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젊음의 맛
“두…… 둘째 형님?”
용흔은 혀가 꼬여 말도 잘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시선이 아래로 떨어져 정철의 품에 안겨있는 정미를 보고서야 말이 제대로 나오기 시작했다.
“정미가 왜 그러지?”
정철은 ‘작은 패왕’을 보다가, 또 정미를 보다가, 순간 몹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미미를 침상 위에 내려놓고 수습할 사람을 찾는 게 먼저일까, 아님 정미의 방에 슬그머니 기어 들어온 이 뻔뻔한 녀석을 죽도록 때리는 게 먼저일까?’
두 가지 모두 정철에겐 아주 급한 일이었고, 이렇게 어려운 선택은 한 적이 없었다!
정철이 멈춰 선 것을 느낀 정미가 어지러운 머리를 애써 들어 올리며 물었다.
“오라버니?”
정미의 목소리에, 정철은 결심이 섰다.
그는 재빠르게 걸어 들어가 정미를 침상 위로 내려놓고, 뒤따라온 환안에게 분부했다.
“사촌 공자의 관리인 할멈을 모셔오거라!”
“예!”
아까부터 겁에 질려있던 환안은 몸을 돌려 달려나갔다. 바깥에 나와서야 예전에 아가씨가 온천마을에 올 땐 늘 교용을 데리고 왔었다는 것과, 자신은 여기에 처음 온지라 누가 사촌 공자의 관리인 할멈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환안은 칠칠찮은 성정이라 팔근 같은 하인들에게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사촌 공자의 관리인 할멈이라면 당연히 사촌 공자에게 물어보면 된다고 생각했기에, 곧장 화서에게로 달려갔다.
정철은 정미를 내려놓고, 이불을 덮어주고는 토닥이며 말했다.
“미미, 우선 기다리고 있어. 이따 화서의 관리인 할멈이 오면 도와주실 거야.”
그러고는 몸을 돌려 용흔에게로 다가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세손, 나가서 얘기 좀 하지요!”
정미는 오라버니가 용흔을 끌고 나가는 것을 빤히 쳐다보았다.
잠시 후 와당탕하는 소리와 소년의 돼지 멱따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왔지만, 조금의 동정심도 들지 않았다.
‘내가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용흔이 와서 소란을 피워 오라버니와 함께할 시간까지 빼앗기다니, 정말 미운 짓만 골라하는 구나!’
한편, 화서는 정철이 관리인 할멈을 정미에게 보내라고 한 것을 전해 듣고는, 정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급히 옷을 입고 관리인 할멈을 데리고 나섰다. 그러다 그는 용흔이 머리를 감싸고 쥐처럼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철 형님?”
소년은 놀라 발걸음을 재촉하여 다가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정미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정철은 의외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화서는 왜 온 거니?”
정철은 뒤따라온 관리인 할멈과 환안을 보고는 화서가 온 이유를 알아차렸고, 머리가 더욱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얼굴이 퉁퉁 부은 용흔을 흘끗 보고는 화서에게 말했다.
“화서, 여기까지 왔으니 세손을 방으로 모셔다 드리렴. 이 추운 밤에 밖에 서 있으면 감기에 걸리니.”
“그럼 정미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정미는 괜찮아. 내가 잘 해결할게.”
화서는 정철의 말에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용흔에게 말했다.
“세손, 가시지요.”
하지만 용흔이 어찌 기꺼이 돌아가려 하겠는가? 그는 화서를 매섭게 노려보고는 정철에게로 몸을 돌려 흉악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둘째 형님, 정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방금 피를 흘리는 걸 본 것 같은데.”
화서의 안색이 변했다.
“뭐라고, 정미가 피를 흘렸다고?”
그러자 화서도 꼼짝도 하지 않고 정철을 바라봤다.
“철 형님…….”
‘미미가 방 안에서 여전히 허튼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 녀석들이 소란을 피우다니!’
정철은 차가운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미미는 괜찮아. 어서 돌아가.”
그는 용흔을 힐끗 쳐다봤다.
“아니면, 세손께서 저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신 겁니까?”
용흔은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숙이고는 의기소침하게 떠났다.
정철은 그제야 관리인 할멈을 앞으로 불러 몇 마디 전달했고, 할멈은 웃고 싶었지만 웃을 수 없었기에 눈을 내리깔고 정미의 방으로 들어갔다.
정철은 바깥에 서서 묵묵히 기다렸다.
대략 삼십 분이 지났을 때, 관리인 할멈이 걸어 나오며 보고했다.
“아가씨께서 알아들으신 듯합니다.”
정철의 귀 끝은 살짝 붉어졌지만, 표정엔 전혀 드러내지 않고, 관리인 할멈에게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보였다.
“수고가 많았네. 아가씨들은 부끄럼이 많으니, 오늘 일은 마음속에만 담아두는 게 좋겠어.”
관리인 할멈은 정철의 겨울밤 별 같은 눈동자와 마주치자, 급히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노노(老奴)가 잘 알아들었습니다.”
관리인 할멈이 떠난 후, 정철은 방문을 흘끗 쳐다보았다. 들어가서 여동생을 다독여주고 싶었지만, 너무 민망하기도 했고 미미도 자신을 보고 싶지 않아 할 터이기에, 그는 그렇게 잠시 서 있다가 조용히 떠났다.
* * *
방 안의 정미는 이미 한참 멍한 상태였다.
‘관리인 할멈의 말로는, 내 그곳에서 피가 나는 것은 내가 다 커서, 성인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지. 하지만, 난 내년에야 열다섯이 되는데!’
그리고 관리인 할멈이 말하기를, 성인이 된 여인은 달마다 이 짓을 할 것이라 했고, 이것을 하면 시집을 가 아기를 낳을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게다가, 게다가 이건 불결한 일이기에 절대 사내에게 알려선 안 된다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정미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잡아당겼다.
‘그런데 오라버니가 알게 된 것뿐만 아니라, 오라버니의 몸에 묻히기까지 했잖아. 게다가 내가 곧 죽을 거라 생각해 오라버니에게 유언을 남겼고, 오라버니는……, 아아아! 오라버니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앞으로 평생 오라버니를 보고 싶지 않아졌는데 어떡하지? 잠깐, 오라버니도 이렇게 생각하는 거 아냐? 그건 안 되지!’
소녀는 이런 생각이 염치없는 행동이라는 것은 깨닫지 못한 채, 고개를 내밀어 무기력하게 환안을 불렀다.
“환안, 나가서 살펴봐. 오라버니가 아직도 바깥에 있어?”
환안이 달려 나가보더니, 돌아와 정미에게 알렸다.
“아가씨, 둘째 공자님께선 벌써 가셨습니다.”
정미가 환안을 매섭게 노려봤다.
‘어느 시종이 이렇게 말을 한단 말이야? 갔으면 간 거지, 왜 벌써라는 말을 붙여서는!’
그녀는 다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한참 허튼 생각을 하다가 결국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정미는 정오쯤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고, 눈을 뜨자마자 환안에게 물었다.
“오라버니가 왔다 갔었어?”
환안이 고개를 저었다.
“오지 않으셨어요. 하지만 사촌 공자님의 관리인 할멈을 보내오셔서, 며칠 동안 아가씨를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정미는 섭섭한 마음에 환안이 가져온 대추죽도 먹지 않았고, 세수와 양치질을 한 후 다시 침상 위에 눕더니, 아혜를 불러 부적 공부를 했다.
환안은 차갑게 식은 대추죽을 보다가, 뭔가 눈치를 챈 듯 정철을 찾으러 달려갔다.
* * *
같은 시각, 정철은 ‘작은 패왕’과 무예를 다루며 한 수도 봐주지 않고 그와 맞서고 있었다.
‘감히 한밤중에 미미의 방으로 슬그머니 기어들어 갔는데, 그보다 더 한 일도 못 할 리 없지.’
“여기까지 하자. 손목이 아파서 창도 못 들겠어.”
용흔은 홍영창(*紅纓槍: 붉은 술이 달린 창)을 안고 숨을 헐떡였다.
정철이 눈썹을 씰룩였다.
‘손목이 아파야 다행이지. 그럼 나쁜 짓을 못 할 테니까! 왜 내가 알아채지 못했을까. 이 녀석이 언제부터 미미를 엿보고 있었던 거지?’
정철은 맞은편의 씩씩하고 잘생긴 얼굴의 소년을 쳐다보았지만, 늘 여동생을 보기만 하면 괴롭히던 ‘작은 패왕’이, 언제부터 여동생에게 다른 마음을 품었는지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설마 미미가 예뻐졌기 때문인가?’
그 생각에 웃는 얼굴이 더욱 차가워졌다.
“세손, 중간에 그만 두시면 안 되지요. 그럼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정철의 위엄(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주로 인정사정없이 사람을 괴롭힐 때 나타나는)에 용흔은 죽는 소리를 내며 다시 덤벼들기 시작했다.
화서는 두꺼운 진홍색 피풍을 걸치고, 멀지 않은 곳에서 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에는 부러움이 스쳤다. 그러다 그는 정미의 몸종이 온 것을 보자 몇 마디 주고받았고, 두 사람은 함께 정미의 방으로 들어갔다.
정철은 그 둘을 흘끗 쳐다보고는 눈을 살짝 내리깔더니, 은창을 더욱 민첩하게 휘둘렀다.
* * *
정미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낯이 뜨거워져 급히 이불로 자신을 가렸다. 민망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방금까진 둘째 오라버니가 오기를 간절히 기대했지만, 오라버니가 오면 또 도저히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어젯밤엔 내가 대체 무슨 바보 같은 짓을 한 거야!’
정미는 이불속에 숨었고, 어둠 속에 있으니 천으로 눈을 가렸던 그날로 되돌아간 것만 같아 가슴이 먹먹해졌다.
‘왜 나에게만 이런 낭패가 일어나는 걸까. 큰언니, 그리고 정요도 첫 달거리를 했을 때 나처럼 이렇게 바보 같은 일을 겪었을까?’
정미는 단아하고 온화한 태자비와 또 항상 침착한 정요를 떠올렸지만, 도저히 그녀들이 창피를 당해 체면을 잃는 모습은 그려지지 않았다.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정미는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 돌아가. 난 조용히 혼자 있고 싶어.”
한참 뒤, 이불이 걷히더니 눈앞이 환해졌다.
화서가 한쪽에 앉아 물었다.
“정미, 좀 괜찮아?”
정미가 쑥스러운 듯 일어나 앉았다.
“화서, 너였구나.”
화서가 환하게 웃었다.
“철 형님인 줄 알았구나? 환안이 찾으러 왔었는데, 철 형님은 세손과 창 연습을 하고 있어서, 네가 밥도 안 먹었다는 말을 듣고 와봤지.”
화서는 웃음을 거두고 정미를 나무랐다.
“정미, 몸도 편치 않으면서 왜 밥을 안 먹은 거야?”
“배고프지 않아.”
‘편치않다’는 말은 정미의 마음에 거슬렸고, 요 며칠간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졌다.
화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배고프지 않아도 먹어야 해. 어찌 되었든 간에, 밥이 약보단 맛있지 않겠어?”
정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제멋대로 굴었겠지만, 오랜 세월 동안 약을 밥처럼 먹었던 사촌동생 앞에서 어찌 뻔뻔스럽게 굴 수 있겠는가?
정미가 누그러진 것을 본 화서는, 환안에게 명령했다.
“따뜻한 죽을 다시 내오거라.”
“예.”
환안은 차갑게 식은 대추죽을 치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따뜻한 죽을 다시 가지고 왔다.
“내게 줘.”
화서는 손을 뻗어 죽을 건네받았다. 그는 죽을 백자(白瓷) 숟가락으로 떠서 입가에 대고 후후 불고는, 정미에게 건넸다.
“어서 먹어.”
정미는 조금 불편한 마음이 들어 직접 숟가락을 들으려 손을 뻗었다.
“내가 직접 먹을게.”
하지만 화서는 숟가락을 옆으로 치우고 눈살을 찌푸렸다.
“몸이 아프잖아?”
정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화서가 물었다.
“예전에 너도 나한테 이렇게 먹여 주지 않았어? 설마 나는 약골이라, 네 눈엔 이 정도 일도 못 할 것처럼 보이는 거야?”
“누가 너보고 약골이래?”
정미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화내는 눈빛으로 물었다.
“용흔이 그랬지?”
화서는 색이 옅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누가 말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난 원래 이랬으니까. 얼른 먹어, 또 식는다.”
허약한 몸에 애매한 신분으로 십 년을 넘게 살아왔는데,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뭐가 두렵겠는가?
‘그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를 내치지만 않으면 잘 지낼 것이고, 앞으로도 더 잘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할 거야. 아마도 언젠간 나도 창술을 연습해 정미에게 보여줄 수 있겠지.’
정미는 순순히 죽을 먹었고, 따뜻한 죽을 넘기니 배가 꽤 편안해진 듯해 화서에게 웃어 보였다.
“화서, 고마워.”
화서가 눈을 돌렸다.
“누가 너보고 고마우래? 다 먹었으면 푹 쉬어, 난 가볼게.”
소년은 문 입구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물었다.
“정미, 철 형님이 네가 아프다고만 하셨는데, 도대체 어디가 아픈 거야? 대추는 보혈에 좋은 거로 알고 있는데.”
화서는 오랫동안 아팠던 탓에 여러 식재료에 대한 약효를 알고 있었다.
정미는 멈칫하더니 붉어진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최근에 발을 다쳐서 피를 많이 흘렸잖아. 그래서 계속 대추를 먹고 있었어. 게다가 어제 너무 오랫동안 길을 나선 탓에 감기에 걸린 거야. 얼른 돌아가서 일 봐. 나, 나는 이만 졸려서…….”
화서는 정미가 갑자기 왜 이렇게 당황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밖으로 나가면서 중얼거렸다.
“발이 다쳤으면, 족발을 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