는 한추화의 방에서 큰 사촌 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언니, 오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는데, 무슨 일 있어?”

“아무것도 아냐. 정미, 철 오라버니가 시험을 치고 있어서 놀러 올 기분이 아닐 줄 알았는데.”

한추화는 미소지었지만, 씁쓸한 마음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열아홉 살이었다. 만약 보통 아가씨였다면 이미 어머니가 되었을 나이였지만, 사위를 구하느라 혼사가 계속 늦어지고 있었다.

최근 몇 명의 사람들이 방문하여 혼담을 꺼냈지만, 대부분 큰 글자도 읽지 못하는 말단 군사거나, 학자 행세를 하는 장사꾼이었다. 가장 좋은 사람은 흔히 말하는 학자였는데, 나이가 서른이 다 되었는데도 수재에도 합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매인은 오히려 한추화가 보는 이득이 더 많다는 듯한 말투였고, 한추화는 중매인을 그대로 쫓아냈다.

데릴사위가 되려는 사내 중 좋은 사내를 찾긴 어려울 것임을 알고 늘 마음의 준비를 하긴 했지만, 정말로 정혼의 문턱에 올라서게 되니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미는 정철의 시험이 걱정되긴 했지만, 한추화가 이렇게 물으니 바로 웃으며 말했다.

“전혀 걱정되지 않아. 언니도 알잖아. 내 둘째 오라버니가 가장 공부를 잘한다는 걸. 만약 오라버니가 합격하지 못하면, 아무도 합격하지 못할걸.”

두 자매는 잠시 잡담을 나누었고, 정미는 한추화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자 틈을 타서 인사를 하고 나왔다.

정미는 돌아가는 길에 또 한지와 마주치고 싶지 않아 다른 길을 골랐고, 꽃담장을 지나다가 한추몽과 한추정이 잡담을 나누는 것을 듣게 되었다.

그녀들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정미가 공교롭게도 담장 뒤에 있어 꽤나 또렷이 들려왔다.

“큰언니가 얼마나 재주가 좋은데? 글도 모르는 군사에게 헌신할 순 없지. 내가 듣기로는, 그 군사는 아주 우락부락하게 생겨선 계급이 아주 낮다고 하더라고.”

“그럼 또 무슨 방법이 있겠어. 큰언니는 데릴사위만 받을 수 있는걸. 못난 놈 중에 그나마 잘난 놈을 골라야 하는데, 찻집을 차리는 사람에게 시집가는 것보단 낫겠지.”

정미는 걸음을 멈추었다. 갑자기 한추화의 기분이 좋지 않았던 이유를 깨닫게 되었고, 이내 조용히 자리를 떴다.

* * *

2월 11일은 수험생들의 첫 시험이 끝나는 날이었다. 이날 오후가 되자 정미는 도저히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어, 일찍이 환안과 정철의 사동을 데리고 시험장의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셋째 아가씨, 아니면 저기 찻집에 앉으시지요.”

팔근이 권했으나 정미가 고개를 저었다.

“오라버니가 말했어. 매 시험마다 셋째 날의 신정(*申正: 오후 4시)때 끝난다고. 곧 시간이 다 되어가니 여기서 기다릴래.”

팔근은 얼굴을 찌푸리고 더는 권하지 않았다. 이따 둘째 공자님이 나오셔서 셋째 아가씨가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날씨에 여기서 기다린 걸 아신다면, 또 자신을 혼낼 거라고만 생각했다.

시험장에 와서 기다리는 사람은 대부분 각 집안의 하인들이나 거자들의 친지와 벗이었다. 때문에 정미가 휘장이 달린 유모를 쓰고 그중에 서 있어도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기다리던 정미가 초조한 마음에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갔을 때, 어떤 사람이 옆을 비집고 지나갔다. 만약 팔근이 막지 않았다면 부딪힐 뻔했다.

팔근이 그 사람의 팔을 덥석 잡았다.

“무슨 짓입니까? 조심하지 않고, 부딪혔으면 어떡하려고요?”

그 사람은 스무 살을 갓 넘긴 듯했고,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이른 봄추위가 살을 에게 하는 시기에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있었고, 짚신을 신고 있어 종아리에 묻은 흙까지 보였다.

팔근에게 잡힌 사람은 곧바로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고의로 그런 게 아니라, 급해서―”

“팔근, 됐어.”

정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팔근은 그제야 그 사람을 놓아주었다. 왠지 그 사람이 정직해 보여 차가운 얼굴로 충고했다.

“지금 넘어갔다고 안심하지 마시오. 여기서 사람이랑 부딪혔다간 골치 아프게 될 거요.”

그 사람은 견문이 좁은 사람인 것이 분명했다. 팔근의 말에 더욱 놀라고 두려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팔근은 호기심이 일어 물었다.

“당신도 마중 나온 것이오? 친지나 친우가 안에서 시험을 보고 있소?”

팔근이 궁금해하는 것도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거자는 수재와 달리 벼슬에 오를 자격이 이미 있는 사람들이었고, 비천한 집안의 출신이라도 향시에 급제하기만 하면 밑천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농부같이 생긴 사람이 여기서 지키고 있으니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했다.

아마 팔근이 방금의 경솔함을 따지지 않는다 생각해서인지, 그 사람은 솔직하게 설명했다.

“저는 소식을 전하러 온 것입니다. 저희 작은 진(*镇: 중국의 행정구역 단위)의 어떤 나리께서 시험에 참가하셨는데, 집안에 일이 생겨서요.”

“그런 거였군. 어쩐지 급해 보이고, 밭일하는 옷을 입고 있더군. 그 거인 나리의 소작인인 거요?”

그 사람이 손을 저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거인 나리는 제 이웃집에 사는 분이십니다. 오늘 날이 밝기 전에 밭으로 나갈 준비를 했는데, 그분의 집에 일이 생겼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러고는 고개를 저었고, 건장한 사내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 거인 나리는 집에 노모와 여동생 하나뿐인데, 여동생이 한밤중에 목을 매달았고, 노모가 아침에 발견하고는 울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숨만 붙어있다고 합니다.”

정미가 움찔했다.

‘이 사람이 말하는 자가 왜 의관에서 손을 고쳐준 거자인 것 같지?’

정미는 물어보고 싶었지만,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 시선을 거두고 시험장의 대문을 쳐다봤다.

징 소리가 세 번 울리자, 굳게 닫혀있던 시험장의 대문이 열리며 시험에 참가한 거자들이 우르르 나왔다.

정미는 잠시 모든 걸 잊고 급히 까치발을 들어 바라봤고, 하나씩 나오는 거자들이 멍한 눈빛에 창백한 얼굴로 휘청이며 걷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더욱 초조해져 앞으로 두 걸음 다가갔다.

“설 나리―”

그 사내가 바람처럼 빠르게 다가갔다. 그 때문에 일어난 바람에 정미의 유모에 달린 휘장이 펄럭일 정도였다.

팔근은 화가 나 눈을 부릅떴다.

‘아까 경고했는데도 입만 아프게 되었구나!’

정미가 참지 못하고 그쪽을 바라봤다.

그 사람은 한 젊은 거자에게로 다가갔고, 그를 끌고 손짓하며 말했다. 그러자 그 거자는 곧바로 바닥에 쓰러져 굴렀다.

사내는 그 거자를 어깨에 메고는 막연한 듯 사방을 둘러보다 소리를 질렀다.

“이걸 어쩌나, 이걸 어째!”

정미가 한숨을 쉬었다.

정미는 이미 그 거자가 전에 의관에 온 설융인 것을 알아봤다.

그의 여동생이 그를 위해 몰래 마흔이 넘은 백정과 정혼했고, 그 납폐금으로 오라버니의 여비를 마련했다는 것이 떠오르자, 정미는 동정심이 일어 팔근에게 분부했다.

“팔근, 가서 저 두 사람을 우리 의관으로 데려다주거라.”

팔근은 잠시 당황하다가, 이상하게 여겨지긴 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소인이 바로 가보겠습니다.”

팔근이 떠나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미.”

정미가 고개를 들자, 정철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다른 거자들처럼 초췌한 모습이 아니라 단정한 머리와 옷에 송죽처럼 훤칠한 키로 서 있으니, 마치 부드럽고 맑은 바람처럼 마음속 근심 걱정을 모두 쓸어가 버릴 것만 같았다.

정미는 입꼬리를 올리고 달려갔다.

“오라버니―”

봄바람이 얼굴을 가린 천을 뒤집자 맑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정철이 정미의 손을 잡았다.

“손이 차갑게 얼었구나. 왜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

정미는 정철을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하마터면 오라버니가 이번 회시를 망칠 뻔했어!’

정미의 마음속에 공포가 스쳤으나, 정철의 팔짱을 끼며 작게 말했다.

“오라버니, 보고 싶었어.”

정철은 팔이 뻣뻣해져 한참 후에야 웃으며 말했다.

“바보야.”

정미는 모든 감정을 숨기고 고개를 들어 물었다.

“오라버니, 시험은 어땠어?”

“당연히 정미가 찬 바람 속에 기다린 것을 헛되게 하지 않았지.”

정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런 건 세 번째 시험까지 잘 치고 난 후에 말해야지! 오라버니, 이렇게 잘생겨서는 금방(*金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이름을 써서 거리에 붙이던 글)을 붙일 때 누가 방하착서 해가면 어떻게 해?”

정철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여동생이 나를 놀리는 건가?’

“미미, 걱정이 너무 많아.”

정철이 여동생의 어깨를 토닥이며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라버니가 어려서부터 무술을 배운 게 바로 그날을 대비하기 위한 거 아니겠어?”

정미는 생각했다.

‘오라버니가 갑자기 이렇게 뻔뻔하게 굴면, 난 어떻게 반응해줘야 하지?’

“맞다, 방금 팔근은 무슨 일이니?”

정미는 그제야 오라버니와의 만남의 기쁨에서 벗어나 차분하게 말했다.

“어떤 거자의 집에 일이 생겼는데, 소식을 전한 사람의 말을 듣고 갑자기 기절했어. 그래서 내가 팔근에게 그들을 데리고 제생당에 가라고 했고.”

정철은 얼굴에 계속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속으론 내심 두근댔다.

‘미미의 이 행동은 조금 마음에 걸리는데. 낯선 거자 때문에 기분이 언짢은 데다가, 친절하게 그 거자를 도와주기까지 하다니. 어쩐지 방금 내가 첫눈에 미미를 알아봤을 때, 미미는 다른 곳에 한눈을 팔고 있더라니. 시험 때문에 여동생을 뺏기다니, 그럼 너무 손해가 크다!

잠깐, 방금 방하착서라고 말한 것도 나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미미 자신이 해보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야?’

정철은 생각하면 할수록 기분이 이상해졌고, 정미가 휘장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표정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미미, 그 거자는 꽤 젊은 사람이었어?”

정철이 침착하게 물었다.

“응.”

정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 먼저 집으로 돌아가서 쉬어. 나는 제생당에 가보고 싶어.”

‘집으로 돌아가라고? 나만?’

정철은 갑자기 시험장 밖의 여동생이 자신에게 낸 이 문제가, 시험장 안의 문제보다 더 어렵게 느껴졌다!

‘내가 어떻게 백부로 돌아갈 수 있겠어!’

“미미.”

정철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는 피곤하지 않아.”

“어떻게 안 피곤할 수 있어? 안에서 사흘이나 있었는데. 듣자 하니 씻지도 못하게 하고, 배가 아파도 변소에 가기도 어렵다던데. 오라버니, 그냥 돌아가서 씻고 푹 쉬는 게 좋겠어.”

정미가 진지하게 권하자, 늘 침착하던 정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내 여동생은 아는 게 너무 많아. 그렇다고 입을 막을 수도 없고. 어떡하지?’

정철은 정미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뗐다.

“의관엔 뭐든 있으니까, 이 오라비가 너와 같이 가보는 게 낫겠어.”

정미는 그저 오라버니가 쉬지 못하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사실 그가 함께 가주는 것이 좋아 더는 말리지 않았다.

“그럼 가자. 환안, 둘째 오라버니의 바구니를 들어드려.”

“그럴 필요 없어.”

정철의 기분이 또 상했다.

‘원래 팔근이 마중 나온 것이 바로 내 짐바구니를 들기 위해서였건만, 여동생이 젊은 사내를 모시라고 보내버린 거구나.’

정철이 몰래 정미를 한 번 쳐다봤다. 그러자 정미는 어렴풋이 오라버니가 이상하다고 느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오라버니, 왜 그래?”

정미가 말하자 유모의 휘장이 가볍게 흔들렸으나 여전히 그 안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정철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말했다.

“오늘 미미가 쓴 유모 휘장의 천 색깔이 오늘 입은 옷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그래?”

정미가 손을 뻗어 천을 젖혀 귀 뒤로 넘겼다.

정철은 그제야 만족한 듯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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