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사촌 동생은 질투쟁이
“화서, 화났어?”
정미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화서가 창가에 서서 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화서에게로 다가가 그의 소매를 툭툭 건드렸다.
화서는 소매를 빼며 옆으로 피했다.
정미는 다시 다가가서 건드려 보았으나, 화서는 다시 한번 피했다.
정미가 어이없는 듯 말했다.
“화서,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너를 보러 왔는데, 정말 나를 무시하려고?”
화서의 손이 움찔하는가 싶었지만, 주먹을 꾹 쥐고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네가 맞이해주지 않으니, 그럼 그냥 돌아가야겠다.”
정미는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화서는 늘 말과 속마음이 달라서, 몰아붙여야만 진심을 드러내곤 했다.
바스락거리는 옷자락 소리가 들려왔고, 발걸음 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화서는 고개를 돌리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았다. 잠시 후 방 안이 조용해지자 그제야 조금 당황하며 급히 몸을 돌렸지만,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급하게 몇 걸음 걸어 문 입구로 다가갔고,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다가는, 화도 나고 속도 상하는 것을 느꼈다. 이내 그는 입을 가리고 격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기둥 옆에 숨어있던 정미는 더는 화서를 놀릴 엄두가 나지 않아 급히 걸어 나와 그의 등을 두드려줬다.
“안 갔어?”
화서가 그리 묻자, 정미는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뜨며 등을 마저 두드려줬다.
“또 나한테 장난친 거야?”
정미는 화서의 눈가가 조금 붉어진 것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화서는 이내 정미의 손을 뿌리치더니 침상으로 다가가 누웠다. 그러곤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당겨 덮었다.
‘오랜만에 봤더니, 성격이 더 이상해진 것 같네.’
정미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앉으며 한숨 쉬었다.
“화서, 계속 이러면 나 속상해. 모르지? 나 작년에 발을 다쳤는데, 피가 엄청 많이 났거든? 다 낫고 나서야 널 보러 온 거야. 근데 네가 나를 무시할 줄은…….”
화서가 이불을 내리고 앉아, 눈살을 찌푸리며 정미의 발을 쳐다보았다.
“발은 왜 다쳤어?”
“지금은 다 나았어. 우선 가자. 오라버니가 아직 응접실에 앉아있을 거야. 내 오라버니를 계속 기다리게 할 거야?”
화서는 부끄러운 듯 입을 꾹 다물더니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정미가 발을 다치고도 그를 보러왔다는 말에 화는 벌써 사르르 녹아내린 지 오래였다. 그러나 너무 빨리 용서한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고, 앞으로 정미가 또 함부로 그런 끔찍한 장난을 칠까 봐 협박했다.
“또 다시 그런 장난을 친다면, 다시는 널 상대하지 않을 거야. 말도 섞지 않을 거라고.”
이 말에 정미는 문득 가슴이 아파왔다.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있는 화서가 정말로……, 정말로 내 신혼 첫날밤에 조용히 죽는단 말이야?’
올해가 지나면, 화서는 겨우 열세 살이었다.
‘설마 소성년식마저 못 치르고 가는 걸까?’
소녀는 소성년식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잘 알지 못했지만, 어른들의 말로는 소성년식을 치러본 남자아이만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화서가 성인이 되지도 못하고 떠난다면, 너무 가련하지 않겠는가?
정미는 갑자기 그날 밤, 생명이 막바지로 치닫던 화서가 자신에게 하려고 했던 말이 무엇일지 몹시 궁금해졌다.
‘그래서 결국 내가 화서에게로 갔을까?’
정미는 아까 조금 늦게 깨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괴로워졌다. 하지만 그 악몽에서 자신은 그저 꿈을 꾸는 사람이며, 그 비극의 시작도 결말도 보지 못하고, 마치 실수로 난입했다가 재빨리 쫓겨난 불청객처럼, 그저 작은 부분만 볼 수 있단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꿈속에서는 그저 무력한 방관자일 뿐이었지만, 현실에선 그럴 수 없어!’
“정미.”
정미의 표정이 이상한 것을 본 화서는 자신의 말투가 너무 거칠었을까 걱정하며 말했다.
“방금은 나도 그냥 장난친 거야. 얼른 나가자. 철 형님을 기다리게 하지 말아야지.”
정미는 그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내려 노력하며 화서에게 신신당부했다.
“맞다, 너 내 오라버니 앞에서 나한테 정미라고 부르지 마. 사촌 누님이라고 불러야지!”
화서의 발걸음이 멈칫하는가 싶더니, 정미를 흘끗 노려보고는 방을 나섰다.
* * *
정철은 차 한잔을 다 마신 상태였고, 기척이 들리자 그쪽을 바라보고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화서, 안색이 괜찮아 보이는구나.”
방금의 일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화서는 조금 쑥스러운 듯 정철의 옆에 앉아 말했다.
“사실 계속 괜찮았어. 외조모님이 걱정이 많으셔서 그런 거지. 철 형님, 마침 아침에 제 아저씨가 신선한 채소랑 과일, 그리고 사슴 반 마리를 보내왔는데, 저녁에 같이 먹을래?”
이때 마침 정미가 걸어들어오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 사슴고기 얼려놨어? 만약 단단하게 얼었으면, 둘째 오라버니가 종이처럼 얇게 썰어서, 끓는 냄비에 넣고 깨장에 찍어 먹자. 아주 맛있을 거야.”
화서는 여태 계속 입맛이 없었지만, 정미의 말에 갑자기 허기를 느꼈다.
정철은 어이없다는 듯 여동생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미미는 나를 정말 요리사처럼 생각하는구나. 사슴고기를 써는 일을 나에게 시키다니. 뭐, 생각해보면 그저 화서 입 하나가 늘어난 것뿐이니 상관 없나.’
정철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응했다.
* * *
한 시진 후, 정미는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는 ‘작은 패왕’을 노려보다 결국 참지 못하고 외쳤다.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혼자서 삼 인분을 먹다니!”
용흔은 열심히 먹으며 불평했다.
“말을 타고 여기까지 왔다고.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어찌 밥도 못 먹게 하는 거야?”
“당신이 말을 타고 온 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에요?”
화서가 정미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정미, 그만하고 두부부터 먹어.”
화서는 하얗고 부드럽게 데워진 두부를 집어 정미의 접시에 올려줬다.
용흔이 멈칫했다.
‘두부를 먹으라고? 이 녀석이 잘생긴 얼굴을 믿고 그런 창피한 말을 하는구나!’ (*중국에서 두부를 먹으라(吃豆腐)는 말은 여인을 희롱한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음)
“못난 계집, 고기나 먹거라!”
그는 사슴고기를 한 점 집어 정미에게 건넸다.
정미는 용흔을 볼 때마다 그가 망가트린 병풍이 떠오르는 탓에, 짜증이 치밀었다.
‘사선병풍(*四扇屛風: 네 쪽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병풍)은 예전에 둘째 오라버니가 선물해준 거란 말이야.’
그런데 용흔이 네 쪽으로 된 병풍 중 하나를 망가트려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에, 정미는 죽도록 마음이 아팠다.
“사슴고기 말고 두부만 먹을 겁니다!”
화서는 정미가 두부를 먹는 것을 보고, 가볍게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은 이 세상의 어느 아름다운 꽃보다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작은 패왕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는 꽃처럼 웃는 소년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패천 그 개자식이 나를 속인 게지. 못난 계집에게 분명 저 약골의 아기가 생겼을 거야. 안 그럼 저 녀석에게 왜 이렇게 잘해주겠어?’
마주 보는 두 소년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 정철은……, 여전히 바깥에서 사슴고기를 썰고 있었다.
* * *
사슴고기를 다 먹을 때쯤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용흔은 원하던 대로 이곳에 묵게 되었다.
정미는 방으로 돌아갔다가, 왠지 배가 더부룩해 환안을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마을의 날씨는 수도보다 따뜻했지만, 그래도 밤엔 쌀쌀했다. 정미는 피풍을 여미고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온천 쪽으로 향했다.
위국공부가 소유한 온천마을엔 크고 작은 온천이 열 곳 정도 있었다. 하인들이 쓰는 가장 큰 온천은 마을의 앞쪽에 있었고, 다른 온천들은 실내에 있기도 했지만, 야외에 위치하기도 했다. 야외에 있는 온천은 사방에 휘장이나 나무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지금은 사람들이 잘 쓰지 않는 시간대였기에, 정미는 휘장이 둘러진 온천을 골라 환안에게 당부했다.
“밖에서 지키고 있어. 잠시 있다가 나올게.”
정미는 겹겹이 둘러진 휘장을 지나 온천에 도착하고는, 옷을 하나씩 벗었다.
뽀얀 몸이 달빛에 천천히 드러나자, 정미는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정미는 어깨를 움츠리고 급히 온천으로 들어가 온몸을 온천물에 담갔다.
따뜻한 온천물이 소녀의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감쌌다. 편하게 뻗은 긴 다리는 몰래 물가로 헤엄쳐온 물고기의 지느러미 같았다.
정미는 온천 벽에 머리를 기댔고, 쾌적한 기분에 점점 눈이 감았다가, 갑자기 복통이 느껴져 놀라 깨어났다.
그녀는 아랫배를 감쌌고, 온천물이 조금 이상해진 걸 발견했다.
‘뭐야, 이 아른거리는 붉은 색은…….’
정미는 깜짝 놀라, 손을 모아 온천물을 떠올려 자세히 들여다봤다. 아무리 봐도, 아무리 봐도 그건 선혈이었다.
‘물에 웬 피가 섞여있지? 누가 다쳤나?’
정미의 첫 반응은, 사방을 둘러보는 일이었다.
여긴 작은 온천 못이고, 반 장(丈) 정도의 크기였다. 한 사람이 쓸만한 크기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 내 피인가?’
온몸에 소름이 돋은 정미는 우선 발을 들어보았으나, 아무 문제도 보이지 않자 급히 온몸을 더듬어보았다.
‘아무 데도 다치지 않았는데!’
정미는 놀랍고 두려웠으며 점점 무거워지는 복부에 신경이 쓰였다.
‘설마 여기인가?’
정미는 고개를 숙여 배를 빤히 쳐다봤다.
환한 달빛과 온천 못 사방의 나무에 걸린 등롱 덕분에 정미의 시야는 조금의 방해도 받지 않았고, 때문에 복부 쪽의 붉은색이 다른 곳보다 더 진한 게 똑똑히 보였다.
정미는 손을 뻗어 평평한 아랫배를 만져보았고, 아무 이상이 없자 저도 모르게 손을 아래쪽으로 옮겨보았다. 다시 손을 들어봤을 땐, 선혈이 잔뜩 묻어나왔다.
소녀는 깜짝 놀라 혼비백산할 지경이었고, 복통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네발로 기듯 온천 못 위로 올라가 크게 외쳤다.
“환안, 어서 들어와 봐!”
밖을 지키고 있던 환안이 급히 달려왔다.
“아가씨, 무슨 일이세요?”
정미는 입술을 깨물고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다쳤어. 돌아가서 약을 바르게 어서 나를 부축해줘!”
“예에? 아, 네, 알겠습니다.”
환안은 의심스러운 듯 정미를 쳐다보다가 아래쪽으로 시선을 옮겼고, 바닥에 옅은 붉은 자국이 있는 것을 보고는 순간 멈칫했다.
환안은 주인보다도 더 겁이 나 급히 정미의 옷을 입혔고, 눈에서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가씨, 어쩌다 다치셨어요. 설마 뱀에 물리신 거예요? 다 제 잘못이에요. 사슴고기도 많이 먹고, 팔근이 부추겨서 술도 두 잔 마셨더니 까먹어버렸어요. 팔근이 이 마을은 따뜻해서 뱀이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말했었거든요. 엉엉엉, 아가씨께 말씀드려야 했는데…….”
“환안!”
정미가 비명을 질렀다. 뱀에게 그곳을 물렸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힘이 풀려 일어서있을 수가 없었다.
‘이 망할 계집, 돕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방해만 되고 있잖아? 나는 침착한 편이었네!’
정미는 환안과 함께 급히 옷을 입었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을 때, 갑자기 그곳에 뜨거운 게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숙여보니 다리를 따라 피가 흐르고 있었고, 동시에 심한 복통이 느껴졌다.
정미는 곧바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있었지만, 환안의 앞이었기에 억지로 버티며 말했다.
“환안, 안 되겠어. 너무 아파. 피가 계속 흘러!”
‘난 어쨌든 주인이니까, 어느 상황이든 간에 여종보다 당황해선 안 되지. 그게 무슨 꼴이야.’
“그, 그럼 이제 어떡해요?”
환안은 울어서 얼굴이 엉망이었다.
“아가씨,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먼저 확인해봤어야 했는데. 그럼 그 뱀이 절 물었을 거고, 아가씨를 물지 않았을 텐데. 엉엉엉…….”
“그만해!”
정미가 엄하게 고함쳤다.
‘이 망할 계집, 또 내가 뱀에 물렸다고 하다니! 또 뱀 얘길 했어! 한 번만 더 하면 진짜 못 버틸 것 같다고!’
정미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았다.
“환안, 그만 말하고 잘 들어. 지금 바로 가서 둘째 오라버니를 데려와!”
“좋아요, 그럼 아가씨는―”
“어서 가!”
정미는 배를 감싸며 재촉했다.
“맞다, 화서와 세손에게는 들키면 안 돼!”
‘화서가 알면 분명 걱정할 텐데, 그러다 또 아프면 어떡해. 그리고 용흔은…… 그 뱀이 용흔이 푼 게 아니라면 다행일 지경이야. 부르면 분명 웃음거리가 되겠지!’
정미는 용흔이 딱딱하게 굳은 뱀을 자신의 몸에 던졌던 일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 뱀은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무섭긴 했지만 그 망나니의 놀림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 차분함을 유지할 수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뱀이 내 그곳을 물었고, 배가 갈수록 아파 와. 이러다 죽는 거 아냐? 무, 물론 난 죽는 게 두렵지 않아. 그리 달갑지 않을 뿐이지.
여태까지 아혜와 공부하느라 그렇게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는데, 아직 큰언니랑 둘째 오라버니도 구하지 못했단 말이야. 더 아쉬운 건 이제 막 지혈생기부(止血生肌符)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쓸 수 없다는 사실이지.’
정미는 반쯤 젖은 옷을 입고 벌벌 떨며, 슬픈 얼굴로 오라버니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정철이 오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