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84화 (84/375)

84화. 여종으로 삼다

“이름을 하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반반이 고개를 들고 한지를 흘끗 쳐다보자, 긴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한지는 기분이 조금 이상했지만 이런 이상함이 어째서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고, 자신은 세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여종을 보면 피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왜 반감이 들지는 않는지 알 수 없었다.

이때 문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한지는 숨을 돌리고 고개를 돌렸다.

농금이 문 앞에 서서 그릇을 들고 쭈뼛쭈뼛 말했다.

“세자, 소인이 빙탕연와죽(氷糖燕窩粥)을 끓여왔습니다. 드시고 속을 좀 데우세요.”

2월은 따뜻해졌다가도 갑자기 추워지는 때였고, 속이 상한 채로 먼 길을 달려왔으니, 농금의 말에 한지는 정말로 속이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달달한 죽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담담하게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따뜻한 차를 마시면 돼.”

농금은 솔직한 아이였기에, 세자가 거절하자 붉어진 얼굴로 그릇을 들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말을 더듬었다.

“세자, 그, 그럼 소인이 구기자죽을 가져오겠습니다. 공복에 차를 드시면 안, 안 좋습니다…….”

이 나이 또래의 소년은 젊은 여인들에게 끌리는 기분을 느끼는 법이었다.

한지는 이 명분뿐인 통방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지만, 그녀가 이렇게 긴장하며 쭈뼛대니, 새로 온 여종이 더욱 똘똘하고 활발해 보였다. 그 ‘반반’이라고 이름을 지어준 여종이 더욱 마음에 드는 동시에, 이 우둔한 통방에게도 약간의 동정심이 일었다. 한지는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가 그 그릇을 건네받고 뚜껑을 열어 한입 크게 마셨다.

반반이 단정하게 접힌 손수건을 조용히 건넸다.

한지가 그녀를 흘끗 보고는 손수건을 건네받고 입을 닦았다.

“됐다. 너희 모두 물러나거라. 난 혼자 자는 게 습관이 됐으니 밤새 나를 모실 필요 없다.”

농금은 본분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라, 이 말을 듣자마자 몸을 돌려 나갔다.

반반은 나가기 전에 한지에게 무릎을 살짝 꿇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죽을 드셨으니, 바로 누우시면 안 됩니다. 방 안에서 조금 걸으시는 게 좋지요. 만약 뭔가 필요한 게 있으시면 소인을 부르세요. 소인이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한지는 반반을 빤히 쳐다보았고, 여종 하나가 이런 지식을 알고 있는 것에 놀라워했다. 그는 그녀의 맑은 눈동자를 마주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가볍게 닫혔다. 이때쯤이면 마음이 진정되었어야 할 한지는 되레 점점 온몸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손을 올려 이마를 짚어보니 평소보다 조금 더 뜨거운 것 같았다.

한지가 불편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오늘 너무 급히 돌아오느라 찬 바람을 쐰 탓에, 감기에 걸린 건가?’

한지는 탁자 앞으로 걸어가 손을 뻗어 차 한잔을 따랐다. 뜻밖에도 그 차는 따뜻한 상태였고, 게다가 그가 좋아하는 은침차(銀鍼茶)였기에, 한지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농금은 한지에게 이 차를 준비해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한지의 머릿속에 저절로 맑은 눈동자가 스쳤고, 자신도 모르게 차를 연이어 세 모금 정도 마셨다. 다시 차를 따르려고 하니 다 마시고 없었다.

그는 갈증이 더욱 심해져 결국 참지 못하고 외쳤다.

“반반, 차를 더 가져오거라.”

“예―”

꾀꼬리 같은 소녀의 목소리는 그 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들리자 한지는 찌릿찌릿한 느낌이 들었고, 불편한 마음이 더욱 심해졌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었고, 재촉하며 말했다.

“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급한 발소리가 작게 들려왔고, 문이 살짝 열리며 반반이 찻물을 들고 걸어들어왔다.

반반은 안으로 걸어들어오며 혼잣말을 중얼댔다.

“이상하다, 차를 준비해뒀었는데…….”

그리고 찻상 옆에 와서 찻주전자를 들어보더니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한지를 바라봤다.

“이 안에 든 차를 다 드신 겁니까?”

“잔소리 그만하고, 어서 차를 한잔 내주거라.”

한지는 몸이 편치 않아 짜증을 내듯 말했다.

위국공부에서 세자의 이런 모습을 아는 사람은 아주 적을 터였다.

하지만 반반은 무서워하지 않고 새로 가저온 찻물을 내려놓고는 앞으로 다가왔다.

“더 드셔선 안 됩니다. 어, 얼굴이 아주 빨개지셔서…….”

반반은 손을 뻗어 한지의 이마를 짚었다.

한지는 피하고 싶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러지 않았다.

소녀는 까치발을 하고 있었고, 부드러운 손가락에는 찬 기운이 남아있어 어지러운 머리가 잠시 편해지는 듯했다.

한지는 난초 같은 향기가 자신의 몸을 감싸오는 것이 느껴졌다.

“세자, 조금 열이 납니다. 어서 누우세요.”

반반은 겁도 없이 곧바로 한지를 밀어 눕혔지만, 행동이 거칠진 않았다.

한지가 반응하려 했을 땐 이미 침상에 누운 뒤였다.

반반이 옆에서 반쯤 무릎을 꿇고 물었다.

“어지러우신 겁니까?”

한지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오늘은 왠지 자신답지 않다고 느꼈다. 몸과 단절된 것처럼 손발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반반이 허리를 굽히며 다가왔다.

“소인이 주물러 드리겠습니다. 땀을 좀 내면 나아지실지도 모릅니다.”

가느다란 열 손가락이 소년의 이마를 가볍게 주물렀다.

머리는 점점 괜찮아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 알 수 없는 조열은 오히려 복부 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잠시 후 소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옷가지가 모두 땀에 젖었습니다. 소인이 벗겨서 땀을 닦아드릴게요.”

“그래…….”

어둠은 점점 짙어지고, 나뭇가지 끝에 낫과 같은 달이 걸려 차갑고 푸르스름한 빛을 내고 있었다.

방 안의 휘장은 어느새 내려져 있었고, 휘장에 달린 구슬들은 오랫동안 계속 흔들렸다.

* * *

다음 날, 한지가 깨어나 깜짝 놀랐다.

“네, 네가 왜 여기 있느냐?”

반반은 면 이불로 몸을 가린 채 얼굴을 붉혔다.

“어젯밤, 어젯밤 소인은 이미 세자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한지가 이마를 짚고 잠시 멍해졌다. 그러자 어젯밤의 장면이 머릿속에 하나씩 스쳐 지나갔다.

‘아름답고, 미묘하고, 미친 듯하고…… 무엇보다도, 계속 요구한 쪽은 나다!’

한지는 옆에 있는 소녀를 빤히 쳐다봤고, 그녀의 목에 이불로 가리지 못한 붉은 자국이 있는 것을 보자니 화내고 싶어도 화낼 수 없었다.

반반이 몸을 돌려 조용히 옷을 입고, 다 차려입은 후 맨발로 서서 머리를 숙이고 작게 말했다.

“소인……, 소인이 가서 부인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소인은 감히 세자를 모실 능력이 되지 않는다고……. 걱정 마세요. 부인께서 더 좋은 분을 보내주실 겁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한지를 살짝 쳐다본 후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잠깐.”

반반이 문 앞에 다다랐을 때, 한지가 결국 입을 열었다.

“됐다. 그냥 남거라. 하지만 앞으로 내 허락 없이는 이 방에 들어올 수 없다!”

“예, 자비를 베풀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반반의 눈동자가 생기를 되찾았고, 한지를 쳐다보며 사뿐히 절을 하고는 아무 미련 없이 나갔다.

남은 한지는 공허한 듯 침상의 붉은 자국을 보며 넋을 놓았다.

‘결국 정요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구나. 앞으로, 앞으로 다신 그 여종을 건들지 않겠다!’

하지만 한창 청춘인 열일곱 소년의 정력은 남아돌았고, 한 번 남녀의 정을 맛본 뒤로 다시 맛보고 싶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한지는 쉽게 미인을 얻을 수도 있었고, 그 여인의 허락이 없어도 되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물건처럼 바꿀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결심이 끝까지 지켜질 수 있을 리 없었다.

이후 한지는 반반과 여러 번 만남을 가졌고, 횟수는 점점 더 많아졌다. 그도 점차 통방은 이렇게 사람을 섬기는 것이라 여기게 되었고, 그저 마음속엔 정요 하나만 있으며 나중에 정요에게만 잘해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 * *

정미가 신발창을 다 완성하자, 정요는 가장 빨리 이 소식을 듣고 교용에게 귓속말로 몇 마디 당부했다.

교용은 잠시 놀라더니 계속 고개를 끄덕였고, 정요가 건넨 물건을 옷 안에 넣고 조용히 나갔다.

시험 날이 점점 다가오자, 정미도 덩달아 긴장이 되어 며칠 동안 정철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렇게 눈 깜짝할 새 시험날이 되었고, 그녀는 그제야 그동안의 성과를 가지고 장청원(張靑苑)에 가 둘째 오라버니를 찾았다.

정철은 창문 앞의 책상에 앉아 복습을 하고 있었다. 정미는 선물을 팔근에게 전하라 하지 않고 조용히 걸어 들어갔다.

그녀는 살금살금 정철의 뒤로 가서 그의 눈을 가리고 목소리를 가늘게 하며 물었다.

“오라버니, 내가 누구게?”

“어, 정요 맞지?”

‘뭐라고?’

정미가 어두운 얼굴로 손을 놓았다.

정철은 여동생이 또 화를 낼 것 같아 속으로 웃었다. 그때 갑자기 귀가 아파져 왔다. 작은 손이 그의 귀를 잡아당기며 고개를 돌리게 했다.

“미미, 어서 놔!”

“귀가 내 목소리도 알아듣지 못하니, 내가 오라버니 대신 혼내줘야겠어!”

정철이 쓴웃음을 지으며 사과했다.

“미미, 방금은 널 놀린 것뿐이야. 진짜인 줄 안 거야?”

“누가 내 목소리를 정요로 들으랬어!”

정철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미미, 역시 너랑 정요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거지?”

그러자 정미도 짜증을 거두고는 진지해졌다.

“……오라버니, 정요는 내가 생각해온 사람이랑은 다른 것 같아.”

정미와 정요는 어려서부터 서로 떨어지지 않곤 했다. 그저 자매의 정이 깊은 것이라 생각하든, 다른 사람의 눈엔 서녀의 일방적인 양보라고 생각하든, 최소한 정미의 입에서 정요에 대한 부정적인 말이 나온 적은 없었다.

하지만 정철은 여동생의 갑작스러운 말에 놀라지도 의심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집중하며 들어주었다.

정미는 갑자기 용기가 생겼다.

환상 속에서 본 그 광경들을 쉽게 말할 순 없었다. 그녀가 말하면 남들은 그저 쓸데없는 소란이라 여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자신의 오라버니만큼은 아무런 이유 없이 자신의 말을 들어줄 것 같았다.

“정요가 요리를 잘해. 그래서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신기한 음식들을 나한테 해주었어. 그런데 최근 내가 의학책을 읽으면서 셋째 숙부님께도 간단한 약리학에 대해 배우고 나니, 그 음식들이 많이 먹으면 피부가 나빠지는 것들이라는 걸 알게 됐어. 오라버니, 봐봐. 작년에 내가 기절한 이후로 햇빛도 덜 보고, 음식도 담백하게 먹으니 피부가 많이 좋아지지 않았어?”

정철은 진지하게 듣다가, 저절로 그 옥처럼 깨끗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열네 살의 소녀는 책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고, 마침 창문의 맞은편이라 따뜻한 봄볕이 내려오며 그녀의 얼굴을 투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작은 솜털마저 옅은 금빛처럼 보여 사랑스러웠다.

정철이 정미를 빤히 쳐다보았다.

‘미미는 어릴 때도 바로 이런 모습이었어. 피부는 옥과 같고, 입술은 붉고 이는 하얘 마치 눈인형처럼 예뻤지.’

정철이 처음 백부에 왔을 때, 그는 두려움이 가득했고 모든 것이 조심스러워 마치 뿌리가 없는 부평초처럼 이곳저곳을 떠다녔다. 남들의 흠모와 질투는 그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고, 어느새 눈을 뜨면 또 다른 곳으로 옮겨져 있었다.

그렇게 그가 조용히 지낼 때, 바로 그 작은 눈인형 같은 소녀는, 남들은 다 싫어하면서도 오직 자신에게만 웃는 얼굴을 보여주며 불안한 듯 물었다.

‘지금 내게 오라버니가 생겼으니까, 앞으로 어머니께서 나를 봐주시겠지?’

그날 정철은 처음으로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게 아무리 작은 인형 같은 어린 소녀라도, 그에겐 열심히 살 삶의 이유가 생긴 것이다.

가능하다면 열심히 노력해서 이 눈인형에게 의지할 수 있는 오라버니가 되고 싶었다.

다른 사람은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시골의 사내아이가 귀공자로 변했을 때, 늘 그 눈인형이 그의 의지할 곳이 되어주었다는 것을. 정미는 정철에게 처음으로 부평초도 뿌리를 내려 넝쿨이 될 수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었다.

이후 정철은 열심히 공부하며 무술을 연마했고, 유학을 다니며 행보를 멈추지 않았다. 옥과 눈처럼 사랑스러웠던 여동생은 그동안 점점 모습이 변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