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정가촌(程家村)
헤어짐은 쉽고 만남은 어려운 법이었다. 어려서부터 병상에 붙잡혀있어서 먼 미래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화서에게는 특히 그랬다.
한두 달이 지나면 다시 만날 수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허전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미는 문발을 내리고 정철에게 말했다.
“오라버니, 화서가 아직도 저기 서서 쳐다보고 있어.”
정철은 마차의 객실에 기대 손에 든 서적을 보다가, 정미의 말에 눈을 들고 미소지으며 말했다.
“네가 문발을 내렸으니, 화서도 돌아갈 거야.”
정미의 긴 눈매가 동그래지더니, 정철에게 다가와서는 말을 늘였다.
“오라버니이―”
“미미, 나한테 부탁할 게 있니?”
정미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역시 오라버니는 나를 가장 잘 알아.”
정철은 최근 일 년 동안 여동생이 부쩍 예측하기 어려워졌다고 생각하며 책을 옆에 놓고는 물었다.
“말해 봐.”
“오라버니, 우리 마을에 가서 이틀 정도 머무는 거 어때?”
“마을? 방금 나왔잖아.”
그는 정미를 잘 알고 있었기에, 정미가 약간 우물쭈물하자 무언가 떠오른 듯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너, 정가촌(程家村)을 말하는 거야?”
정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모처럼 수도 밖으로 나왔잖아. 나온 김에 가서 이틀 머무르자.”
정철은 어이가 없었다.
“뭐가 ‘나온 김에’야? 아예 다른 방향인데! 무슨 짓을 하고 싶은 거야? 오라버니에게 솔직히 말해 봐.”
정미는 정철을 쉽게 구슬릴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경험상, 자신이 조금 뻔뻔하게 애교를 부리면 대충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기에, 정철의 옷깃을 잡아끌고 활짝 웃었다.
“오라버니, 너무 일찍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서 그래. 저번에 아버지가 나를 가묘로 보내겠다고 하셨는데, 그때부터 저택의 가묘(*家廟: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는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단 말이야. 날 데리고 가줘. 이틀 정도 늦게 가도 크게 상관없잖아.”
정철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틀 늦게 가는 건 상관없는데, 네 몸이…….”
정철이 어색하게 헛기침하고는 말했다.
“무리하면 안 되잖아.”
“오라버니!”
정미는 그를 매섭게 노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난 괜찮단 말이야.”
정철은 머쓱한 듯 말했다.
“괜찮으면 다행이고.”
“그러면, 우리 가는 거지?”
여동생이 고개를 들고 애원하자, 정철은 마음이 약해지려 했지만 애써 버텼다.
“하지만, 정영을 보고 싶지 않아 하는 거 아니었어?”
정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당연히 보고 싶지 않지. 하지만 마을에 도착했을 때 아홉째 당숙부네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일부러 접근해야 할지도 모르는 마당에, 지금 그렇게 말하면 오라버니가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둘러대야겠다.’
정철의 탐구하는 눈빛에 소녀는 뭔가 떠오른 듯 반문했다.
“내가 보고 싶지 않다고, 오라버니도 보고 싶지 않은 건 아니잖아?”
정철은 이렇게 한 방 먹을 줄은 몰랐다는 듯이 몹시 당황했고, 정미를 한참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원래 상황을 모면하려 한 말이었지만, 정철의 반응에 마음이 변한 정미는 그의 옷깃을 당기며 물었다.
“오라버니, 정말 보고 싶어?”
짧은 침묵 뒤, 정신을 되찾은 정철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말 날 난처하게 하는 질문이구나.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 미미가 믿지 않을 거고, 보고 싶다고 하면 미미가 화날까 봐 두려워. 그러니까 그냥 대답하지 않을래.”
“오라버니, 내가 그렇게 트집쟁이야?”
아마도 답을 너무 듣고 싶었던 탓인지, 소녀는 오라버니의 말에 넘어가지 않았고, 그를 연신 곁눈질하며 말했다.
“오라버니가 말할 수 없다면, 보고 싶다는 뜻이겠지?”
정미는 정철의 옷깃을 놓고 양팔로 자신의 무릎을 안고는 불쌍한 척을 했다.
“그럴 줄 알았어. 오라버니는 분명 보고 싶어 하는 거야.”
정미가 자신을 떠보는 것이라는 걸 분명 알면서도, 정철은 그녀의 이런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손을 뻗어 잡아당기고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마을을 떠날 때, 정영은 말도 하지 못하던 때였어. 그러니 이 오라버니가 보고 싶어 하겠어?”
정미는 이 말에 기뻐해야 마땅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오라버니, 만약 오라버니가 우리 집에 있다가 나중에 다른 곳으로 보내지면, 마찬가지로 나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란 거야?”
“그게 어떻게 같아.”
정철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고, 정미의 의심하는 눈빛에 웃으며 말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엔 인연이 있는 것이잖아. 어떤 것들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고,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은 것이야. 미미, 그렇지?”
정미는 자신과 한 씨를 떠올렸다.
친모녀 사이였지만, 그 오랜 세월 동안 한 씨는 정미보다 정요에게 더 많이 웃어주었었다. 이것이야말로 얕은 인연 아니겠는가?
“오라버니 말이 맞아.”
정미는 정철의 말에 동의했고, 오라버니가 정영을 보고 싶지 않아 하고, 이틀 동안 정영이 오라버니를 차지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설명하기 어려웠던 이상한 감정을 무시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정미가 객실의 낮은 침상 위에 누워서 쿨쿨 자고 있었을 때, 정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미, 다 왔어.”
줄곧 낱낱이 파헤치고 싶던 정가촌에 도착하자, 정미는 몸을 움찔하더니 일어나 앉아 잠에서 막 깨어나 게슴츠레한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정철이 부드러운 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얼굴 닦아. 앞으로 그렇게 급하게 일어나지 말고. 그랬다간 어지러울 수 있어.”
구석에 있던 환안은 둘째 공자가 또 그녀의 일을 대신 하는 것을 보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정미는 수건을 받아 얼굴을 닦았고, 마침내 정신이 들어 차창 옆으로 가 문발을 걷으려 했지만, 정철이 이를 막았다.
“방금 일어나서 바로 바람을 맞다니, 감기에 걸릴까 두렵지 않은 거야?”
정미는 그제야 얌전해졌다.
마차가 조금 흔들렸고, 밖에서 닭과 개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아이들이 양과 소를 모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미는 정철을 흘끗 보았고, 그가 냉담한 표정으로 조금의 웃음기도 띠고 있지 않은 것을 보고는, 똑바로 앉아서 정신을 차렸다.
“어느 나리께서 오셨습니까?”
곧 마차가 멈추고, 밖에서 공손한 물음이 들려왔다.
정철은 정미에게 얌전히 있으라 눈치 주고는 일어나 마차에서 내렸다.
“열셋째 조카였구나.”
이어 정철의 청명한 목소리가 마차 안으로 들려왔다.
“승(勝) 숙부님, 제가 셋째 여동생과 일이 있어 외출했다가, 돌아올 때 마침 이 마을을 지나게 된 터라 이틀 정도 신세를 지려고 합니다.”
정미는 정가촌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여자아이였기에, 정가가 삼 년에 한 번 조상에게 크게 제사를 지낼 때엔 어른들을 따라 올 기회가 없었다. 드디어 둘째 오라버니가 태어난 곳에 오게 된 것과 마찬가지라,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몰래 창의 문발을 살짝 걷고 밖을 살폈다.
둘째 오라버니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중년 사내로, 피부가 까무잡잡했으며 실하고 튼튼한 몸매를 가진 자였다. 정미가 여태 봐왔던 사람들보다도 투박했지만, 그의 웃는 얼굴은 아주 푸근해 보였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노인 한 명이 나타났고, 정철은 급히 그를 맞이했다.
“둘째 할아버지, 여전히 원기 왕성하시네요.”
노인이 크게 웃었다.
“배불리 먹고 맘껏 마시니, 기력이 없을 리가. 이왕 왔으니 얼른 따뜻한 곳으로 들어가거라.”
노인은 굳게 닫힌 마차를 흘끗 보고는 그 중년 사내에게 말했다.
“어서 말을 데리고 들어가 여물을 먹이거라. 보아하니 말이 아주 많이 끌고 온 것 같구나. 열셋째야, 가자. 할아버지랑 술 한 잔 해야지.”
정철이 웃으며 말했다.
“할아버지, 셋째 여동생이 저와 함께 왔습니다.”
마차 옆으로 걸어온 정철이 말했다.
“정미, 내려와.”
마차의 문발이 걷히자, 아름다운 소녀가 뛰어내렸다.
마을 사람들은 떠들썩한 것을 좋아했고, 이를 구경하기 위해선 고생도 마다하지 않았기에, 이 마차가 마을에 들어오자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발걸음을 멈추게 한 바였다.
이때 아름다운 소녀가 마차에서 내리니, 급한 성질의 아가씨들과 젊은 부인들이 일행들과 수군거렸다.
“아닌데, 정영의 말로는 백부(伯府)의 셋째 아가씨는 못생겨서 누구나 미워한다고 했는데, 왜 이 아가씨는 선녀처럼 아름다울까?”
“누가 알겠어. 난 예전부터 그 계집이 믿음직스럽지 않았다고. 백부의 아가씨들이 마을에 오는 건 못 봤지만, 공자들은 봤잖아. 하나하나 모두 잘생겼던데, 아가씨들이라고 다를 리 있겠어?”
그녀들은 정철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쑥스러워 붉어진 얼굴로 작게 말했다.
“하지만, 저 애가 저렇게 자랐는데, 정영에게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
한 부인이 혀를 찼다.
“그것도 그래. 구백가(九叔家)에서 어찌 저런 인물이 나왔을까. 큰형과 둘째 형을 봐. 쯧쯧, 하나는 노름을 하고, 하나는 게으르고……. 인물이 못난 편은 아니지만, 이 마을에서는 흔한 얼굴이지. 그런데 저 애를 봐봐, 저 백옥같은 얼굴, 그리고 저 넓은 어깨와 얇은 허리, 탱탱한 엉덩이랑 긴 다리……. 너넨 아직 처녀라 모르지. 내가 알려줄게. 저런 사내를 데려가는 사람은 복을 누리게 될 거야.”
“아이고, 셋째 아주머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여인들은 화를 내면서도 정철의 몸매를 진득하게 쳐다봤다.
정철은 무예를 익힌 사람이었기에, 귀도 눈도 밝아 이 대화가 똑똑히 들려온 바였고, 몸도 마음도 불편해졌다. 등 뒤에서 뜨거운 눈빛이 쏟아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특히 탱탱하다고 표현된 곳이 가장 화끈거렸다.
마차에서 내린 환안이 몸을 돌려 손을 뻗었다.
“아가씨, 내려오세요.”
이 말에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이 갑자기 조용해졌고, 모두가 목을 길게 빼고 바라보았다. 연보라색 여우 가죽옷을 입은 소녀가 고개를 숙이고 몸을 앞으로 내밀어 살피더니, 환안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사뿐히 내려온 후, 고개를 들어 둘째 공자에게 살짝 미소지었다.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동안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이 이상하게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정철은 급히 다가가 여동생 앞을 막아서고는 소개했다.
“둘째 할아버지, 승 숙부님, 제 셋째 여동생입니다. ‘미’라고 부르시면 돼요. 정미, 이분들은 둘째 할아버지와 승 숙부님이셔.”
“둘째 할아버지, 승 숙부님, 안녕하세요.”
정미가 무릎을 꿇고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노인의 눈에는 의아함이 스쳤고,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을 흘끗 보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자꾸나.”
두 남매는 손을 잡고 노인을 따라 집에 들어갔고, 환안이 그 뒤를 따랐다. 팔근은 남아서 마차를 지켰다.
나무문이 느릿느릿하게 닫히자,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이 끊겼다.
그 주변은 곧바로 시끌벅적해졌다.
“저, 저 애가 열셋째의 여동생이라고? 세상에, 여태까지 그렇게 예쁜 아가씨는 본 적이 없는데!”
한 청년은 입가에 언제 흘렀는지 모를 침을 닦으며 말했다.
옆의 젊은 부인이 그에게 침을 뱉었다.
“퉤, 예쁘다고 해도 너랑 무슨 상관이야. 정신 차려, 따지자면 네 친척 동생이니까!”
청년이 헤헤 웃었다.
“보는 것도 안 됩니까. 친척 동생이든 아니든 우리랑은 관계없는걸요. 이렇게 예쁜 친척 동생이 있다면, 체면이 좀 살겠지요! 제 생각엔 이 친척 동생이 궁의 마마들보다 더 예쁠 겁니다!”
“궁의 마마들을 뵌 적은 있고? 허풍 떨기는!”
“하지만 저 친척 동생의 언니가 태자비마마이시지 않나요? 태자비마마도 궁의 마부인 아니겠습니까? 여동생이 이리 예쁘니, 언니가 궁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거군요.”
한 처녀가 발을 동동 굴렀다.
“정영 그 못된 계집, 누가 못생겼다는 거야. 뻔뻔한 거짓말을 하다니, 만나서 얘기 좀 해봐야겠어!”
“야, 기다려! 나도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