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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77화 (77/375)

77화. 조택(祖宅)

해는 점점 떠올랐다. 국랑은 성실한 사람이었기에 몸이 괜찮아진 것 같자, 침상에서 내려와 일을 했고, 곽 씨는 이를 보고 비웃으며 어젯밤 국랑이 아픈 척 한 거라고 비꼬는 말을 했다.

국랑은 곽 씨가 무슨 말을 하든 가만히 내버려 두었고, 신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틈을 타 몰래 정미의 방으로 들어갔다.

회인백부의 맹 노부인은 늦게 일어나는 사람이었고, 정미도 한창 잠만 자고 싶어 하는 나이였기에, 늦잠 자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 시간에서야 막 세수와 양치를 마친 상태였다. 정미는 걸상에 앉아 환안이 머리를 빗어주는 것을 가만히 받고만 있었다.

엉덩이를 넘는 긴 머리는 색이 짙으며 촘촘했고, 검은 비단처럼 윤기가 흘렀다. 박달나무 조각빗으로 빗어 내리자,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빗겨졌다.

신제는 잠시 넋을 잃은 채 말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정미가 거울로 자신을 발견해 고개를 돌려 쳐다보고 나서야 운을 뗐다.

“고모…….”

정미가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신제, 어서 들어와.”

신제는 재빨리 정미의 앞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고모, 감사합니다. 제 동생을 지켰어요.”

아혜가 예전에 가르쳐준 미백부와 지통부 모두 효과는 있었지만, 정미는 이제야 나중에 태자비의 아기를 지킬 가능성이 생긴 것 같다는 확신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다행이다.”

정미는 손을 뻗어 신제를 일으켜 세워줬다. 소녀의 기쁜 모습을 보자니, 자신이 망진한 결과 국랑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라는 것을 차마 말하지 못했다.

정미는 친절하고 온화했으며, 또 자신의 어머니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동생을 구해준 사람이었기에,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녀는 시간을 쌓을 필요도 없이 정미를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로 여기게 되었다.

신제는 떠보는 듯 정미의 팔짱을 끼었고, 정미가 거부하지 않자 더 기뻐하며 말했다.

“고모, 제가 다짐했던 건데, 누가 저희 어머니와 동생을 구해주면 저를 아무렇게나 부려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고모는 제가 필요할까요?”

정미가 픽 웃더니 고리타분하게 말했다.

“내가 너 같은 어린 여자애를 부려서 뭐 하려고? 게다가, 넌 따지고 보면 내 조카인걸. 누가 조카를 부려 먹겠니. 우리 둘째 오라버니가 알면 나를 욕할 거야.”

“그, 그럼 제가 어떻게 보답해드릴 수 있을까요?”

신제는 조금 불안해졌다.

정미가 국랑을 구하기로 결정했을 때는 사실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사실 그녀의 행동은 국랑을 구하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보태부의 효과를 검증하기 위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신제가 이렇게 말하니, 정미에게는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난 여기 처음 온 거고, 아마 내일이면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할 거야. 이삼일 만에 뭔갈 찾을 수 있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그렇다면 차라리 조력자를 찾는 게 나을 거야.’

정미가 온화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신제, 사실 고모가 네게 부탁할 일이 하나 있긴 해.”

“말씀하세요.”

정미가 환안을 흘끗 쳐다봤다.

환안은 덜렁대는 성정이었지만, 오랫동안 정미를 가장 정성껏 모셔왔기에 주인과 자신 사이에 통하는 것이 있었다. 정미가 눈치를 주자, 환안은 조용히 문 앞으로 가 망을 봤다.

정미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신제, 내 둘째 오라버니, 그러니까 너의 열셋째 숙부가 원래 너희 집에서 양자로 온 것이라는 걸 알고 있지?”

신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는 오라버니가 태어난 곳이 어떤 곳인지 늘 궁금했어. 그래서 이번에 오라버니를 졸라서 온 거야. 하지만 오라버니 어릴 때의 일은 알 기회조차 없이 돌아가야 해서 아쉬워.”

신제의 얼굴에 서운함이 스쳤다.

“고모, 곧 돌아가셔야 해요?”

“응, 오래 있어봤자 내일이면 가야 해. 신제, 내가 네게 부탁할 일은, 앞으로 어디서 열셋째 숙부에 관한 일을 들었거나, 집에 무슨 특별한 일이 있으면 마음속에 기억해두었다가, 기회를 봐서 내게 들려주라는 거야. 어때?”

신제는 주저 없이 응하려 하다 조금 망설이며 물었다.

“하지만, 고모가 가면 제가 어떻게 알려드릴 수 있어요?”

“내가 네 조모에게, 나와 네가 잘 맞으니 다음에 백부에 올 때는 널 데리고 오라고 할게.”

신제의 눈이 반짝였다.

“좋아요.”

영(莹) 고모가 매번 백부에서 돌아올 때마다 항상 재밌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곤 했기에, 신제는 예전부터 백부에 한번 가보고 싶었던 참이었다.

정미의 표정이 진지해지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신제, 기억해. 누구에게 들은 이야기든 상관없어. 너의 조부와 조모를 포함해서…….”

정미는 이 말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동안 관찰한 결과 신제가 아홉째 당숙부에게 가진 감정은 공경보다는 공포와 원망이 더 커보였기에,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 가족을 알고 싶을 때, 그 집안에 오래 산 사람보다 더 유용한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신제는 조금 의아했지만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모, 기억할게요. 걱정 마세요. 앞으로 무엇을 듣든 간에 열셋째 숙부님과 관련이 있는 일이라면 어떻게든 고모께 알려드릴게요.”

정미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럼 너무 고맙지.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있으면, 백부에 올 때 내게 알려줘.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도울게.”

열네 살, 열두 살의 두 소녀는 이렇게 몰래 합의에 성공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뜻밖의 손님이 정미의 방을 찾았다.

“다섯째 올케언니?”

정미는 일어나서 맞이했다.

“아프시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으신가요?”

국랑은 정미의 말에 대답하지도 않고 쿵 하고 무릎을 꿇으며, 감격한 듯 말했다.

“미 아가씨, 어젯밤 저를 구한 것이 아가씨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정미는 잠시 조금 당황했지만, 남들 앞에서 절대 그런 것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국랑을 일으켰다.

“다섯째 올케언니, 어서 일어나세요. 다른 사람이 보면 저를 욕할 거예요.”

지금 국랑은 정미에게 아주 감동한 상태였기에, 은인이 욕을 먹을 수도 있다는 말에 급히 일어나 정미의 손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미 아가씨, 너무 감사합니다. 만약 아가씨가 없었다면, 저, 저는…….”

정미는 친하지 않은 사람과 이렇게 닿는 것이 불쾌했다. 신제는 예쁘고 귀여운 소녀였고, 자신이 윗사람이었기에 참았지만, 지금은 도저히 불편함을 참을 수 없어 결국 손을 빼고 담담하게 말했다.

“올케언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국랑은 정미의 감정을 알 수 없자 당황하여 급히 설명했다.

“미 아가씨, 신제가 제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 아이에게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여기 몰래 들어오는 것을 본 것뿐입니다. 제가 글자는 모르지만, 눈치는 있습니다. 그리고 신제는 제 딸이고, 저보다 그 아이를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신제가 어제 제게 먹인 것이 아가씨께서 준 것이 아니라면 어디서 왔겠습니까?”

‘그런 거였구나.’

정미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으려고 한 것은 여기에 머무는 이틀 동안 귀찮은 일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국랑에게 들키게 되니, 정미는 이 일을 굳이 숨기기 귀찮아졌다.

“아이에게 별일 없다면 됐습니다. 다른 건 굳이 말할 필요 없어요.”

“예, 예.”

국랑은 연거푸 고개를 끄덕이며 경건한 눈빛으로 정미를 바라보았다.

정미는 어쩐지 자신이 보살상이 된 느낌이 들어, 가볍게 기침하고 말했다.

“올케언니는 오늘 푹 쉬시는 게 좋아요. 저는 이만 옷을 갈아입을게요.”

“갈아입으세요, 갈아입으세요.”

정미가 어이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국랑을 흘끗 바라봤다.

“미 아가씨―”

그때, 국랑이 한 발짝 다가와 자신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말을 더듬었다.

“하,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정미가 거절하지 않자 국랑이 용기를 내어 말했다.

“혹시 이것도 알아보실 수 있습니까?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

그녀는 ‘딸’ 글자도 꺼내기 싫은 듯 겨우 내뱉었다.

정미는 국랑의 물음에 의아해하며 그녀를 한참 쳐다보다가, 가볍게 웃었다.

“다섯째 올케언니께서 농담을 하시네요. 제가 어찌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정말 알아볼 수 없습니까?”

국랑이 간청하는 표정으로 쭈뼛쭈뼛 정미를 바라봤다. 그러다 또 백부의 아가씨에게 무례한 행동일까 싶어, 급히 고개를 숙였다. 제법 보드랍고 매끄러운 목덜미가 드러났고, 옷깃 사이로는 새파란 멍자국이 보였다.

“당연히 정말이지요. 저는 신선도 아닌데요.”

정미는 그 멍자국을 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 예. 그럼 아가씨는 일 보시지요. 저, 저는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국랑이 나가자, 정미는 한숨을 쉬었다.

나중에 국랑이 아이를 낳고, 곽 씨가 또 딸인 것을 알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는 벌써부터 훤했다.

하지만 지금 국랑에게 알려줘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 *

옷을 갈아입고 아침 식사를 마쳤을 때, 정철은 정미에게 나가서 걷지 않겠느냐고 권유했고, 정미는 흔쾌히 응했다.

두 남매가 밖으로 나오자, 정미의 발걸음이 경쾌해졌다.

그러자 정철이 웃었다.

“머무는 것도 편치 않아 하면서, 왜 어젯밤엔 여기 남자고 했어?”

정미가 속으로 말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이미 도와줄 사람을 찾았는데, 여기 더 머물러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정미는 그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거야 오라버니가 모처럼 왔으니까 그랬지.”

정철이 멈칫하더니 실소했다.

“미미가 언제부터 그런걸 신경썼다고.”

정미는 오라버니의 이런 태도가 늘 마음에 거슬렸지만,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오라버니, 오랜만에 친가족이랑 만난 거잖아. 내 눈엔 왜 오라버니가 그렇게 기뻐하는 것 같지가 않지?”

정철의 눈동자가 깊어지더니, 이내 고요히 여동생을 바라봤다.

정미가 눈살을 찌푸렸다.

“오라버니, 혹시 오라버니가 어릴 때, 저자들이 오라버니에게 못되게 굴었던 거야?”

정철이 손을 들어 정미를 토닥였다.

“어릴 때의 일은 오라버니도 잘 기억이 안 나. 이 얘긴 그만하고, 오라버니랑 종사(宗嗣)와 조택(祖宅)에 가자.”

잠시 후, 정미는 정철이 말한 ‘조택’을 보며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여, 여기가 우리 집안의 조택이야?”

‘둘째 할아버지의 집보다도 작고, 허리춤까지 오는 벽돌담이 둘러져 있는 눈앞의 이 낡은 집이 내 조상의 집이라고?’

정미의 만감이 교차했다.

백부가 다른 훈귀(*勳貴: 사업이나 나라를 위하여 두드러지게 세운 공로가 있는 귀족) 집안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조상의 집까지 이 꼴일 줄이야!

“오라버니, 우리 집안의 조택은 한 번도 보수한 적 없는 거야?”

“보수한 적이 없을 리가.”

정철이 그 벽돌담을 가리켰다.

“몇 년 전에는 토담이었는데, 한 번 빗물에 무너져서 벽돌담으로 다시 세운 거야.”

여동생의 혼란스러움을 눈치챘는지, 정철이 해명했다.

“이건 우리 조상님이 정한 규정인데, 마을의 조택을 절대 새로 짓지 말고, 원래 모습을 유지하라고 하셨다고 해.”

“정말 이상한 규정이네.”

정미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정미는 사실 늘 그 조상이 궁금했다. 특히 부의를 접하게 된 이후로는 동경심까지 생길 지경이었다.

정미는 그 조상이 분명 부유하고 성정이 이상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후대에게 궁중의 어의가 될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들어 놓았겠는가? 그리고 지금, 조택을 보수해선 안 된다는 규정도 알게 되지 않았던가?

정철은 여동생의 멍한 모습에 웃었다.

“그래서 이 규정은 평소 아무도 얘기하지 않아. 나도 예전에 어른들과 제사를 지내러 왔다가 알게 된 거야.”

정미는 더욱 궁금해졌다.

“그럼 그땐 어디서 묵어? 그렇게 사람이 많은데, 둘째 할아버지 댁에 낑겨 있을 수도 없을 테고.”

“따라와 봐.”

정철이 정미를 데리고 앞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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