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남안왕을 재회하다
다음 날, 정철은 날이 밝기도 전에 집을 나와 미리 시험장으로 향했다.
한 씨와 다른 사람들은 그를 배웅했다.
“백부님, 백모님, 아버지, 어머니, 셋째 숙부님, 셋째 숙모님, 모두 돌아가세요. 2월의 봄은 춥습니다. 자칫 감기에 걸리실 수도 있어요.”
몇몇 어른들은 이미 당부할 말을 다 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철아, 지체하지 말고 얼른 가보거라.”
정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미의 앞으로 가 그녀의 앞머리를 만졌다.
“미미, 왜 아무 말도 안 해?”
정미는 오라버니보다도 긴장이 된 바였지만, 감히 티를 내지 못하고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무 말도 필요 없으니까. 나는 오라버니가 합격할 거라고 믿어. 시험이 끝나면 나랑 같이 바둑을 두자.”
정철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사실 정미와 바둑을 두는 것이 시험보다 무섭다고 알려주고 싶었으나, 꾹 참고 몸을 돌려 떠났다.
정미는 돌아가 다시 잠에 들었고, 깨어난 뒤 문안을 드린 후 평소처럼 제생당으로 갔다.
회시를 치는 날이었기 때문인지 의관엔 환자가 별로 없었다.
정미는 정철의 시험이 걱정됐던지라 여기 더 머물러있고 싶지 않았기에, 환안을 데리고 백미재에 가서 천천히 식사를 하며 생각했다.
‘오라버니의 시험이 끝나면 조청공과 여기 와서 지 오라버니의 일에 관해 이야기해야겠어. 혹시 조 언니가 결국 시집가게 되더라도 미리 생각을 해둬서, 나처럼 바보같이 당하지 않을 수 있도록…….’
정미는 마음이 허전하고 무료하여 숟가락으로 양육갱(*羊肉羹: 양고기 스프)을 뒤적거렸다. 이때 갑자기 건물 1층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중 ‘춘시’와 ‘거자’ 등의 단어가 귀에 박혔다.
정미는 가슴이 철렁해 환안을 보내 무슨 일인지 알아오라고 했고, 잠시 후 환안이 돌아와서 말했다.
“아가씨, 거자 하나가 신발 깔창 아래에 경서의 요점을 적은 것을 끼워와서 시험 자격을 잃었다고 해요. 그래서 그 거자가 시험장 입구의 벽에 머리를 부딪혀서 자살했다네요. 지금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러 가고 있어요.”
숟가락이 그릇으로 떨어져 그릇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졌다. 그릇 안에 들어있던 양고기 국물이 정미의 손에 조금 튀었다.
정미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일어나 손등에 튄 국물을 닦는 것도 잊은 채 밖으로 나갔다.
환안은 정미가 갑자기 나가는 것을 보고 아무 말 없이 급히 뒤따랐다. 이것이 바로 환안의 좋은 점이었다.
“아가씨, 아직 돈을 내지 않으셨는데요―”
백미재의 머슴이 헐레벌떡 뒤를 쫓아갔다.
정미는 걸음을 멈추고, 2월 아침 이슬처럼 조금의 온기도 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환안, 주거라!”
환안이 은전을 머슴의 손에 대강 올려두고는 정미에게로 갔다.
“아가씨, 저희 어디로 가는 건가요?”
“시험장!”
백미재는 고급 주막에 속해 가격이 값싸지 않았고, 손님은 대부분 부귀한 사람들이었다. 위치도 당연히 그런 고위관직들이 모이는 곳에 있었으니, 수험생들이 회시를 치는 시험장과 그리 멀지 않았다.
정미는 다급한 걸음으로 시험장으로 향하는 혼잡한 인파를 따라갔다. 그리고 거기 우두커니 섰다.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솟구치는 한기가 그녀를 얼어붙게 할 것만 같았다.
몇몇 아역(*衙役: 수령이 지방 관아에서 사사롭게 부리던 사내종)들이 벽에 부딪혀 자살한 거자를 나무판 위로 들어올리고 있었다. 이미 사람이 죽어 무거운 탓인지 반쯤 들다가 휘청였고, 시체는 곧바로 다시 굴러떨어졌다. 그러자 그 사람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와 구경꾼들이 한바탕 소리를 질렀다.
정미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계속 떨고 있었다.
유모(帷帽)의 장막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손을 들어 장막을 살짝 들어올렸고, 입술을 꽉 깨문 채 그 자살한 거자를 쳐다보았다.
그제야 그 거자의 생김새가 또렷이 보였다.
서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모습에 아주 마른 낯이었고,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피가 끈적끈적하게 묻어 얼굴에 지저분하게 붙어있었다. 이마에 난 상처는 보기만 해도 끔찍했고, 피는 얼굴 전체를 물들여 자세한 모습을 알아볼 수 없었다. 정미의 가슴은 흉수가 제멋대로 날뛰는 듯 뛰어,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정미는 갑자기 몸을 돌려 원래 있던 곳으로 뛰어갔다.
여자 식구들이 일상 외출할 때 사용하는 간편한 가마가 아직 백미재 입구에 있을 터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정미의 바로 앞으로 말이 큰 소리로 울며 주륜화개(*朱輪華蓋: 붉은 바퀴와 어가 위에 씌우는 일산(日傘)) 마차가 멈춰섰고, 급정거에 마차에 걸린 아기자기한 칠색 유리등 두 개가 흔들렸다.
다행히 환안이 정미를 당겨 세웠다. 하지만 너무 힘을 준 탓인지 정미의 유모가 바닥으로 떨어져 얼굴이 드러났다.
그때 마차의 문발이 걷혔다. 그러자 한 사내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평온한 눈빛에 사색이 스치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또 너로구나.”
정미는 환안이 주워서 건넨 유모를 급히 쓰며,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사내를 바라봤다.
‘이 사람이 나를 안다고?’
사내는 정미의 의심을 알아챈 듯 웃으며 말했다.
“그때 네 어머니가 널 데리고 백부로 돌아갔을 때, 본왕의 마차를 타고 간 것이었단다.”
정미의 눈이 커졌다.
‘이분이 바로 그 남안왕!?’
정미가 놀란 가운데, 남안왕이 손을 흔들었다.
“올라오거라.”
정미는 주변 사내들이 자신을 보는 눈빛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몰랐지만, 어찌 되었건 그들의 시선을 아주 싫어했고 본능적으로 거부하고만 싶었다.
하지만 남안왕의 태도는 아주 온화했고, 그 온화함 속에서는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가 은근히 느껴졌다. 오랫동안 상위에 있었던 사람에겐 자연스럽게 생기는 분위기였다.
평소였다면 정미는 이런 분위기에 흔들리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마음이 혼란스러운 나머지 더는 생각지 않고 무릎을 살짝 꿇으며 인사를 했다.
“감사드립니다.”
환안이 정미를 부축해 마차에 오르게 했고, 마부의 노려보는 눈빛 아래 정미를 따라 마차에 올랐다.
남안왕의 마차는 아주 넓었다. 정미는 들어가자마자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잠시 망설이다가 유모를 벗었다.
남안왕은 친왕이었고, 윗사람이기도 하니 같은 마차에 앉아 유모를 쓰고 있으면 큰 실례였다.
남안왕은 정미를 보며 온화하게 웃었다.
“몇 달 동안 잘 쉬었나 보군.”
정미는 남안왕이 왜 자신을 한눈에 알아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만약 그날 내가 기절해서 깨어나지 않았을 때 만난 것이라면, 예전의 그 까무잡잡한 모습이었을 텐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도 한눈에 알아봤다고?’
남안왕은 태연한 표정이었다. 마치 원래 이렇게 되어야 했다는 것처럼 말이다.
“왕야(王爺), 지난번에 저를 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정미가 정식으로 인사했다.
그날 이후 둘째 오라버니가 남안왕부에 가서 사의를 표하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정미가 깨어난 이후 처음 남안왕을 만난 것이었기에, 도리에 맞게 정중히 감사 인사를 해야 했다.
남안왕의 차분하고 담담한 성정 탓인지, 정미의 혼란스러웠던 마음도 점점 안정되어 평소의 침착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 예를 갖출 필요 없네. 어딜 가려고 하던 길인가?”
“백부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가마가 아직 백미재 입구에 있으니, 왕야께서 백미재를 지나치실 때 저를 내려주시면 됩니다.”
남안왕이 웃었다. 이미 서른이 다 되어가는 나이였지만, 눈가엔 잔주름 하나 없었고, 창백한 얼굴빛은 문약해 보이는 느낌을 주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웃으니 잠시 봄바람이 스치는 듯했다.
“양육갱을 먹으러 백미재에 가는 것이냐?”
정미는 조금 곤혹스러웠다.
남안왕의 마음속 자신이, 더욱 엉망진창이 될까 두려웠다.
첫만남엔 그의 마차에서 튕겨 나와 기절해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남안왕의 마차를 더럽혔고, 이번엔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으며, 재차 남안왕의 마차를 빌리게 되지 않았던가. 게다가 백미재의 양육갱을 먹으려고 그리 달린 것이란 오해를 받게 된 것이다.
‘양육갱…….’
정미는 갑자기 은은한 양고기 냄새를 맡았다.
그녀는 몰래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숙였고, 손등에 말라붙은 양고기 국물을 발견했다.
정미는 생각했다.
‘다시는 이 사람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
정미가 밖을 쳐다보며 급히 말했다.
“왕야, 여기 내려주시면 됩니다.”
남안왕이 밖을 내다보더니 웃었다.
“이왕 마차를 탔으니 불편해하지 말거라. 본왕도 마침 그쪽으로 가는 길이었으니, 백부까지 데려다주겠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정미는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남안왕은 혹시 오랫동안 양고기를 먹지 못한 건가? 그래, 남안왕의 몸이 계속 좋지 않았고, 양고기가 몸에 좋긴 해도 체질이 허약한 사람은 많이 먹으면 좋을 게 없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정미는 눈을 들어 몰래 남안왕을 슬쩍 쳐다봤다.
그녀는 그간 망진 실력이 꽤 좋아졌기에 남안왕을 쳐다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으나 참지 못하고 다시 쳐다보았다.
모두가 남안왕은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거라 했지만, 망진을 보니 화서와는 분명히 다른 경우였다.
방금 망진으로는 한눈에 병증을 알아보기 힘들었기에 정미는 의원로서의 호기심이 일어 또 한 번 쳐다보았다.
남안왕이 실소했다.
“본왕이 세수를 제대로 하지 않았느냐?”
남안왕의 나이는 만약 일찍 혼인했다면 이미 정미만한 딸이 있었을 나이였다. 그러니 정미의 시선이 사내에게 미련이 남았을 때의 그런 눈빛이 아님을 알아볼 수 있었기에 덤덤한 태도로 대할 수 있었다.
정미는 눈을 내리깔고 입을 꾹 다물다가 말했다.
“아닙니다. 왕야의 용안은 아주 하얗습니다.”
남안왕은 멍해졌다가 가볍게 웃기 시작했다. 그러다 사레가 들렸는지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기침소리를 들으며 정미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뭐가 남안왕이 선천적으로 허약하다는 거야. 분명히 어렸을 때 만성 독에 중독된 것인데!’
정미는 당연히 남안왕에게 ‘왕야, 웃지 마세요. 중독되셨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정미는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 손등을 닦고는, 그 손수건을 꽉 쥐며 위에 새겨진 잠자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미안하구나.”
남안왕은 마침내 기침을 멈추었다.
정미는 남안왕이 이렇게 겸손하고 예의 있을 줄은 몰랐고, 눈을 들어 그의 침착한 시선을 마주치고는 갑자기 유감스러운 마음을 느꼈다.
따지고 보면 남안왕이 두 번이나 자신에게 도움을 준 것인데, 정미는 그가 중독된 것을 알면서도 말해줄 수 없었으니 말이다.
“본왕이 놀라게 했느냐?”
남안왕의 목소리는 느긋하고 부드러웠다. 이 나이대 사내들 특유의 나지막한 소리였다.
이렇게 온유하고 중후한 목소리는 대부분의 소녀들을 설레게 할 것이었지만, 정미는 남안왕의 몸 상태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말을 빨리 하면 또 그렇게 기침을 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아닙니다. 누구나 목이 불편하면 기침을 할 수 있지요.”
정미는 마음이 편치 않았고 얼른 백부로 돌아가고 싶었다.
남안왕이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긴 했으나, 정미는 함부로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고 혹시나 나중에 치료해줄 수 있더라도 감히 그럴 마음이 들지도 않았다.
이런 느낌은 확실히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남안왕은 정미의 변화를 알아챘는지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오늘이 네 오라버니가 시험을 치는 날이 맞느냐?”
소녀의 표정이 굳었고 잠시 후에야 ‘예.’하고 대답했다.
남안왕은 다소 당황했다.
‘이 나이대 소녀의 기분은 이렇게도 알기 어려운 것인가? 아니면 역시 연지나 물분 같은 이야기를 해야…… 아, 그리고 양육갱 이야기를 해야 흥미가 있는 것인가?’
남안왕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보아하니 내가 나이가 든 모양이구나!’
원래 이 소녀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본 그는 곧장 마차에 태우려고 했고, 마차에서 오히려 더 불안해할까 봐 몇 마디 잡담을 하며 긴장을 풀어주고자 했다.
지금에야 알아차렸다.
‘이 소녀는 긴장한 게 아니라 나와 대화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이로군!’
마음이 먹먹해진 남안왕은 정미에게 웃어 보이고는 눈을 감고 염주를 세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하나씩 세었다. 평온한 표정을 보니 아주 익숙한 일임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마차는 드디어 회인백부에 도착했다.
그녀는 남안왕에게 작별인사를 하고는 바로 비서거로 달려갔다. 그래서 누군가 남안왕이 정미를 데려다줬다는 소식을 이미 회인백 노부인인 맹 노부인에게 알렸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