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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80화 (80/375)

80화. 정혼

3일 후, 한 씨는 거울 앞에 앉아 하마터면 연지 상자를 떨어트릴 뻔했다.

‘거울 속 뽀얀 피부의 여인이 나라고?’

한 씨는 넋이 나간 채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도 예전엔 이렇게 뽀얗고 촉촉한 피부를 가졌었지만, 길고 가망 없는 기다림 속에서 피부는 점점 메말라갔고, 지분으로 기색을 꾸며낼 수밖에 없었다.

그 두꺼운 지분 아래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그녀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

한 씨는 아직 문안 인사를 드릴 시간이 되지 않았기에, 계속 서양경 앞에 앉아 자신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그때, 설란이 보고했다.

“부인, 나리께서 오셨습니다.”

한 씨는 조금 긴장했다.

“나리가 어찌 오셨느냐?”

그저 여종일 뿐인 설란이 그걸 어찌 알겠는가. 설란은 우물쭈물하며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한 씨는 그저 아무렇게나 한마디 물었던 것이기에 설란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고, 마음을 가다듬은 후 말했다.

“들어오시라 해라.”

정가의 둘째 나리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한 씨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다가 헛기침하고는 말했다.

“오늘은 안색이 괜찮군.”

아마 너무 오랫동안 이런 칭찬을 듣지 못했고, 특히 이 말을 부군에게서 듣게 되었기 때문인지, 한 씨의 얼굴은 소녀처럼 붉어졌다.

홍조는 뽀얀 뺨에서 점점 퍼져가다가 새하얀 목덜미까지 분홍색으로 물들였고, 장미 수가 놓인 진홍색 옷깃과 어우러져 새하얀 어깨를 가렸다.

둘째 나리의 가슴이 갑자기 뛰었다.

너무 오랫동안 본처를 가까이 하지 않은 탓인지, 지금 여기 있는 여인이 낯선 아가씨처럼 느껴졌다.

예전에 한 씨를 생각하기만 해도 바로 떠오르던 그 혐오감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정상적인 사내로서의 반응이 일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뭔가 불편한 듯 한걸음 물러났다. 괴롭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해 말투가 예전보다 조금 부드러워졌다.

“부인, 오늘은 당신과 상의할 것이 있어 왔소.”

그동안 한 씨는 부군을 항상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두어왔다. 매번 실망할 때마다 그 감각이 둔해지긴 했지만, 그가 했던 말 한마디, 그가 지었던 표정 하나하나 다 자신도 모르게 마음에 두고 계속 곱씹곤 했다. 그 말속에 혹시라도 일말의 정이 있기를 바랐지만, 아쉽게도 더 깊은 실망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한 씨는 나리의 말투가 예전보다 조금 따뜻해진 것을 분명히 느꼈고, 저도 모르게 느껴진 큰 기쁨을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어서 들어와 앉으세요. 무슨 일이십니까?”

둘째 나리는 이미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들어가 앉아서 냉담하게 말했다.

“철이가 4월생이니, 곧 있으면 가관을 해야 하지 않소. 가관 후에는 더 이상 혼사를 지체해선 안 되는데, 당신에게 무슨 계획이라도 있소?”

한 씨는 실망감을 억누르며 애써 웃었다.

“가관식(*加冠式: 성년식인 관례를 치르며 관(冠)을 처음 쓰는 의식)의 일은 큰형님과 같이 준비하고 있으니 문제없을 겁니다. 철이의 혼사는 그 아이에게 물어보니, 너무 일찍 혼인하고 싶지 않아 하더군요.”

둘째 나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리석군. 이미 스무 살이 되었는데, 혼인을 하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건가? 이번 춘시 합격과는 상관없이 혼사는 정해야 하오.”

그는 한 씨의 백자 같은 얼굴을 쳐다보고는 눈을 피했다.

“내 동방(*同榜: 같은 회차에 과거에 함께 급제한 사람)이 이틀 전 서신을 보내왔는데, 얼마 후 수도에 와서 별일이 없는 한 수도에서 재직하게 된다고 했소. 이번에 처와 딸을 데리고 오는데, 딸이 마침 열여덟이라 내게 수도에 좋은 사내가 없냐고 묻더군. 나이가 철이와 잘 맞으니, 그 동방이 오면 한번 만나보도록 하시오. 만약 문제가 없다면 혼사를 정합시다.”

한 씨는 정철을 친아들처럼 여기진 않았지만, 오랜 시간동안 정이 많이 들었기에, 당장은 이를 원치 않았다.

혼사는 상대의 집안을 잘 알아야 가장 좋은 것이었다. 그렇게 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같은 수도 안의 적령기 남녀여야 하고, 서로가 어떤지 자세히 알아봐야 마음이 놓이는데, 외부에서 온 아가씨가 어떤 집안인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만약 좋지 않은 집안이면, 철이를 해치는 꼴 아니겠는가?’

“당신은 내키지 않는 것이오?”

둘째 나리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한 씨에 대한 습관적인 혐오감을 드러냈다.

한 씨는 둘째 나리의 변화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떤 일들은 분명히 지켜야 했다.

‘예를 들어 정희와 정양을 적자로 올리자는 요구라든지, 아니면 철이와 정미의 혼사라든지…….’

“나리, 제가 내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리께서 말씀하신 그 동방은 수도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집안의 상황을 알 수 없습니다. 열여덟이나 된 아가씨가 아직 시집을 가지 못한 것엔 이유가 있을 테지요. 만약 한 번 만난 걸로 급히 혼사를 정하게 되었는데, 좋은 배필이 아니라면 철이에게 지장을 주지 않겠습니까…….”

둘째 나리가 벌떡 일어나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자는 내 동방인데, 내가 잘 알지 못할 것 같소? 당신의 말은 설마 내가 철이의 혼사에 너무 경솔하다는 뜻이오? 당신은 나를 정말 실망시키는군!”

‘이 여인은 말끝마다 내가 아니면 시집가지 않겠다고 해 놓고선, 그렇게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동안 한 번이라도 내 말에 순순히 따라준 적 있던가? 그 말들은 그저 내 마음을 움직여 보려고 한 것일 뿐이지. 조금의 진심도 없이 나를 바보로 여기고!’

둘째 나리는 옷깃을 펄럭이며 떠났고, 남은 한 씨의 마음은 쓰라렸다. 그러고는 오히려 정미가 뭔갈 배우는 것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만약 정미가 정말로 뛰어난 부의가 된다면, 이런 상황에서 나처럼 무력감만 남진 않겠지.’

* * *

앞서 염송당에 문안 인사를 드릴 때, 한 씨는 조용히 셋째 숙부를 찾아서, 정미가 그동안 아프고 나서 갑자기 의술에 흥미가 생겨 그의 곁에서 잠시 배우고 싶어 한다고 전했다.

어린 소녀가 잠깐 흥미가 생긴 것이고 며칠 뒤면 가기 싫어할지도 모르니, 괜히 떠들썩하게 굴 필요 없다고도 전했다.

셋째 숙부는 의술에 푹 빠져 있었기에, 정미가 여자아이긴 하더라도 그 또래 중에 의술에 관심이 있는 아이는 정말 드물기도 했고, 게다가 한 씨가 이리 나서니 거절할 리가 없었다.

그 이후로 정미는 매일 반나절 동안 몰래 외출하여 제생당의 병풍 뒤에 숨어서 사람들을 관찰했다.

의관의 조건은 매우 좋았다. 오는 사람들 모두가 환자였기에,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정미의 망진 실력은 점점 좋아졌고, 마음속으로 이런 날들이 길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다.

* * *

2월 초이튿날, 일 년에 한 번뿐인 화조절이 또 찾아왔다. 이날은 정미의 생일이기도 했다.

작년의 좋지 않은 기억 때문에 정미는, 이번에 한 씨가 연회를 열어주겠다는 것을 정중히 사양했고, 국공부의 사촌 형제자매도, 집안의 형제자매도 모두 초대하지 않은 채 비서거에서 정철과 함께 장수면(長壽面)을 먹었다.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찾아온 용흔은 여동생 용남을 끌어당기며 정미를 비꼬았다.

“못난 계집아, 왜 불쌍하게 면만 먹고 있어? 설마 그 소식을 듣고 마음이 상해 고기가 들어가지 않는 것이냐?”

“무슨 소식이요?”

정미는 참지 못하고 눈을 부라렸다.

“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하세요. 그렇게 숨겨봤자 무슨 재미가 있습니까? 듣고 싶지도 않게.”

용남은 자신의 오라버니를 도저히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이렇게 밉게 말하다니, 오라버니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정말 피곤하네!’

용남은 한숨을 쉬더니 몰래 오라버니를 살짝 꼬집고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오라버니, 그냥 좋게 말해. 무슨 소식이 있으면 어서 우리한테 말해줘.”

용흔은 여동생을 구실삼아, 반나절 동안 증 씨에게 매달린 끝에 외출할 수 있었다. 시간이 아주 귀했기에, 당연히 계속 실랑이를 할 순 없었다. 그는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래, 말해 주마. 한지가 정혼했단다!”

* * *

위국공부 도 씨의 거처에는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한지는 도 씨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 저는 조 시랑의 아가씨와 혼인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아가씨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부부가 될 수 있겠습니까!”

“너, 너 한 번만 더 똑같이 말해 보거라!”

도 씨가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헐떡였다.

“어머니…….”

한지가 무릎을 꿇은 채로 앞으로 다가갔다.

“입 다물어라. 내게 어머니라 부르지 마!”

도 씨는 늘 자랑스럽게 여겼던 아들을 노려보며 화를 참지 못했다.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부부가 될 수 없다고? 혼사의 일은 원래 부모와 중매인이 정하는 것이거늘. 최근 몇 년간 예교(禮敎)가 조금 느슨해졌다고 네가 이런 염치없는 말도 할 수 있게 되었구나! 내가 네 아버지에게 시집 올 때, 내가 어찌 그의 모습을 알았겠느냐? 네 아버지는 또 내 모습을 어찌 알 수 있었겠느냐? 만약 네 아버지도 그때 네 조모님 앞에서 너처럼 이렇게 무릎을 꿇었다면, 넌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거다!”

“어머니, 그, 그게 어떻게 같습니까……!”

한지는 그땐 아버지도 어머니도 마음에 둔 사람이 없었기에, 이미 예전부터 정요에게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깊어진 자신과는 다르다고, 때문에 누구와 혼인하든지 상관없었던 어머니 아버지와는 다르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었다.

“뭐가 다르다는 것이냐?”

도 씨가 소리치며 물었다.

한지는 눈을 내리깔며 입술을 꾹 다물고 말했다.

“어쨌든, 저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사람이 제 부인이 되는 걸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도 씨의 시선이 한지의 얼굴로 꽂혔다.

이제 열일곱 살 된 아들은 송죽(松竹)처럼 훤칠했고, 옆얼굴은 점점 날카로워져 풋풋함이 사라지고 청년의 느낌이 나고 있었다.

‘정말로 크긴 컸구나! 정요가 아직 시집오지도 않았는데, 그 아이를 위해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다니. 어미의 몸이 버틸 수 있을지는 전혀 고려치 않고……. 만약 정말로 정요를 들인다면 아주 큰일 나겠어!’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그럼 작년에 노부인께서 정미와 혼인하라 하셨을 땐 왜 거절했느냐?”

도 씨의 물음에 한지는 눈만 크게 뜬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도 씨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만난 적 없는 사람도 싫다 하고, 어릴 적부터 같이 큰 사람도 싫다 하니, 너는 그저 정요만 원하는 것이지?”

한지는 정곡을 찔리자 더는 망설이지 않고, 두 팔로 도 씨의 다리를 안고 울며 애원했다.

“어머니, 저는 정말 정요를 연모합니다. 제발 제 염원을 들어주세요.”

도 씨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 제가 정요와 혼인하게 되면, 앞으로 그녀와 함께 반드시 어머니께 효도할 것입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동주(東珠)로 테를 두른 진홍색 운두(雲頭)신이 한지의 복부를 밀쳤고, 도 씨는 차가운 얼굴로 벌떡 일어나서는 말했다.

“단념하거라!”

“어머니?”

한지가 당황하여 고개를 들었다.

늘 유약하고 고상하던 어머니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만나본 사람과 혼인하고 싶다면, 네 고모에게 가서 정미를 시집보내 달라 얘기해야겠다!”

한지가 크게 놀랐다.

“어머니, 안 됩니다!”

도 씨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싫다면, 답은 조씨 가문의 다섯째 아가씨뿐이다.”

한지가 창백한 얼굴로 절망했다.

“어머니, 아들에게 꼭 이렇게 강요하셔야 합니까?”

도 씨가 눈을 감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못된 놈. 내가 강요하는 게 아니라, 네가 강요하는 것이겠지! 나는 절대 정요를 허락하지 않을 테니 그렇게 알고 있거라. 그렇게 정요와 혼인하고 싶거든 내가 죽은 뒤에 다시 생각해!”

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한지를 한 번 빤히 쳐다보다가 내실로 들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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