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정가의 집록
“이제 가도 됩니다.”
거자가 의아해했다.
“그냥 이렇게요?”
“당신의 손을 한번 보세요.”
정미가 담담하게 말했다.
거자가 고개를 숙여보니, 빨갛게 부어 터져있었던 손바닥이 처음처럼 되돌아가 있었고, 새로 난 피부는 다른 곳보다 훨씬 보드라웠다.
거자가 크게 놀랐다.
“아가씨, 이, 이건 무슨 요법입니까?”
정미가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은 거자임에도 아주 예의가 없군요. 자불어괴력난신(*子不語怪力亂神: 군자는 괴이한 일을 논하지 않는다)이라 하거늘, 공부하는 사람인데도 내가 당신의 손을 치료해주니 요법이라 말하다니요!”
‘환안이 치료해준 그 개도, 최소한 환안이 자신에게 붕대를 두르는 걸 열 몇 번이나 참아줬는데!’
“나는 부의고, 당신에게 마시게 한 건 당연히 부수지요. 설마 한 번도 마셔본 적 없나요?”
지금 대량엔 진정한 부의가 그리 많지 않았고, 부의의 이름을 걸고 떠도는 돌팔이 의원이 더 많았지만, 보통 백성은 아직도 부의에게 뿌리 깊은 신뢰가 있었다. 가족 중 누가 아플 때, 특히 기괴하고 이상한 병에 걸려 보통의 의원들에겐 속수무책일 때, 항상 부의를 찾곤 했다.
정미의 물음에 거자는 자신이 열 살 정도 되었을 때 항상 가위에 눌려, 어머니가 부수를 구해다 먹였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고는 하루 종일 변소에 틀어박혀 다신 겪지 못할 비참한 경험을 해야 했었다.
‘진정한 부의는 사실 이런 것이었나? 한잔의 부수로 상처가 바로 회복되게 한다고?’
거자는 저도 모르게 오른손을 움직였다.
움직이자마자 순간 뼈를 찌르는 통증이 느껴져 이마에 식은땀이 났다.
“선생님, 아직도 아픕니다!”
천에 가려진 정미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솔직하긴 하구나. 내 지혈생기부가 효과가 있는 걸 보고, 바로 선생이라 부르다니. 선생, 선생……. 음, 이게 아가씨라 불리는 것보다 더 듣기 좋군.’
정미는 가볍게 기침하고는 최대한 ‘선생’의 모습을 보이며 분부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마세요. 아픈 건 골절 때문입니다. 그건 다른 부수를 마셔야 진통 효과가 있습니다. 그 부수는 마시면 반나절 정도의 효과만 있기 때문에 지금은 주지 않을 겁니다. 지금 마시면 오른손이 아프지 않아서 함부로 쓸 테니까요. 그럼 회복에 좋지 않습니다.
나중에 저녁이 되면 다시 의관에 와서 물주머니에 그 부수를 담아가세요. 시험 첫날 동안은 견딜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시험 전날, 다시 부수를 받으러 오세요.”
거자가 연이어 고개를 끄덕이자, 정미가 말했다.
“기억하세요. 그 부수를 마시면 오른손에 통증이 느껴지지 않을 테지만, 골절은 아직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계속 글씨를 쓰면 더욱 심해질 수 있습니다. 세 시험을 모두 보고 나면 제생당이나 아무 의관에 가서 의원에게 손목에 면포를 둘러 달라 하세요. 최소한 100일은 쉬게 해야 합니다.”
두 눈으로 직접 본 신기한 상황에 거자는 이미 정미를 훌륭한 부의로 여기고 있었고, 정미가 하는 말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가도 됩니다. 저녁엔 제가 여기 있지 않으니, 사람을 찾아 부수를 맡기도록 하지요. 와서 찾아가세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럼 작별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거자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정미는 기분이 꽤 나쁘지 않았다.
‘이 거자는 그래도 예의가 있는 편이구나.’
거자는 일어나서 몇 걸음 걸어 나가다가, 또다시 몸을 돌려 의심하며 물었다.
“선생님, 저는 설융(薛融)이라 합니다. 선생님께선 성함이 어찌 되십니까?”
정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환안이 기분 나빠하며 말했다.
“대체 누가 의관에 가서 의원의 이름을 묻던가요!”
정미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환안이 갈수록 말을 믿음직스럽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환안이 이어서 말했다.
“설마 당신은 계란을 먹으면서도 알을 낳은 암탉이 수수닭인지 흰닭인지 묻습니까?”
설융은 멍하니 있다가 얼굴을 가리고 황급히 달아났다.
설융이 나가자, 정미가 조용히 유모를 벗었다.
“환안…….”
“왜 그러세요, 아가씨?”
주인에게 충성심이 가득한 환안이 웃으며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 밤 너는 식사를 하지 말거라!”
환안이 깜짝 놀랐다.
“아가씨, 소인, 소인이 뭔가 잘못을 했나요?”
잠시 사색에 잠겨있던 환안이 문득 깨달은 듯 말했다.
“아가씨, 그자에게 알려주고 싶으셨던 거군요!”
정미는 더 이상 그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이때 셋째 숙부가 급히 들어오며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야, 방금 그 효렴의 손, 그자의 손이…….”
셋째 숙부의 목소리는 이미 떨리고 있었고,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어 그저 반짝이는 눈빛으로 정미를 바라보기만 했다.
정미는 숨길 생각이 없었기에, 미소지으며 말했다.
“제가 치료한 것입니다.”
“지혈생기부, 지혈생기부로구나……!”
그의 목소리가 점점 침착해졌다.
“미야, 네가 그자에게 지혈생기부를 쓴 것이지, 맞지?”
정미는 매우 놀랐다.
“셋째 숙부께서 어찌 아셨습니까?”
부법은 무수한 별들처럼 넓고 심오한 학문이라, 부의마다 아는 부법이 서로 달랐다. 셋째 숙부가 지혈생기부란 단어를 정확히 말하자 정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미가 부정하지 않자, 셋째 숙부는 더욱 감격한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말했다.
“미야, 잠깐 기다리거라!”
그는 밖으로 달려나갔다가 잠시 후 돌아와 조심스럽게 한 물건을 바쳤다.
그 물건은 암황색 비단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셋째 숙부가 한 겹씩 비단을 벗겨내자, 그 안에서 낡은 고서(古書) 한 권이 나왔다.
“셋째 숙부님, 이건 뭔가요?”
정미는 질문하며 고서를 바라보다가, 고서 위의 익숙한 그림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건 우리 정가의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부법 집록(*輯錄: 여러 책에서 모아 기록한 것)이다!”
정미가 참지 못하고 손을 뻗자, 셋째 숙부가 이를 막아 세웠다.
“조심하거라. 이 부법 집록은 이미 백 년이 넘은 것이라, 종이가 약하니 조심하지 않으면 망가질 것이야.”
“저는 왜 집안의 어른들께서 이런 집록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걸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죠?”
셋째 숙부는 탁자에 집록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부의는 타고난 재능과 계승이 필요한 학문이지. 우리 정가는 부의로부터 시작된 가문이지만, 선조께서 이 집록을 남겨놓으시곤 제자에게 계승하지 않으셨다. 후대의 사람들 중엔 집록의 부법을 알아보는 사람조차 없었고. 시간이 지나 이 집록은 제생당에 보관하게 되었으니, 다른 사람들이 신경 쓸 리가 없었지.”
“그럼 셋째 숙부는 어째서 지혈생기부에 대해 알고 계시는 거예요?”
셋째 숙부가 다시금 쓴웃음을 지었다.
“알기는 무슨. 선조의 셋째 아들이 선조의 뛰어난 재주를 아쉬워했고, 이렇게 사라지는 것을 참을 수 없어, 선조가 사람을 구해냈던 일을 제대로 기록했단다. 그 안엔 부법의 명칭과 효과가 자세하게 나와 있고 말이다.”
“그 책은요?”
정미가 부법 집록을 슬쩍 훑어보며 물었다.
셋째 숙부는 웃는 듯 아닌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책은 사당에 바쳐 자손들이 열람하게 했다. 하지만 그동안 그 책을 열람한 사람은 아주 적을 게야.”
“셋째 숙부님, 제가 볼 수 있을까요?”
정미가 집록을 가리키며 묻자, 셋째 숙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살 넘겨보렴.”
정미는 웃으며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고, 가장 위에 있는 한 권을 꺼내 넘겨봤다.
셋째 숙부는 계속 넋을 놓고 정미를 쳐다보다가, 정미가 책을 내려놓자 곧바로 물었다.
“미야, 알아보겠느냐?”
정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알아보겠네요.”
셋째 숙부가 정미의 손목을 덥석 잡고, 보기 드물게 침착함을 잃은 모습을 보였다.
“정말이냐?”
정미가 고개를 끄덕일지 말지 망설이자, 셋째 숙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
정미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 전부 다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를 알면 열을 안다고, 그동안 아혜에게 부의 이론과 부적을 몇 개 배워둔 후, 정미는 부적의 필획부터 의미까지 일목요연하게 알게 되었다.
당연히, 알아볼 줄 안다고 그려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려낼 수 있다고 부법이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미는 그저 빠르게 주변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은 너무 어렵고,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은 많지 않기 때문에 그저 숨기기만 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녀에겐 중요한 순간에 뒤에 있어 줄 어른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그녀의 어머니와 셋째 숙부처럼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큰언니나 다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부수를 들고 가봤자 마시지 못하게 막을 수도 있어.’
정미는 작년에 기절했을 때, 북명진인과 접점이 생겨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부의는 타고난 재능을 가장 필요로 했고, 북명진인의 부수가 정미의 재능에 불을 붙였다고 하면, 사람들이 의심은 할 수 있지만 허점을 찾아낼 순 없을 터였다. 그리고 그런 의심은 정미가 많은 사람을 구할수록 점점 사라질 것이다.
셋째 숙부는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한잔의 부수로 통현(*通玄: 사물의 현묘한 이치를 깨달음)하는 게 가능한 것이냐?”
셋째 숙부는 눈앞의 조카를 흘끗 바라보았다. 열네 살 밖에 되지 않은 소녀는 차분하고 느긋했고, 자신감이 넘쳐났다.
“역시, 부의는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하는 것인가…….”
그는 의술을 사랑했고, 부의는 의술의 한 갈래면서 가문의 근원이니, 어찌 그라고 관심이 없었겠는가.
그도 이 집록을 백번도 넘게 읽어보았지만, 늘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는 현청관의 도사와 가까워져 책의 한 장을 본떠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였으나, 그 사람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알려줄 수는 없었고, 셋째 숙부는 그제야 마음을 접게 되었다.
긴 세월 동안 전승해온 현청관조차 이러한데, 한 번도 전승하지 않은 그의 집안은 어떻겠는가?
“미야.”
셋째 숙부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집록을 네게 줄 테니, 잘 아껴쓰거라.”
“셋째 숙부님, 이걸 제게 주신다고요?”
조카가 조금 긴장한 듯 하자, 그는 조카의 나이를 생각하고는 살짝 웃으며 정미의 어깨를 토닥였다.
“미야, 정씨 일가에서 오직 너만이 이 책을 알아볼 수 있단다. 네게 주지 않으면 누구에게 줄 수 있겠느냐? 그저 네가 잘 보관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앞으로도 우리 정가의 부법을 전수해주고, 선조의 심혈이 이렇게 묻히지 않게끔 해주었으면 하는구나.”
정미는 그 선조가 그때 부법을 전승하지 않은 것은, 심혈을 묻히든 말든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선조조차 신경쓰지 않았으므로, 정미는 더욱이 가업을 성장시키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셋째 숙부의 간절한 눈빛 아래 정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할게요. 셋째 숙부님, 앞으로도 저를 도와주세요.”
셋째 숙부는 정미의 뜻을 이해한 듯 웃었다.
“어린 녀석이 생각이 깊구나. 걱정 말거라. 나중에 누가 의심하면 숙부가 도와주마. 우리 정가는 원래 부의 가문이었잖느냐.”
정미는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셋째 숙부의 말에, 북명진인이 오더라도 무섭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북명진인이 그렇게 큰 인물인데, 나 같은 어린 계집을 진지하게 여기진 않겠지?’
정미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기분 좋게 지통부를 만든 후 환안을 데리고 백부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