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첫 시험
이 거자의 손을 치료해줘야 했기 때문에, 정미는 병풍 뒤에 있지 않았다.
환안은 병풍을 돌아 들어가 복도를 지나 한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거자는 유모(*帷帽: 여인들이 외출 시 쓰는 모자로, 챙에 베일이 달려 있어 얼굴을 가릴 수 있음)로 얼굴을 가린 채 청삼을 입고 있는 여인이 보여, 크게 놀라 급히 사과했다.
“실수로 아가씨의 규방에 들어왔습니다. 제가 경솔한 탓입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정미는 이를 악물었다.
‘규방은 무슨. 이렇게 초라한 규방이 어디 있어? 손이 아니라 눈을 다친 거 아냐?’
“멈추세요. 효렴은 손을 치료해야 하지 않습니까?”
정미의 목소리는 청아하고 온화했으며, 소녀의 풋풋함이 묻어나왔다. 거자는 이 목소리를 듣고 귀신을 본 듯 입을 놀렸다.
“아가씨, 자중하십시오. 방하착서(*榜下捉壻: 송대 결혼 문화 중 하나로, 과거의 방이 붙은 날, 방에 이름이 올려진 사내를 사위로 삼기 위해 다투던 것)를 미리 하고 싶으신 모양인데, 저는 죽어도 따르지 않을 겁니다!”
‘방하착서라니?’
겨우 열네 살이 된 어린 아가씨는 그 거자의 한마디에 화가 나 뒤로 넘어갈 것만 같았다.
정미는 의관에 올 때 항상 수시로 아혜와 이야기를 나눴고, 그래서 아혜도 바깥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혜의 미친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방하착서라니. 네가 함부로 마음을 쓰니까 그렇지! 내가 말했잖아, 이런 별거 아닌 것과 보잘것없는 사람을 위해 네 정혈을 함부로 쓰지 말라고. 그렇게 말을 안 듣더니, 이거 봐. 미움을 받게 되었지? 정미, 설마 정말 방하착서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지? 치료고 뭐고 됐으니, 얼른 가서 비웃어주기나 하라고!」
‘지금 어떻게 번복할 수 있겠어! 만약 오라버니도 내일 시험을 쳐야 한다는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이 사람한테 아무런 동정심도 들지 않았을 거고, 내가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지 않았을 텐데!’
정미는 정요의 만물을 비추며 누구에게나 봄볕 같은 따스함을 베푸는 성정을 절대 배울 수 없었다. 거자가 고집스럽게 밖으로 나가려 하자, 바로 눈을 부라리며 그냥 나가게 내버려뒀다.
‘고집부려봐, 어디 한번 부려보라고! 그냥 네 여동생을 그 못생긴 사내에게 시집보내면 되겠네!’
환안은 거자가 떠나려고 하는 것을 보고 급히 다가가 막았다.
“어딜 가십니까. 저희 아가씨께 치료를 받지 않으실 겁니까?”
“날 기만하지 마시오. 이 수도에 이런 짓이 성행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매년 금방이 발표될 때, 명단에 있는 젊은 사내를 기절시켜 마대 자루에 넣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요! 깨어나는 순간 혼인을 해야 하지요. 나, 나는 절대 그런 일을 견딜 수 없습니다!”
환안이 팔짱을 끼고 그를 흘겨보았다.
“어디 아프신 거 아닙니까. 저희 아가씨께서 정말로 방하착서를 한다고 해도, 당신을 잡을 리는 없지요. 당신은 시험장에도 못 들어가지 않습니까?”
정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누가 방하착서를 한다는 거야. 이 계집은 도대체 언제 말을 제대로 할 줄 알게 될까! 도저히 못 기다리겠군. 정말 나중에 팔아버려야겠어.’
그때 거자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족발처럼 싸맨 오른손을 보자 그제야 자신의 처지가 떠올랐다!
손을 다쳤고, 시험을 칠 수 없게 되었기에, 결국 방하착서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가서 그 최 씨의 짜증나는 얼굴을 두들겨 패준 뒤에 강에 뛰어들어 자살하면 될 일인 것이었다!
정미의 침묵은 말로 그를 붙잡는 것보다 효과가 좋았고, 사람들은 어쨌든 목숨을 아끼려 했기에, 거자도 표정이 변하더니 몸을 돌려 상머리에 앉아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 줄기의 희망을 안고 물었다.
“아가씨께서 정말로 의원이십니까?”
“전 의원이 아닙니다.”
소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거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럼 왜 저를 희롱하십니까. 저, 저도 존엄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저는 부의입니다.”
정미가 이를 악물었다.
“당신에게 존엄성이 있고, 죽어도 복종하지 않을 걸 압니다. 그래서, 도대체 제게 손을 보여줄 겁니까, 말 겁니까?”
‘공부하는 사람들은 원래 모두 이렇게 말이 많나? 그럼 왜 우리 둘째 오라버니는 말도 적고, 내가 좋아하는 말만 하는 거지? 역시, 이 세상의 사내 중 둘째 오라버니가 제일 좋은 사내구나!’
“봐주십시오!”
손을 봐준다는 말에 거자의 말이 간결해졌고, 다시 방으로 몇 걸음 돌아와 정미와 일 장(*一丈: 약 3m) 떨어진 거리에서 멈춰서서는 의심스럽게 물었다.
“아가씨께서 정말로 부의란 말입니까?”
정미는 속으로 맹세했다.
‘앞으로 다신 거인과 수재들 같은 이상한 자들은 봐주지 않아야지!’
“그렇게 멀리 있으면 발도 보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가까이 앉으면 아가씨께 실례가 되지 않겠습니까…….”
거자가 몹시 억울해했다.
정미는 생각했다.
‘두 번째 맹세까지 하게끔 만드는구나!’
환안이 거자를 정미의 앞으로 끌고 갔다.
“또다시 쓸데없는 소리를 하시면, 당신의 여동생은 그 마흔 넘은 못생긴 사내에게 아기를 낳아줄지도 모릅니다!”
‘말 한번 잘했네!’
정미는 자신의 여종을 흘끗 쳐다보며 생각했다.
‘역시 일단 팔지 말자. 이 계집은 아직 쓸모의 여지가 남아있는 것 같으니.’
거자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하,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그러고는 손을 정미 앞으로 보이며 눈을 감았다.
“아가씨, 그럼 한번 봐주십시오.”
“가능하면 부의라고 부르십시오.”
눈을 감아서인지, 소녀의 목소리는 한 점의 속됨도 없이 순수하고 청량하게 들려왔다.
“이 자의 면포를 풀거라.”
정미가 환안에게 명령하고는 두 눈을 꼭 감은 거자에게 말했다.
“조금만 참으세요.”
“아가씨 마음대로 하십시오!”
‘설마 내가 여인들 앞에서 아프다고 울부짖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거자는 무시당한 기분이 들어 표정이 엄숙해졌다.
정미는 이를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이 사람은 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표정을 짓는 거지? 그저 면포를 푸는 것뿐인데, 설마 방금 셋째 숙부님이 독한 술로 상처를 씻을 때보다 아플까. 공부하는 사람들의 세계는 역시 나 같은 평범한 소녀가 이해할 수 없구나!’
최근 환안은 정미를 따라 의관에 드나들며, 정미에게 가장 총애를 받는 여종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고, 아가씨가 배우고 싶은 것은 그녀도 같이 배워야 아가씨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환안도 정미를 따라 셋째 숙부님이 알려주는 약리학을 열심히 들었고, 몰래 입구의 떠돌이 개에게 면포를 자주 둘러주곤 했다.
당연히 처음엔 그 개가 뒷다리를 다쳐서 둘러준 것이었고, 나중엔 그저 순수하게 둘러매는 것을 연습하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마지막에 환안이 그 개의 꼬리를 싸맬 때, 개는 결국 참지 못하고 다리를 고쳐준 은인에게 미친 듯이 짖다가 도망가버렸다. 그리고 그 이후로 다신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 또 연습할 상대가 생겼구나!’
환안은 갑자기 이 거자가 조금 마음에 들었고, 그의 손을 들고 시원스럽게 면포를 풀어내고는 눈을 반짝이며 뿌듯해했다.
“아가씨, 됐습니다!”
정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했다.
“잘했네.”
환안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바보처럼 웃었다.
‘역시, 개를 찾아 연습하길 잘했어!’
정미가 거자의 상처를 살펴봤다.
상처가 흉악해 보이긴 했지만, 새로 배운 ‘지혈생기부’를 쓰면 되기에, 별로 큰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거자의 손목에 손가락을 올렸다.
손가락은 살짝 차가우면서 부드러웠고, 소녀의 좋은 향기가 코를 찌르자 거자는 놀라 손을 뿌리쳤다가 아파서 비명을 질렀다.
정미는 어이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고 싶으신 겁니까?”
거자가 창피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워, 원래 아픔을 잘 참는 편인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정미는 가슴팍을 쓸어내리며 이 거자의 얼굴에 신발 자국을 내지 않도록 화를 가라앉혔고, 이를 갈며 말했다.
“제 말은, 계속 함부로 움직이면 그냥 이 손이 망가지게 내버려두고 당신의 여동생이 그 늙고 못난 사내와 낳은 아기를 안고 친정으로 가는 걸 지켜봐야 할 거라고요!”
“손, 다시 뻗으세요!”
두 소녀에게 말로 공격을 받으며 힘이 다 빠진 거자는 얌전히 손을 뻗었고, 다신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정미는 손을 다시 그의 손목 위로 올렸고, 손가락을 살짝 휘어 감고는 말했다.
“정말 골절이 있군요. 이건 좀 성가십니다.”
거자가 정미를 바라봤다.
소녀는 유모를 쓰고 있어서, 얇은 천이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소녀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눈살을 찌푸리고 입을 꾹 다문 채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왠지 모르게, 거자는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깨달았는데, 아마 겹겹으로 쳐진 얇은 천 사이로 느껴지는 그녀의 진지함은 마치 그가 공부를 할 때의 모습과 같아 보여서였던 것 같았다.
“외상은 제가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골절은 아직 제가 고치지 못합니다.”
거자의 막연한 표정에 정미가 한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잠시 통증을 멈추어 시험을 볼 수 있게 해드릴 순 있습니다.”
아혜의 말에 따르면 골절은 상절과(傷折科)에 해당하였고, 정미가 아직 배울 수 없는 것이라 했다.
거자는 얼떨떨해진 채로 듣다가 그 중 한마디에 꽂혀 반박했다.
“저는 고통이 두렵지 않습니다.”
정미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럼 왜 의관에 왔습니까?”
“다쳐서 붓을 들 수 없었으니까요.”
“왜 붓을 들 수 없었는데요?”
“손이 아파서요.”
정미의 표정은 어두워졌고, 꺼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셋째 숙부에게는 진료를 부탁하려고 무릎을 꿇고 대성통곡하려 하더니, 왜 나한테 와서는 입만 살아가지고 자존심을 세우는 거지? 됐다. 멍청한 것과 실랑이하지 않겠어!’
“몸을 돌려 앉으세요.”
정미가 쌀쌀한 말투로 당연한 듯 명령한 탓인지, 거자는 얌전히 몸을 돌렸다.
정미는 손을 들고 부적을 그려 기운을 넣고 물에 담갔다. 그렇게 만들어진 연한 분홍색의 부수를 들고 그를 불렀다.
“다시 돌아보세요.”
거자가 다시 다가오자, 정미가 부수를 건넸다.
“마셔요.”
거자는 멍하니 물잔을 바라봤다.
‘이 아가씨의 목소리는 아주 젊어 보이는데, 정말 부의가 맞을까? 이 물의 색깔이 이상한 것이, 혹시 마셨다가 기절하고 깨어나면 바로 혼인하는 건 아니겠지?’
정미는 오늘 이 거자에게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고 생각했기에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왜 넋을 놓고 있습니까? 아, 알겠다. 물의 냄새가 그리 좋지 않으니 마시기 두려운 것이지요? 꿀을 좀 넣어드리겠습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환안, 가서 꿀단지를 가져오너라.”
‘누가 약에 꿀을 탄다는 거야!’
거자는 모욕을 당한 느낌에 물잔을 들고 단번에 다 마셨고, 잔을 옆에 내려놓고는 옷소매로 입을 닦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두렵지 않습니다!”
정미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저렇게 의기양양할 필요가 뭐 있지? 그저 비릿한 맛이 나는 물을 한잔 마셨을 뿐인데, 누가 보면 비상(*砒霜: 독의 일종)을 마신 줄 알겠어! 게다가, 게다가 옷소매로 입을 닦다니, 너무 거칠구나.’
오라버니의 고상함에 익숙한 정미는 이 멍청한 거자가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