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반반(盼盼)
정미가 문 앞에 도착했을 땐 이미 그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어이가 없어 눈을 부라렸다.
‘한지가 준 옥고리를 뺏어가서 뭐 하려고 하는 거지? 용흔이 난폭하고 무례하긴 하지만, 뻔뻔하게 내게서 물건을 빼앗은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왜 한지의 옥고리를 보자마자 빼앗은 거냐고! ……그동안 용흔과 친하게 지낸 친우는 아마 한지 하나뿐이지? 아,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싶더라니!’
순간, 정미는 예전에 《이지취담》에서 본 이야기가 번쩍 떠올랐다.
그 이야기는 아주 특이했는데, 주인공은 사내 두 명이었고, 그들은 동창생이었다. 어려서부터 같이 공부를 하다가 나중에 서로를 애모한다는 걸 깨달았지만 짝이 될 수 없음에 괴로워했고, 둘 중 하나가 괴로워서 강에 뛰어들어 죽으려고 했지만 선인에 의해 구해졌다. 그 선인은 그의 이야기를 듣더니, 하루도 지나지 않은 여인의 시체를 하나 찾아오라 했고, 그녀의 뼈와 가죽을 벗겨 그에게 여인의 가죽을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정인과 부부가 될 수 있었다.
정미가 가장 똑똑히 기억하는 점은, 그 사내는 매일 그 여인 가죽을 벗어 세심하게 관리해주어야 했고, 주기적으로 돼지기름을 발라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정미는 보름 동안 돼지를 먹을 수 없었고, 나중에 둘째 오라버니가 이를 알고 매정하게 그 《이지취담》을 압수해버렸다.
정미가 떼를 쓰며 성가시게 굴자, 둘째 오라버니는 그녀에게 새로운 《이지취담》을 주었고, 그 책에는 그 이상한 이야기가 없어져 있었다.
정미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몰래 육출화재에 가 다시 찾아보았지만, 그 새로운 《이지취담》에는 정말로 그 이야기가 없어진 채였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어쨌든 소녀에게 무언가를 일깨워준 바였다. 사내끼리도 사랑할 수 있구나!
‘설마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용흔이 계속 나와 대적한 건 내가 지 오라버니와 노는 걸 가장 좋아했기 때문인가? 그래서 지금은 지 오라버니가 정요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정요를 싫어하기 시작한 건가? 방금 고의로 크게 고함을 질러서 정요를 난감하게 했잖아.’
정미가 입을 막고 놀라워했다.
‘이거 대단히 큰일을 눈치채게 된 것 같은데!’
“아가씨, 둘째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 할까요?”
예전이었다면 단호히 거절했을 터였고 정요도 그것에 이미 익숙해져 있겠지만, 지금 정요가 ‘작은 패왕’의 목표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정미는 자신이 용흔에게 괴롭힘당했던 기억이 떠올라 살짝 통쾌했고,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들어오라고 해. 바깥방에서 모시고 있어. 좀 이따 나갈 테니.”
* * *
정요는 창문 앞의 책상 옆에 서서 넋을 놓고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미가 헛기침을 했다.
정요는 이를 듣고 몸을 돌려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정미, 오늘은 널 귀찮게 하지 않으려 했는데, 경왕세손께서도 오셨다고 해서, 나도 뻔뻔스럽지만 와봤어. 이건 내가 주는 생일선물이야.”
그녀는 소매에서 비단 손수건으로 포장한 물건을 꺼내자마자 조금 당황스러워했다.
“아, 잘못 꺼냈네.”
그러고는 똑같은 비단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이거야. 방금 그건 둘째 오라버니에게 주려고 한 거고…….”
정미는 아무렇게나 건네받고는, 정요가 정철에게 주려고 한 물건에 마음이 쓰였다.
“오라버니에게 뭘 주려고?”
정요가 웃으며 말했다.
“둘째 오라버니가 곧 시험을 봐야 하잖아. 그래서 신발창을 만들었어.”
그녀는 말하면서 손수건을 풀어 정교하게 만들어진 신발창을 내보였다.
신발창은 양쪽의 무늬가 달랐으며, 한 짝엔 청운(靑雲)이, 그리고 다른 한 짝엔 비단잉어가 수 놓여 있었다.
정요가 설명했다.
“단번에 높은 지위에 오르라고, 잉어가 용문(*龙门: 과거 시험장의 문, 혹은 출세의 길)을 뛰어오른다는 뜻으로 만들었어. 나는 둘째 오라버니와 잘 왕래하지 않으니까, 일단 네게 먼저 보여주려고. 이 신발창 크기가 맞을까?”
정미는 정요가 가져온 정밀한 신발창을 보고 눈이 둥그레졌다.
흐르는 구름과 비단잉어는 살아 움직이는 듯 진짜 같았다.
정미는 이전에 아주 어렵게 작은 물고기 염낭을 만들어 오라버니에게 새해 선물로 줬었고, 이제 하나를 더 만들어 시험 전날 주려고 했던 참이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정요가 나서기만 하면 그녀는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었다. 예전엔 몰래 부러워했고, 가끔 질투심에 부끄러워하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주 멍청한 생각이었다.
‘지금은 더 이상 몰래 질투하지 않아도 되니까.’
정미는 정요가 큰언니의 부군에게 손을 댄 것이 미웠다. 큰언니의 부군이 황태자이든 평범한 사내이든, 형부라고 불렀던 사내에게 어찌 마음을 둘 수 있는가!
‘항상 내게 주었던 호의는 모두 독을 품은 꿀이나 마찬가지였고, 지금 나와 멀어지니 이젠 둘째 오라버니를 꾀어내려고 하는 건가?’
정미는 훑어보기만 해도 이 신발창이 정철에게 딱 맞는다는 걸 알 수 있었으나, 손을 뻗어 들어보고는 다시 건넸다.
“조금 크게 만든 것 같네.”
“그래?”
정요가 손에 쥔 신발창을 내려다보며 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그래도 작게 만든 게 아니라서 다행이다. 가서 고치면 되니까. 아, 맞다. 정미는 뭘 준비했어? 듣자 하니 시험에 참가하는 사람에겐 주로 신발 아니면 신발창을 주고, 다들 청운의 뜻을 따서 준다고 하더라고.”
정요를 가장 경계하는 정미가 그녀에게 뭔가를 알려주고 싶을 리 없었고, 더욱이 그 작은 물고기 염낭과 정요의 이 정밀한 신발창을 비교하고 싶지도 않기에, 더더욱 굳이 입 밖으로 꺼내어 창피를 당하고 싶지 않았다.
정요는 그저 아무렇게나 물어본 것인 듯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고, 잠깐 앉아있다가 일어나 인사했다.
“정미, 안색이 점점 더 좋아지는 것 같아. 역시 안정을 취하는 게 효과가 있구나. 푹 쉬어. 날이 따뜻해지면 우리 같이 답청을 가자.”
그렇게 정요가 떠나자, 정미는 한숨을 쉬었다.
‘만약 환상 속에서 그 장면들을 보지 못했고, 아혜가 나는 오랫동안 안 좋은 음식을 많이 먹어서 피부가 검어진 것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정요의 저 선량한 성정과, 우애 깊은 자매의 사이에서 어찌 나쁜 생각을 할 수 있었겠어.’
정미는 손을 뻗어 비단 포장을 풀었다. 안에는 손수건이 여러 장 들어있었는데, 총 열두 장으로 한 장 한 장마다 익숙한 인물이 수 놓여있었다.
정미는 눈을 들어 다보각(*多寶閣: 물건을 전시해 놓는 장식장) 위에 놓여있는 《이지취담》인형들을 보고는 크게 놀랐다.
정요가 우아하고 아름답게 손수건마다 놓은 자수는, 정철이 준 나무인형들과 똑같았다!
정미는 이에 기뻐하기보다 오히려 마음속에 한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정요가 얼마나 세심한 사람인데, 한 사람과 가까워지려면 못할 일이 어디 있을까!
‘안 돼. 앞으로 잘 주시해야겠어. 정요가 둘째 오라버니를 속이게 해선 안 돼!’
그렇게 그녀는 원래 준비했던 염낭은 주지 않기로 결심했다.
‘춘시까지 며칠밖에 남지 않았으니 내 손재주로는 신발을 만들 수 없을 테지만 신발창 정도는 괜찮을 거야.’
정미는 자신이 정요와 똑같은 선물을 주면, 정철은 분명 자신이 준 것을 신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는 곧바로 환안에게 바느질방에 가서 제일 좋은 실과 천을 가져오라 명령했고, 매일 제생당에 가지 않을 때에는 비서거에 틀어박혀 신발창을 만들었다.
* * *
정요는 낮엔 염송당에서 맹 노부인을 모실 필요 없었기에, 쇄옥거의 침상에 누워 게으르게 물었다.
“셋째가 정말 신발창을 만들었다고?”
“예.”
교용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무지 셋째 아가씨의 생각을 알 수 없군요. 아가씨께서 그렇게 멋진 신발창을 만들었는데, 셋째 아가씨께서도 똑같은 것을 만들면 굴욕을 자초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늘 주인 곁에 붙어서 시중을 드는 시종은 변화에 가장 민감했다. 특히 정요는 교용 앞에서 늘 굳이 본심을 숨기지 않았기에, 교용은 이 둘째 아가씨가 셋째 아가씨에게, 남들이 아는 것처럼 그리 따뜻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렇기에 감히 옛 주인의 험담을 할 수 있었다.
정요가 웃으며 말했다.
“정미는 당연히 만들려고 할 거야. 둘째 오라버니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둘째 오라버니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선물을 주고 싶겠지. 내가 준 걸 어찌 마음에 들어 하겠어. 넌 가서 잘 지켜보고, 정미가 다 만들면 내게 잊지 말고 알려줘.”
교용은 이 주인의 마음을 알 수 없었기에 더욱 세심히 시중을 들었다.
“걱정 마세요. 셋째 아가씨 정원의 그 할멈이 재물을 가장 좋아하는데, 예전에 약간의 도움을 주었더니 소인의 말을 잘 들어줍니다. 소인이 이미 할멈에게 당부해놓았으니, 아가씨의 일을 그르치지 않을 거예요.”
“내 일을 그르치다니? 내 일이 뭐가 있는데?”
정요가 살짝 차가운 말투로 말하며 경고하듯 교용을 흘끗 노려봤다.
“교용, 앞으로 또 입을 제대로 간수 하지 못하면 널 데리고 다니지 않을 거야.”
교용은 겁을 먹고 급히 결심을 표했다.
“걱정 마세요. 앞으로 절대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겠습니다.”
교용은 당연히 둘째 아가씨가 시집을 갈 때까지 따라가고 싶었다. 백부에 남아있게 되면 더 이상 어떤 길이 있겠는가!
교용은 비서거 쪽 방향을 노려보며 심혈을 더욱 기울였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한편, 한지는 국공부로 돌아왔고 마음이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그는 정요의 차가운 태도에 상심하면서도 그녀의 고결한 성품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퇴혼은 어머니께 통하지 않을 것 같으니, 조 아가씨 쪽에 시도해보자. 이 혼사가 이루어지지 않기만 한다면 정요와 아직 기회가 있는 거야!’
한지는 서재에 조용히 앉아있다가 일어나서 침실로 돌아왔고, 한 낯선 여인이 등을 돌리고 허리를 굽혀 요를 갈고 있는 것을 보고는 물었다.
“누구냐?”
여인이 몸을 돌려 예를 갖췄다.
“세자, 소인은 부인께서 세자를 모시도록 보낸 사람입니다. 세자께서 이름을 하사해주세요.”
그러고는 쭈뼛쭈뼛 고개를 들었다.
단정함을 중시하는 집안이라면, 아들이 열여덟 살을 넘기면 곁에서 시중을 드는 하인은 여종이 아니라 사동으로 배치하곤 했고, 그저 막일을 하는 계집만 몇 명 남길 뿐이었다.
항상 낙묵이 한지의 시중을 들어왔기에, 농금이 매일 그의 침구를 정리해주는 것에 겨우 적응해오던 바였다. 뿐만 아니라 농금은 이렇게 은근한 눈빛을 보내오지도 않았다.
이 나이 때의 소년은 원래 좋아하고 말고와는 관계없이 쉽게 충동에 빠져들곤 하는 법이었다.
그 순간 한지는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여종 앞에서 처음으로 쩔쩔매며 어색함을 느껴 가볍게 헛기침하고는 말했다.
“여긴 농금으로 충분하다. 물러나거라.”
그러자 그녀가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들고 애원했다.
“소인을 쫓아내지 마세요. 여기 남지 못하면 소인에겐 살길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한지는 그 여종의 맑고 빛나는 눈빛에 불편함을 느껴 눈을 피했으나,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께서 내게 화가 나 계신데, 만약 이 여종을 돌려보내면 정말로 무서운 벌을 내리실지도 몰라.’
한지는 자신 때문에 무고한 사람을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녀를 보며 말했다.
“그럼 그냥 남거라. 하지만 앞으로 내 허락 없이 방에 들어와 침구를 정리하거나 하지 말고, 농금에게 시키면 된다.”
그녀는 아주 온순하고 용감하게 고개를 들고 한지의 눈을 마주 보았다.
“세자, 세자께서 소인에게 이름을 하사해주세요.”
말하면서도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아주 수줍어했다.
집안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는데, 그것은 남주인이 직접 이름을 하사한 여종은 흔히 말하는 통방 하녀가 된다는 것이었다.
고개를 숙인 그 여종은 속눈썹이 놀랍도록 길어 마치 부채처럼 세밀하고 촘촘하게, 그녀의 날렵한 눈을 가리고 있었다.
한지는 그 속눈썹을 잠시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반반(盼盼)이라 부르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