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높은 이상
‘무욕즉강(*無欲則剛: 세속에 대한 욕망이 없어야만 의연한 경지에 오를 수가 있다.)’이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이었다.
눈앞의 이 사내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초조하든 답답하든 정미는 그저 침착했고, 심지어 틈을 타 아혜와 쌍둥이를 망진하는 기술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한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정미, 나는 고모님께 인사드리러 가볼게.”
한지는, 지금쯤이면 정요도 분명 자신이 왔다는 걸 알고 있을 테고 아마도 지금 정미에게 있는 줄 알고 있지만, 용흔 남매가 불편해 오지 않는 거라 생각했다.
‘만약 고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면 정요와 우연히 마주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같이 가드릴까요?”
소녀가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으며 비꼬는 듯 아닌 듯 물었다.
한지는 좋아하는 사람을 보고 싶은 마음이 급급했기에 급히 거절했다.
“그럴 필요 없어. 금방 갔다 올게.”
한지가 나가려 하자 용흔이 뒤따랐다.
“역시 한지가 날 깨우쳐주네. 나도 이모님께 인사드리러 가보마.”
이쪽 방면에 대해 훨씬 더 잘 알고 있는 용남이 생각했다.
‘한 세자는 정요를 보러 가는 거잖아. 오라버니는 대체 뭐하러 따라가는 거야! 이런 오라버니가 있는 건 정말 피곤한 일이구나. 안 되겠다. 따라가서 지켜봐야겠어!’
때문에 눈 깜짝할 새, 비서거에는 정미 혼자 남게 되었다.
정미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환안에게 세 사람이 들고 온 생일선물을 치우라고 했다. 그러다 시선이 한지가 준 그 염낭으로 꽂히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저건 일단 가져와 봐. 좀 보자.”
염낭을 열자 옥고리가 하나 떨어져 나왔고, 무난한 영지무늬를 보니 그저 아무렇게나 들고 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옥의 질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정미 나이대의 소녀에겐 옥의 질이 좋고 말고는 전혀 신경 쓸 것이 아니었고, 어쨌든 이 평범한 옥고리는 그녀가 미워하는 사람이 준 것이기에, 바로 침상 옆 탁상의 자수 바구니에 던져버렸다.
“됐어, 이건 그냥 놔둬.”
‘나중에 끈은 빼버리고 환안에게 밖에 가서 책으로 바꿔오라 하면 되겠다.’
* * *
한지는 한 씨에게 가는 세 걸음에 한 번씩 멈춰서서 고개를 돌렸다. 이 길이 무한대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 아쉬웠고, 그 사람이 순간 눈앞에 나타나기를 기대했다.
결국 용흔이 더는 보지 못하고 한지의 손을 당기며 말했다.
“한지, 그냥 시원하게 굴 순 없어? 정요를 보고 싶은 거잖아. 날 따라와!”
‘따라오라고?’
한지는 용흔에게 끌려가며 눈살을 찌푸렸다.
“용흔, 어디로 가는 거야?”
“정요를 찾으러 가는 거지.”
용흔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한지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요가 어디 있는지 알아?”
“모르지.”
“그, 그럼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설마 지금 당장 찾을 수 있어?”
‘작은 패왕’이 한지를 바보처럼 여기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게 쉽겠냐?”
그는 한지를 길가에 데려다 놓고는, 목을 가다듬고 목청을 높였다.
“정요, 어서 나와. 한지가 널 보러 왔다!”
“!”
“!!”
정요가 비틀거리며 쇄옥거(碎玉居)에서 달려 나왔다.
용흔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어때, 한지. 이 방법이 제일 빠르고 확실하지?”
그러고는 이어서 말했다.
“회인백부는 작아서 이 부근 정도가 둘째 항렬들이 지내는 곳이지. 정요도 분명 이 근처에 지낼 거고. 만약 우리 왕부였으면 이 방법이 통하지 않았을 거야. 내 어머니가 계신 곳에서 여동생을 아무리 목 터져라 불러도 들리지 않을 걸.”
용남은 화가 나 눈을 부라렸다.
‘여태 오라버니가 이 방법으로 날 찾지 않은 건 그저 왕부가 커서, 내가 멀리 살아서였다고? 참으로 고맙네!’
“오라버니 바보지? 바보 맞지? 오라버니처럼 생각 없이 멋대로 구는 사람이 또 있을까?”
용남이 용흔의 발을 세게 짓밟았다.
용흔은 화가 나 동생의 머리를 잡아당겨 옆으로 끌고 갔다.
“뭐가 바보라는 거야. 이건 가장 쉽고 효과적인 방법이야! 누가 봐도 정요를 보러 가는 거였는데, 내가 부르지 않았어도 늦든 빠르든 방법을 찾아 만났을 거다. 그렇게 꾸물거리는 건 시간 낭비잖아!”
‘게다가, 작년 못난 계집의 생일날, 못난 계집이 한지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온 수도에 퍼진 게 나 때문이라는 누명까지 씌웠지. 지금 한지가 정요를 좋아하고, 정요를 찾고 있다는 건 그저 큰이모님이 지내는 이연원 사람들이 들으라고 한 것뿐이지, 백부에 퍼지라고 한 건 아니야! 왠지 모르게, 원래는 못난 계집의 성정이 점점 나빠져 꼴도 보기 싫었으나, 한지가 정요를 좋아한다는 걸 안 뒤로는 나 또한 목표가 바뀌어 한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졌으니까.
……아, 내 마지막 벗마저 잃게 되면 어쩌지?’
작은 패왕은 그제야 조금 걱정이 되었다.
한지는 용흔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고, 앞에 보이는 그 소녀만 쳐다볼 뿐이었다.
소녀가 한 걸음씩 다가오자, 한지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정요…….”
가까이 다가온 소녀는 이미 침착함을 되찾았지만, 예전에 비해 어색하고 차가운 태도였다. 그 모습은 마치 겨울을 맞은 연꽃처럼, 절경에서도 기개 있는 아름다움이 품은 채였다.
“지 오라버니, 오늘은 정미의 생일을 축하해주러 온 건가요?”
한지가 멍해지더니 정신을 차리고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정요의 속눈썹이 떨리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동안 정미가 사람을 만나지 않으려 해서, 저도 그 아이를 방해할 수 없었는데, 오늘 지 오라버니께서 오셨으니 정미도 기뻐하겠군요…….”
“아니다!”
한지는 정요가 오해할까 봐 그녀의 말을 끊었고, 소녀의 따뜻한 눈빛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정요, 우리……, 집에서 나한테 정혼자를 정해주셨어…….”
소년은 조마조마하며 좋아하는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
정요는 담담하게 미소지었다.
“들었습니다. 오늘 아침 어머니께서 얘기하시는 걸 들었어요.”
“그래? 그럼 너는, 너는―”
한지는 다시는 품에 안을 수 없을 듯한 소녀를 바라보며, 세상이 캄캄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 순간, 그는 모든 걸 잊고 정요의 손을 잡고 물었다.
“정요, 내년 화조절 때, 나와 답청하여 꽃을 보지 않을래?”
정요가 손을 빼냈다.
“농담을 하시네요. 내년엔 이미 오라버니와 함께 꽃을 볼 사람이 있을 텐데요.”
한지의 안색은 점점 창백해졌지만, 여전히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정요, 날 기다려주면 안 돼? 네가 날 믿어주면, 어떻게든 퇴혼 할 방법을 찾아오마!”
정요의 안색이 변하더니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지 오라버니,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저는 오라버니와 조 아가씨의 맺음을 축하하고 있어요. 앞으로, 앞으로 다신 이런 황당한 말 하지 마세요. 이러시면 제가 어찌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겠습니까.”
정요는 한지를 빤히 쳐다보다가 몸을 돌려 급히 떠났다. 그녀는 쇄옥거에 들어오고 나서야 가슴을 움켜쥐며 숨을 돌리고는 명령했다.
“교용, 차를 올리렴.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게.”
교용이 차를 바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가씨, 소인은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한 세자께서 그리 좋은 분이신데…….”
정요가 매섭게 교용을 노려봤다.
“입 다물거라. 네가 뭘 안다고!”
이 시종은 정미가 보낸 아이였지만, 정요의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편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만약 다른 시종이었다면 품위를 지키며 친절한 모습으로 대해야 했을 것이다.
“예, 소인이 어리석었습니다. 이 집안에 아가씨보다 더 총명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정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기억하렴. 난 단 한 번도 세자 부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어. 앞으로 또 한 세자를 만날 땐 네 그 욕심을 갖다버려야 할 거다!”
정요가 꾸짖은 뒤, 교용에게 명령했다.
“밖으로 나가 지켜보거라. 만약 한 세자가 떠나면 내게 알려주고.”
“예.”
교용은 정요가 왜 위국공 세자를 뱀 보듯 피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말을 어길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동안 교용이 냉정하게 지켜보자니, 둘째 아가씨는 셋째 아가씨보다 훨씬 총명했고, 세자 부인이 되지 않는다 해도 더 좋은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교용은 시종으로서 일편단심으로 일을 잘하면, 장차 자신에게도 행운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시종 하나가 어찌 고작 서녀에게서 창창한 앞날을 볼 수 있었냐 하면, 그건 정요의 매력 때문이었다.
항상 침착하고 여유 있으며, 비난을 받아도 상황을 뒤바꿔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높은 노부인의 총애를 받는 주인이, 당연히 그 거칠고 제멋대로인 옛 주인보다 더 믿음직스러웠다.
교용은 성실하게 밖을 지켜봤고, 잠시 후 돌아와 보고했다.
“아가씨, 한 세자께서 가셨습니다.”
정요는 고개를 끄덕이고 허리를 굽혀, 침상 머리맡의 서랍 맨 밑 칸을 열었다. 그녀는 그 안에서 정교하게 만들어진 신발창을 꺼내 비단 손수건으로 포장했다. 그러고는 거울을 보고 살짝 용모를 정리한 뒤 밖으로 나갔다.
* * *
비서거 안, 용흔은 정미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정미, 네 생일인데 왜 이렇게 한산하게 보낸단 말이냐. 나와 여동생이 어렵사리 얼굴을 보러 왔는데 그저 이렇게 돌아가야 하다니.”
용남은 그저 자신이 오라버니보다 2년 늦게 태어나 여동생이 된 것이 무척 아쉬울 따름이었다.
‘내가 누이였다면 이 말썽꾸러기 남동생을 아주 잘 교육해놨을 텐데!’
“정말 고맙네요.”
정미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렇게 아쉬운 티 낼 필요 없다. 내 생일 땐 떠들썩하게 열고 널 초대할 테니, 그땐 심심하지 않을 거다.”
용흔의 말에 정미는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용남은 크게 놀랐다.
용흔은 독(毒)5월 출생이었고, 그중 가장 독이 가득한 5월 5일에 태어났는데, 그날 태어난 아이는 요사스러운 기운이 몸에 달라붙어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 음력 5월은 기후가 크게 변해 1년 중 병에 가장 많이 걸리는 시기라 독(毒)오월이라 부르며 주의하는 미신이 있다.)
예전에 하인들이 얘기하는 것을 몰래 들은 적이 있는데, 어릴 때 용흔의 성정은 지금보다도 삐뚤었다고 했다. 분명히 아버지의 적장자임에도 5월 5일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왕세손에 책봉하는 것을 계속 미뤄왔었고, 결국 나중에 북명진인의 칭찬을 듣고 나서야 조금 좋아졌다고 했다.
‘그래서 오라버니는 늘 생일날을 지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지금 정미가 생일에 장수면만 먹는다고 비웃었지만, 사실 자기는 생일날 그 장수면조차 먹으려 하지 않았지.’
용남은 가끔 그런 오라버니가 못마땅해서 어머니께 오라버니의 생일을 떠들썩하게 해달라 했지만, 어머니조차 이 일에 냉담할 줄은 몰랐다.
가끔 그녀는 생각했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 꼭 모두 맞는 걸까. 그렇게 오라버니를 총애하시는 어머니조차 그런 것들을 회피하려 하시다니. 만약 북명진인의 그 말이 없었다면 오라버니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지, 혹시 더욱더 삐뚤어졌을지도 몰라…….’
그녀는 한창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다가, 웬 꾸짖는 소리에 놀라 정신을 번쩍 차렸다.
정미가 용흔의 옷깃을 당기며 다급하게 말했다.
“용흔, 어서 내려놔요. 뭐 하러 그걸 건드는 겁니까?”
용흔은 정미의 영지 옥고리를 손에 꼭 쥐고 손가락에 철색(*鐵色: 검푸르죽죽한 빛) 끈을 감으며 히죽 웃었다.
“못난 계집. 매년 네 생일엔 내가 어쨌든 네게 작은 선물을 주는데, 내 생일엔 한 번도 선물을 받은 적이 없지. 그냥 이걸로 내 생일선물을 미리 준 걸로 하마.”
정미는 용흔의 무례한 행동에 매우 화가 났다.
‘내가 언제 네 생일 초대장을 받은 적 있다고. 왜 나를 탓하는 거야!’
“얼른 내려놔요. 그건 다른 사람이 선물로 준 거란 말이에요!”
용흔은 정미가 달려들어 빼앗을까 봐, 아직 넋을 놓고 있는 여동생을 끌고 줄행랑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