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91화 (91/375)

91화. 풍파를 일으키다

정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한 씨는 오히려 견딜 수 없었다.

“미야, 오늘 이 어미가 널 데리고 남안왕부에 가지 않은 것은, 사실 네 아버지께서 제안한 것이었기 때문이란다.”

정미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자, 한 씨는 기쁨을 숨기지 못하며 줄줄이 설명했다.

그 오랜 세월을 보내는 동안, 남편이 처음으로 명확히 그녀의 편을 들어준 것이었다.

정미는 들을수록 더욱 당혹스러웠다.

“그저 남안왕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는 것 아닙니까. 가든 안 가든 상관없는 일인데,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조모님이 왜 다투신 거예요?”

“어찌 상관없는 일이 되니. 네 조모는 너를 남안왕에게 붙이려고 하는 것인데!”

한 씨가 아무렇게나 말하자, 정미의 눈이 커졌다.

‘잠깐,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어머니, 뭐, 뭐라고 하셨어요?”

딸이 벼락을 맞은 듯한 표정을 짓자, 한 씨도 놀랐다.

“몰랐니?”

정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제가 뭘 알아야 하는데요? 그저 가는 길에 저를 집으로 데려다 줬다고 그 사람에게 시집을 가야 하나요?”

정미는 수치스러웠다.

‘그 왕야가 준수하고 우수하긴 했지만, 내 눈엔 그저 숙부뻘이나 다름없었어. 어른으로 여기고 존경했을 뿐인데, 조모님께선 그런 악랄한 생각을 하시다니!’

정미는 갑자기 다신 백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졌다. 그곳은 분명 자신의 집이었음에도, 답답하여 구역질이 나게 했다.

한 씨는 정미가 이렇게 크게 반응할 줄 몰랐기에, 그녀를 살짝 밀며 말했다.

“미야, 왜 그러니. 아가씨가 되어서 걸핏하면 그런 딱딱한 표정을 해선 안 돼!”

정미는 눈을 부라리며 차갑게 말했다.

“어쩔 수 없어요. 이렇게 해도 조모님께선 저를 남안왕에게 보내려고 하시는데, 만약 제가 꽃처럼 방긋방긋 웃고 다니면 저를 황상에게 보내시려고 하실 걸요!”

“정미, 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니!”

“제 말이 틀렸나요? 남안왕은 황상의 형제잖아요. 제가 그에게 시집가면 큰언니가 저를 뭐라고 불러야겠어요?”

한 씨는 말문이 막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와 네 아버지가 반대하지 않았니. 아니면 왜 너를 은루로 데리고 왔겠어?”

“아버지는 당연히 반대하시겠지요. 태자의 장인도 되고 친왕의 장인도 되다니, 그렇게 뻔뻔스러울 수야 있겠어요?”

“정미, 그 입 다물거라!”

정미의 말은 마치 은침처럼, 한 씨가 지난 밤 동안 꾼 아름다운 꿈을 터트려버렸고, 한 씨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한 씨는 손을 들어 정미를 한 대 때리고 싶었으나, 최근 모녀의 관계가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기에 허공에서 손을 멈추고 벌벌 떨며 움직이지 못했다.

정미가 눈을 들어 그 어색한 손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어머니를 때리시고, 어머니께선 저를 때리시는 겁니까?”

지분으로 가리면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한 듯했으나, 한 씨의 오른쪽 뺨은 여전히 살짝 부어있었다. 지금 정미의 눈을 속일 수 있는 얼굴은 없었다. 앞서 물어보지 않은 것은 그저 어머니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서였다.

정미의 말에 한 씨는 수치스러운 곳이 드러난 듯 오른쪽 뺨을 쥐고 한참 동안 멍하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미가 문발을 걷고 외쳤다.

“마차를 돌리거라. 백부로 돌아가지 않고 국공부로 간다!”

마부가 망설이자, 정미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부인이 명령한 것이다!”

마부는 그제야 말채찍을 휘두르며 고삐를 잡아당겨 위국공부로 달렸다.

돌아가는 길, 두 모녀는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고 홍옥과 순금으로 만든 귀걸이가 마차의 흔들림에 따라 정미의 뺨을 가볍게 쳤다. 정미는 마음이 심란해져 귀걸이를 빼고 염낭에 넣어버렸다.

한 씨는 이를 보고 뭔가 말하려는 듯하다가 멈췄다. 오른쪽 뺨의 통증이 또 돌아와 말을 걸 용기를 앗아가 버렸다.

* * *

위국공 노부인 단 씨는 정미 모녀를 보고 기분이 몹시 좋아졌고, 딸을 흘끗 보고는 외손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미야, 오거라. 외조모와 간식을 먹자꾸나.”

정미가 다가가서 웃었다.

“외조모님, 아직 점심 때도 되지 않았는데 배가 고프신 거예요?”

단 노부인이 빙그레 웃었다.

“왠지 모르게, 최근에 자주 배가 고프더구나. 자, 미야, 이 콩떡을 먹어보렴. 방금 만든 거라 아직 따뜻하단다.”

정미가 한 조각을 들어 먹으며 말했다.

“맛있네요.”

만약 악몽대로 이루어진다면, 외조모는 이삼 년 뒤에 병으로 돌아가실 것이다. 그럼 지금 약간의 병증이 실마리를 드러낼지도 몰랐다.

‘어떤 병증이 자주 배고프게 만들까?’

“외조모님, 자주 배고프다고 하셨는데, 제가 보기엔 하나도 살찌지 않으셨는걸요.”

단 노부인이 웃었다.

“살은 찌지 않아야지. 이 할미는 나이가 들어서 너희 아가씨들 같지 않단다. 살이 더 찌면 걷지도 못해 어디도 가지 못할 게다.”

“걱정 마세요. 정말 그렇게 되더라도 제가 업어드릴게요.”

“이 바보 같은 녀석.”

단 노부인은 정미를 품에 안고 사랑스럽다는 듯 그녀를 토닥였다.

“이렇게 꽃 같은 아가씨인 내 손녀가 어찌 업을 수 있겠느냐? 미야, 네 큰 사촌 언니를 찾아가서 놀거라.”

“네.”

정미가 얌전히 일어서서 한 씨를 흘끗 보고는 몸을 돌려 나갔다.

위국공부는 익숙한 곳이었기에, 마치 자신의 집을 다니는 것처럼 길을 누빌 수 있었다.

한 곳의 석가산으로 향하던 정미는 갑자기 누군가에게 잡혀 석가산 뒤로 끌려갔다.

뒤따르던 환안은 흙덩어리를 한 줌 쥐고 갑자기 나타난 그 사람을 향해 던졌다.

이 모든 것은 아주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정미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을 때쯤, 한지의 어깨에 그 흙덩어리가 맞아떨어졌다.

한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놓고 어깨의 흙을 털었다.

정미가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며 턱을 살짝 치켜들고 눈살을 찌푸렸다.

“지 오라버니, 왜 이렇게 수상한 짓을 하는 거예요?”

한지는 정미의 물음에 멍해졌다.

늘 정미와 있을 땐 언제나 마음 가는 대로였고, 예전에 갑자기 나타나 정미를 놀래켰을 때도 정미는 놀라면서도 기쁜 표정을 짓곤 했다. 그러다 이번에야 처음으로 ‘수상한 짓’이라는 지적을 받은 것이다.

정미의 표정이 너무 엄했거나 말투가 너무 불만스러웠던 탓인지, 한지는 방금 그 장면을 회상하며 정말로 부끄러워졌다.

“정미, 미안해…….”

그는 갑자기 그 아름다운 눈동자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졌다.

“나는 그저 너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정요는 좀…… 어떠니?”

정미는 차갑게 웃으며 훈계하는 말투로 말했다.

“지 오라버니, 정요가 어떤지 알고 싶으면 떳떳하게 와서 물어보면 되는 거 아닌가요? 갑자기 이렇게 튀어나와서 사람을 놀라게 하면 안 되지요.”

“정미, 말을 굳이 그렇게 할 필요는 없잖아.”

한지는 조금 괴로운 듯 정미를 바라봤다.

그는 최근 혼담 때문에 마음이 답답했고, 좋아하는 사람은 또 아무 소식이 없으니, 아름다운 옥 같은 소년의 얼굴은 초췌한 기색에 눈에 핏발이 가득했다.

정미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더욱 화가 났다.

‘예전의 지 오라버니는 그렇게 의기양양했는데, 지금은 정요를 위해 자신을 이런 꼴로 만들었구나.’

만약 정요의 속도 정말 겉모습처럼 아름다웠으면 상관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요의 마음은 분명 사갈과도 같았기에, 남들이 이렇게 좋아할 만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정미는 망설였다. 아직은 남매의 정이 남아있기에, 아무리 한지가 싫더라도 그가 악몽 속의 모습처럼 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지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정혼했잖아요. 정요에 대해선 왜 묻는 거예요?”

한지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나는…….”

그는 정미의 눈에서 조금의 관심을 읽어냈고 갑자기 용기가 생겨 말했다.

“정미, 그 오랜 세월 동안 우리 사이가 가장 좋았잖아. 오라버니는 널 속이고 싶지 않아. 나, 나는 정요만 아내로 삼고 싶어. 네가 도와줄 수 있겠니?”

“도와달라고요?”

정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오라버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오라버니를 어떻게 도우라는 거죠? 설마 오라버니가 퇴혼하고 정요를 들이는 걸 도와달라는 건가요?”

“정미, 그저 정요를 눈여겨보다가 정요가 힘들 때 내가 계속 노력할 거라고 알려주기만 하면 돼. 다른 건 내가 알아서 방법을 찾아볼게.”

정미가 차갑게 웃었다.

“그럼 조 아가씨는 어떡하려고요?”

“조 아가씨?”

한지는 잠시 ‘조 아가씨’가 누군지도 떠올리지 못하는 듯했다.

정미는 갑자기 방금의 걱정은 괜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팔짱을 낀 채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이제 알겠어요. 오라버니와 정요는 진심으로 은애하는 사이인데, 다른 사람이 어찌 끼어들 수 있겠어요? 지 오라버니, 오늘 이왕 마주쳤으니 속마음을 말해주자면, 전 이 일을 도와줄 수 없어요. 하루 종일 정요가 쓸쓸한지 힘든지 알아볼 여유가 없거든요. 게다가, 정요는 그럴 가치도 없고요!”

“정미!”

한지의 표정이 곧바로 어두워졌고, 조금 격앙되어 정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게 무슨 뜻이야? 정요가 어찌 네 미움을 샀니? 너희는 항상 잘 지내지 않았어?”

그의 눈빛이 번쩍이더니 뭔갈 깨달은 듯 말했다.

“알겠다. 정미, 내가 정요를 좋아해서, 네가 정요를 싫어하는 거지. 그렇지?”

정미는 한지의 발등을 짓밟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침을 뱉었다.

“앞으로 다시 내게 그런 역겨운 말을 하면 발을 밟는 걸로 끝나지 않고, 그쪽 얼굴을 밟을 줄 아세요!”

말을 마친 정미는 몸을 돌려 걸어 나가다가, 멈춰서서 웃는 듯 마는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 오라버니, 일편단심으로 정요를 들이고 싶어 하는데, 정요가 원하는지는 모르는 거 아니에요? 정요의 마음속에 있는 사람은 오라버니가 아닐 수도 있는데.”

말을 마친 정미는 다신 고개를 돌리지 않고 가버렸다. 그러자 한지가 쫓아왔다.

“정미, 기다려. 똑바로 말해봐!”

정미는 멈춰서서 고개를 돌리고 싱글벙글 웃었다.

“오라버니, 이렇게 저를 쫓아다니는 걸 남들이 보면 좋지 않아요. 오라버니는 오해가 두렵지 않아도, 전 두려우니까요!”

그 미소는 눈과 얼음이 막 녹은 듯한 봄빛이 드러나 사람을 미혹시켰다. 한지가 두려워하는 가운데, 정미는 이미 환안을 데리고 멀리 가버렸다.

한지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돌아갔고, 머릿속에선 정미가 한 말이 계속 맴돌았다. 잠시 후 또 정미가 뒤돌아보며 웃는 모습이 떠올랐고, 마음속에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느껴졌다.

* * *

한지가 서재에 돌아오자 반반이 책장을 정리하다가 기척을 듣자마자 급히 맞이했다.

“세자, 왜 이마에 땀을 이리 흘리십니까.”

말하면서 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난향이 나는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아주었다.

“비켜.”

한지는 마음이 심란하여 반반을 밀어냈다.

반반이 책상을 짚으며 눈을 내리깔고 몸을 움츠렸다.

“세자,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분부할 일이 있으시면, 소인이 계속 바깥에 있을 테니 불러주세요.”

그러고는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그러자 갑자기 한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오거라!”

반반은 곤혹스러운 듯 몸을 돌렸고, 갑자기 손목이 세게 당겨지더니 이내 그의 품에 안겨 서재 벽 쪽에 있는 긴 침상에 눕혀졌다.

한지는 그 위에 올라가 경직된 얼굴로 반반의 하의를 끌어내리고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안았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침상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났고, 얼마 후 한지가 내려와서는 옷깃을 정리하며 말했다.

“잘 치워놓거라.”

한지가 떠나자 반반은 마지못해 일어나며 풀어진 옷깃을 잡았다가, 갑자기 입을 꾹 다물고 웃었다.

평소 냉담하고 매번 그녀를 침상으로 부를 때 늘 어색해하던 세자가 오늘 서재에서 미친 듯이 자신을 원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대낮에 음란한 짓을 한 것이 새어나가봤자 좋은 것이 아니니, 세자는 이를 분명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아무도 내게 피자탕(*避子湯: 피임약)을 내어주지 않겠지.’

반반이 가볍게 배를 문지르며 작게 말했다.

“네가 조금 더 힘내야겠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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