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다친 서생
오라버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정미가 기분이 좋지 않은 듯 말했다.
“당연히 그저 음식을 담백하게 바꿔서만은 아닐 거야. 사실 부수도 마셔서 이렇게 빨리 회복했던 거거든.”
정철은 부수에 대해 묻지 않고 한숨 쉬며 말했다.
“미미, 그랬으면 왜 일찍 말하지 않았어. 어찌 혼자 속에 담아두고 있었던 거야?”
정미가 눈을 내리깔았다.
“오라버니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을걸. 게다가 정요는 그때 어렸잖아. 요괴가 아니라면 아기 때부터 나를 해칠 생각을 할 수 있겠어? 남들에게 말하면, 아니 어머니께만 말하더라도, 그저 소란을 피우는 거라고 생각하실 거야.”
그러고는 정미가 눈을 들었다.
“오라버니가 날 믿어줘서 그나마 다행이야. 오라버니, 앞으로 정요와 조금 거리를 둬. 정요는 좋은 사람이 아냐!”
“그래, 알겠어.”
정미는 조금 안심이 된 듯 그제야 선물 이야기를 꺼냈다.
“오라버니, 내일모레면 시험이잖아. 다른 사람들은 뭘 선물해줬어?”
정철이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는 신발을 주셨고, 아버지와 셋째 남동생은 붓과 먹, 그리고 다른 여동생들은 신발창이랑 덧신 같은 걸 줬어.”
정미는 지금 정요가 특히 신경 쓰였기에, 정철에게 말했다.
“볼래.”
정철은 받은 선물들을 가져와 보여주었고, 정미는 바로 정요가 선물한 정밀하게 수가 놓인 신발창을 살펴보았다. 그날보다 확실히 작아져 있었다.
정미는 이를 들고 불쾌한 듯 말했다.
“이건 신발에 맞지 않아. 발에 배길 거야.”
“괜찮아. 어쨌든 사용하지 않을 거니까. 미미는 뭘 줄 거야?”
“오라버니가 맞혀볼래?”
정미는 갑자기 흥이 깨진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신발창은 정요의 것은 물론이고, 정동의 것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정미도 자신에게 실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전엔 정요보다 공부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대부분의 시간을 공부에 쏟아부었고, 자수 같은 일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미가 만약 신발창을 준비한 거면, 오라버니는 그걸 신고 시험을 보러 갈게. 행운의 상징으로.”
정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정요가 세상에 둘도 없을 신발창을 만든다고 해도 오라버니는 내가 준 것을 신는구나. 정요는 시간을 낭비한 거나 다름없네.’
정미가 옷소매에 손을 넣어 빳빳한 신발창을 만지다가, 갑자기 멈칫했다.
‘정요는 아주 똑똑한 사람이야. 내 방에 두 번밖에 와보지 않았는데도 오라버니가 준 그 나무 인형들을 기억해 거의 똑같이 손수건에 수놓을 수 있었잖아. 그런데 그런 똑똑한 사람이 오라버니의 발 크기도 모를까? 굳이 찾아와서 묻고, 내가 크다고 하니 정말 작게 잘라버리다니?’
정미는 정요의 수상한 점을 발견한 뒤로 계속 과거를 돌이켜봤고, 세세한 것들이 떠오를수록 놀라웠다.
‘정요가 내게 해를 입힐 땐, 항상 나를 위하는 척했었지!’
정미는 어려서부터 그런 계산을 하는 사람이 두렵게 느껴졌고, 정요가 도대체 무슨 나쁜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앞으로 정요를 잘 경계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왠지 준비한 신발창이 불운하게 느껴져 꺼내고 싶지 않았고, 같이 준비한 덧신을 건넸다.
“손재주가 좋지 않아서 덧신만 한 쌍 만들었어. 마음에 들면 신어줘.”
정철이 건네받고 보니 그 덧신은 정말로 그저 평범한 덧신이었다. 새하얀 면포에 세밀한 바느질로 안쪽에 한 마리의 잠자리만 수가 놓여있었고, 한눈에 봐도 정미가 한 것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정철이 칭찬했다.
“미미가 잠자리 수를 갈수록 잘 놓는구나. 오라버니는 이 무늬가 익숙해서, 신으면 편안할 것 같아.”
정미는 오라버니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신어. 분명 합격할 거야! 자, 그럼 이만 나는 오라버니의 복습을 방해하지 않을게.”
* * *
다음 날, 정미는 평소처럼 제생당으로 가 병풍 뒤에 숨어서 환자들을 관찰했다.
잠시 후, 밖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리더니 서생으로 보이는 젊은이가 뛰어들어왔다.
그 사람은 오른손을 감싸 쥐고, 들어오자마자 셋째 숙부에게 달려들며 애원했다.
“의원님, 어서 제 손을 치료해주세요. 내일, 내일이면 시험을 쳐야 합니다!”
그 서생이 들어오는 걸 막았던 머슴이 급히 들어왔다.
“셋째 나리, 이 자는 맞은편 덕제당(德濟堂)에서 쫓겨난 자입니다!”
그러고는 다가와서 더욱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아내(衙內)에게 죄를 지었다고 하더군요.”
백성들은 관리의 자제들을 아내라고 부르기도 했다. 민간인은 관료와 싸워도 이기기 어렵기에, 제생당 뒤에 회인백부가 있긴 했지만 결국엔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니 젊은 서생 때문에 관료에게 미움을 살 필요는 없었다.
정가(程家)의 셋째 나리가 담담하게 그 머슴을 흘끗 쳐다봤다.
“제생당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곳이네. 이 문에 들어왔으면 내 환자야.”
그리고 황급한 표정의 서생에게 말했다.
“효렴(*孝廉: 효성스럽고 청렴한 자)은 당황하지 말고, 제게 보여주십시오.”
내일 시험을 봐야 한다면, 눈앞의 이 초조한 표정의 서생에겐 거인(擧人)의 신분이 있는 것이라, 보통 백성들은 ‘나리’라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맞은편의 덕제당에서 쫓겨난 걸 보면 이 거자(擧子)는 비천한 집안 출신인 것이 분명했고, 죄를 지은 이유가 작은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 거자가 감격하며 말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어서 제 손의 상처를 치료해주세요. 내일 시험에 영향을 주어선 안 됩니다!”
셋째 나리가 거자의 손을 잡아당겨 보았고, 눈살을 찌푸리며 약동(藥童)에게 명령했다.
“어서 족집게와 면포, 그리고 독한 술 등을 가져오거라.”
약동이 셋째 나리가 말한 물건들을 가져오자, 셋째 나리는 거자의 상처를 치료하는데 집중했다. 그 거자도 깡다구가 있는 사람인지, 입술을 꽉 깨물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병풍 뒤에 숨은 정미는 이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일주향(*약 30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 셋째 나리가 치료를 마치고 부드러운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잠시 망설이다가 거자에게 말했다.
“효렴, 당신의 오른손은 그저 외상이 아닙니다. 손목에 골절이 있는 것 같은데, 그저 외상이든 골절이든, 한 달 안엔 붓을 들지 않는 게 좋습니다.”
셋째 나리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거자가 창백한 얼굴로 추태를 부렸다.
“골절이요? 의원님, 사, 사실이 아니지요? 그렇지요?”
셋째 나리의 침착한 눈빛에 동정이 묻어나오자, 거자가 뒷걸음질 쳤다.
머슴이 다가왔다.
“저희 나리께서 상처를 치료해주셨으니, 이제 그만 나가시오.”
머슴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거자가 그를 밀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 최(崔) 씨가 나를 해쳤으니, 나, 나도 그와 맞붙어야겠다!”
거자는 미친 듯이 웃으며 이미 이성을 잃은 듯 굴었다. 머슴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 거자에게 거인의 신분이 있든 말든 그의 팔을 잡고 밖으로 끌어내며 말했다.
“여기서 소란 피우지 마십시오. 할 일을 하러 가세요. 의관은 아직 환자들을 치료해야 하는데, 환자들이 당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들어오지 못할 지경입니다!”
셋째 나리는 의원으로서 생로병사에 대한 일에 대해 익숙해진 바였다. 하지만 이 거자가 3년 동안 힘들게 공부했고, 곧 시험장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런 사고를 당했으니, 보통 사람이면 견디기 힘든 일이란 생각을 했다. 만약 이 일로 정말 미쳐버린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셋째 나리가 결국 참지 못하고 부모님의 마음으로 권했다.
“손의 상처는 큰일이 아닙니다. 길어봤자 100일 정도 잘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습니다. 효렴은 아직 젊은데 이 일에 얽매여봤자 작은 일로 큰 손해를 보는 것이지요.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 상처를 돌보고, 3년 뒤 다시 시험장에 오면 분명히 금방(*金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이름을 써서 거리에 붙이던 글)에 이름을 올릴 것입니다!”
거자가 셋째 나리를 슬쩍 흘겨봤고, 절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다신 기회가 없습니다. 다신 없어요. 제 공부를 위해 저희 집은 아주 가난해졌고, 어디서 빌리려고 해도 빌릴 곳이 없습니다. 수도로 오는 여비도 여동생이 몰래 마흔 살이 넘은 못생긴 사내와 정혼해서 받아온 돈이란 말입니다! 제, 제가 어찌 돌아가 어머니와 여동생을 볼 면목이 있겠습니까. 무슨 돈으로 여동생의 혼인을 무를 수 있겠습니까!”
셋째 나리는 이 거자의 빈곤함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대량은 백여 년 동안 이어져, 마침 천하가 안정되고 문풍이 성행하는 시대가 찾아왔다. 거인은 예전만큼 귀하지 않았고, 벼슬길에 오르고 싶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열심히 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십몇 년에서 심지어 몇십 년을 기다려야 관직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향시에만 급제해도 향신과 지주 등의 사람들이 재물을 바칠 것이고, 농가를 이끌며 먹고 사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가난한 수재들처럼 어려운 삶을 살진 않았다.
‘머슴의 말이 맞구나. 이 거자는 분명 죄인일 것이다.’
이 거자가 죄인이든, 손의 상처든, 셋째 나리는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고, 그저 한숨을 쉬고는 거자가 넋을 잃은 채 밖으로 나가는 것을 쳐다보았다.
‘이 거자는 분명 회시로 단숨에 신세를 뒤집을 생각이었을 것인데, 지금 당한 사고로 어쩌면 자살할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그는 병은 고칠 수 있어도 마음은 고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효렴, 어찌 되었든 간에 ‘푸르고 무성한 산이 있는 한, 땔나무 걱정은 없다’라는 말처럼, 살아가면 어쨌든 꽃이 피는 날이 있을 겁니다.”
거자의 발걸음이 멈칫하더니, 고개도 돌리지 않고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이때,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려주세요.”
셋째 나리와 거자가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환안, 왜 나왔느냐?”
셋째 나리가 눈살을 찌푸리고 조용히 물었다.
환안이 허리를 굽히고 작게 말했다.
“셋째 나리, 저희 아가씨께서 거인 나리의 상처를 보고 싶다 하십니다.”
“허튼소리!”
셋째 나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누가 들을까 봐 목소리를 더 낮추고 말했다.
“이 거자의 상처는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다. 면포를 제때 바꾸고 잘 돌보면 되는데, 뭐하러 보려고 한단 말이냐!”
“셋째 나리, 저희 아가씨께서 말씀하시기를, 의원은 부모의 마음으로 환자가 사내든 여인이든 상관하지 않아야 된다고 하셨고, 그럼 환자도 의원이 사내든 여인이든 상관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아가씨께선 혹시 저 자가 순조롭게 시험을 볼 수 있을지 모르니 한번 시험해보고 싶다고 하십니다.”
“그게 어찌 말이 되느냐!”
“셋째 나리, 아가씨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아가씨께서 보고 치료하지 못하셔도 그저 지금과 같을 뿐이고, 만약 치료하게 되면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의심이 한 사람에게 생존의 기회를 주는 것보다 중요하겠습니까?”
셋째 나리가 당황하더니 결국 마지막 말 한마디에 자극을 받아 병풍 뒤를 쳐다보고는 생각했다.
‘정미가 점점 크는구나. 다신 저 아이를 어린 소녀로 봐선 안 되겠어. 내가 정미에게 의학을 배우는 걸 허락해놓고선, 지금 저 아이의 선량한 마음 앞에서 고리타분한 사람이 될 필요 있겠는가!’
셋째 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환안은 입가에 웃음을 띠며 얼떨떨한 표정의 거자 곁으로 가서 낮게 말했다.
“효렴께선 소인을 따라오세요.”
그 거자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방금 그 여인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사내 옷을 입으면 모를 줄 알았겠지만, 그는 바로 의심의 눈초리로 셋째 나리를 쳐다봤다.
셋째 나리가 웃었다.
“저희 의관에 이쪽 방면으로 뛰어난 의원이 있으니, 효렴은 따라가셔도 됩니다.”
거자는 지금 한 가닥의 희망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생각할 필요도 없이 바로 셋째 나리에게 절을 했다.
“의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고는 의심스럽게 환안에게 말했다.
“그럼 형……, 형님께서 안내해주시오.”
환안은 ‘따라오세요.’ 라는 한마디와 함께 몸을 돌려 걸어갔고, 거자는 급히 그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