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모호한 감정
“정미는 화서가 병이 났다는 것을 듣고는, 화서와 함께 며칠을 보내기 위해 갔습니다.”
용흔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며칠 함께 한다고? 어떻게?”
정요가 가볍게 웃었다.
“화서가 온천마을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정미는 화서가 혼자 쓸쓸히 있을까 봐, 걱정이 되어 거기서 며칠 지내기로 했습니다.”
용흔의 얼굴이 몹시 어두워졌다.
“뭐가 쓸쓸하다는 거야. 화서는 매년 이맘때는 항상 바깥 마을에서 지냈잖아. 왜 올해에 유난히 그렇게 걱정하는 건데?”
그가 사동을 보내 몰래 사 온 이야기책에 적혀 있었다. 외로운 남녀가 같이 있으면, 마른 나무처럼 불이 붙기 쉽고, 같이 살면 아기를 낳게 된다고!
마른 나무에 어떻게 불이 붙는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임은 분명했다!
어쨌든, 정미가 그 바람불면 날아갈 것 같은 약골 화서와 아이를 낳는다고 생각하니, 용흔은 마음이 불편했다. 아주 불편했다.
정요가 웃으며 설명했다.
“아마 작년에 화서가 정미를 보러 서둘러 온 탓에, 병이 난 듯합니다. 정미가 속으로 얼마나 고마워하던지……. 그 둘은 어릴 적부터 사이가 좋았으니까요.”
용흔은 정요의 말을 듣고 더욱 화가 났다.
‘화서 그 약골, 몸이 좋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으면 되지! 괜히 돌아와서는 병이 나서 못난 계집과 함께 하게 되다니, 도대체 왜! 그 계집은 나를 보자마자 쫓아내고, 집에 돌아가서는 또 어머니께 회초리로 혼이 나고, 엉덩이가 아직까지도 얼얼하게 아픈데, 못난 계집은 왜 나를 보러오지 않는 거야? 보러 오기는커녕, 어렵사리 여동생을 떼어내고 어머니 몰래 달려왔더니, 허탕을 치게 하다니!’
용흔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정요를 향해서도 험악하게 말했다.
“나는 왜 정미가 어릴 적부터 화서와 사이가 좋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지? 정미는 계속 한지와 잘 놀았던 게 아니던가?”
‘한지와 잘 놀았던 게 아니더라도, 그럼 그 다음은 나여야 하지, 화서의 차례가 아닐 텐데!’
그러곤 그는 코웃음 치더니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정요는 작은 패왕이 노발대발하며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웃었다.
‘저 무법천지인 성정이 화가 나서 정미에게 억지로 굴면, 정미는 어떻게 할까?’
그녀는 웃고 나서 몸을 돌려 경쾌한 발걸음으로 맹 노부인을 모시러 염송당으로 돌아갔다.
* * *
“세손, 나오셨군요.”
‘잠깐, 세손이 이렇게 일찍 나오셨다면, 분명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 텐데!’
사동은 벌벌 떨며 급히 마차에서 내려와, 용흔이 마차에 오를 수 있게끔 몸을 쭈그려 계단이 되었다. 하지만 용흔은 상대도 하지 않고 곧장 마차에 뛰어올라 문발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 일도 없었나?’
사동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왕부에 돌아가기만 하면, 세자비께서 보고 계시니 세손이 난동을 피우지 못할 것이고, 그럼 모든 일이 다 순조로울 터였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안에서 와당탕 하는 소리가 났고, 사동이 급히 안으로 들어가 허겁지겁 용흔을 껴안았다.
“아이고, 주인님, 부수셔선 안 됩니다. 이건 상아 병풍인걸요!”
용흔이 그를 밀치며 말했다.
“저리 가라! 이 몸이 너에게까지 방해 받아야겠느냐?”
사동이 겁도 없이 또 달려들었다.
“세손, 정말 부수어선 안 됩니다. 정말 안 돼요! 도저히 부수고 싶으시면 소인을 부수세요. 이런 병풍은 소인을 천 개를 사도 모자랄 정돈데, 부수면 얼마나 아깝겠습니까!”
이 말에 용흔은 조금 누그러져 사동을 흘겨보았다.
“널 부수면 내 손이 아프지 않느냐! 내가 힘이 남아도는 것도 아닌데!”
사동이 웃으며 생각했다.
‘이렇게 좋은 병풍을 부수는 것이야말로 힘이 남아도는 것이겠지요!’
용흔은 성이 나 고개를 돌려 옻칠을 한 상아 병풍을 흘끗 보았다.
‘엉덩이가 아픈 것을 참고 직접 사온 것인데!’
그는 못난 계집을 위해 상아 병풍을 산 일을 어머니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여기 조각된 매화문양들은, 못난 계집이 보면 분명 좋아할 것 같았다.
하지만 못난 계집은 화서에게 갔고, 돌아온 이후엔 배 속에 아기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소성년식도 치루지 않은 작은 패왕은 남녀의 일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고, 못난 계집이 화서와 아이를 만든다고 생각하면, 병풍을 박살내 이 알 수 없는 짜증을 풀고만 싶었다.
하지만 정미를 위해 엄선한 병풍에 금이 간 것이 보이자, 마음이 또 괴로워져 이를 악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동은 몹시 놀랐다. 세손이 아무 말도 하지 않다니.
‘이, 이건 병풍을 부수는 것보다 더 무섭거든요!’
“세손―.”
그가 조심스럽게 용흔을 불렀다.
“그럼, 그냥 병풍을 부수세요.”
“꺼져!”
용흔이 발을 들어 사동을 입구까지 걷어찼다.
사동은 몰래 용흔을 살펴보다가 연거푸 아프다고 소리쳤다.
사람들은 모두 세손이 난폭하며 포악하다고, 무법천지라고들 했다. 하지만 그를 가까이서 모시는 사람들은 세손이 그렇게 사람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겉으론 온화하고 고상한척하지만 한 번 화가 났을 때 사람을 걷어차고 하인의 목숨을 반쪽 내는 그런 주인이라면, 누가 목숨을 걸겠는가?
“패천(覇天), 이리 와봐. 물어볼 게 있다.”
사동이 기어왔다.
“예, 주인님.”
“사내가 아가씨와 함께 살면, 아가씨는 아기를 낳게 되는 거지?”
대량에서의 대부호 가문 공자는, 열여섯 살이 되면 관례를 따라 통방(*通房: 첩을 겸한 여자)을 준비해주었다. 이는 아들이 나이는 먹어가는데, 아무것도 경험해보지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못 물들어 기생집에 드나들까 그런 것이었다.
차라리 알맞은 시녀를 골라주어 남녀의 정을 처음 맛보게 해주면, 우선 기생 여자에 연연하지 않게 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더욱 중요한 것은 미래에 아내를 맞을 때 서툴러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 수 있기에, 순조롭게 대를 이을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열여섯 살이 되기 전이라면, 단정한 집안에서는 몸이 상할까 봐 절대 일찍 총각 딱지를 떼지 못하게 했다. 아들과 손자를 위해 성실하고 정직한 사동을 골라 붙여주었으며, 공자가 나쁜 길로 빠질까 두려워 아리따운 여종들은 절대 아들의 방으로 배치하지 않았다.
경왕세자비 증 씨는 용흔에게 특히 그랬다.
증 씨가 보기에 이 무법천지인 말썽꾸러기는, 아가씨들이 목욕하는 걸 몰래 보는 짓까지 했으니, 남녀의 일을 알게 된 후에 집 안에서만 소란을 피우기만 하면 그것은 다행인 일일 것이었다. 만약 매일 질 나쁜 사동들을 데리고 길거리로 나가 규수들을 희롱한다면, 세자비로서 어찌 견딜 수 있겠는가!
그렇게 죽기 살기로 방어한 덕분에, 용흔은 아직도 성에 대해 백지 같은 상태였고, 정미가 한지에게 고백한 이후에야 소년과 소녀가 어디가 다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도 한지와 마찬가지로 어려서부터 못난 계집과 알던 사이였는데, 못난 계집은 왜 한지만 좋아하는 걸까? 설마 한지는 친사촌 오라버니고, 나는 아니어서?’
혼란스러워하며 반쯤 눈을 떴을 때쯤, 용흔은 몰래 이야기책을 읽기 시작했다. 차라리 보지 않았으면 나았을 것을, 본 후에는 완전히 눈을 떠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게 된 것이다.
‘패천’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사동은 이름은 패기가 넘치고 눈치도 빨랐지만, 사실 남녀의 일에 관해선 잘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세자비가 세손의 곁에 둔 것이기도 했다.
때문에 그는 용흔의 질문에 당황하여 눈이 둥그레졌다.
용흔은 참지 못하고 그의 머리를 두드렸다.
“왜 넋을 놨어?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주인이 자신을 깔보자, 패천이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사내와 여인이 함께 살면, 당연히 아기가 생기지요. 소인의 큰형님이 재작년에 혼인하셨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어머니께서 큰형수님에게 아기가 생겼다고, 큰형수님 앞에서 소란을 피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큰형수님께서 통통한 조카를 낳아주셨지요. 얼마나 귀여운지…….”
용흔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하나도 귀엽지 않아!’
그는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고,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여 마차의 문발을 걷고 외쳤다.
“마차를 돌려라, 수도 밖으로 간다!”
마부의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패천을 쳐다봤다.
패천은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용흔의 허벅지를 껴안았다.
“세손, 가시면 안 됩니다. 저, 저희 그냥 왕부로 돌아갑시다.”
용흔의 눈빛은 이글거렸다. 마치 잔잔한 수면 아래에서 방금 깨어난 사나운 짐승처럼, 언제라도 무서운 파괴력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 수도 밖으로 간다. 시간이 지체되어 못난 계집에게 아기가 생기면, 너희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
패천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셋째 아가씨에게 아기가 생겨 내가 죽을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지금 만약 이 도련님을 따라 수도 밖으로 갔다간 분명 살지 못할 거다. 세자비께서 내 살을 도려낼지도 모른다고!’
“주인님, 흥분하지 마십시오. 만약 세자비마마께서 아시면 어떡합니까?”
“어머니?”
용흔은 조금 정신을 차린 듯했지만, 뒤이어 뱉은 말에 패천은 놀라 울고만 싶었다.
“그것까진 생각할 겨를이 없다. 괜찮다. 어머니가 나를 때려죽이시면 되지.”
그는 어머니에게 죽도록 맞는 것보다, 못난 계집에게 화서의 아이가 생기는 것이 더욱 싫었다.
“주인님, 그런 말씀을 하시면 소인이 놀라 죽습니다!”
패천이 대성통곡했다.
“돌아가셔서 세자비마마께 교외에서 이틀 정도 놀고 오겠다고 하시면, 마마께서 막지 않으실 겁니다. 저희 왕부에도 교외에 온천마을이 있지 않습니까.”
용흔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그래, 교외의 서산은 온통 온천 골짜기라, 많은 귀족 가문들은 그쪽에 온천마을을 세웠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못난 계집의 집안에만 없는 거였어.’
어머니께 맞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갈 수 있다면 당연히 좋은 것이었지만, 용흔은 여전히 망설였다.
“만약 늦으면 어떡하지?”
패천이 눈짓하고는 마차의 객실로 들어가자, 용흔은 눈치채고 그를 따라 들어갔다.
“세손, 걱정 마세요. 아직 날이 어두워지지 않았잖아요. 함께 살아도 날이 어두워져야만 아기가 생깁니다. 낮에는 괜찮습니다.”
패천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구나!’
용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마부에게 속도를 올리라 하며, 경왕부로 돌아갔다.
* * *
정미 남매는 이미 수도 밖으로 나가 마차는 교외의 들판 옆에 멈춰 선 채였다. 정미는 마차에 앉아 문발을 걷고, 고개를 내밀어 정철을 보며 물었다.
“오라버니, 다 됐어?”
길가엔 작은 화로가 있었고, 위에는 작은 솥이 놓인 채 부글부글 끓으며 하얀 김을 피워내는 중이었다. 다른 한쪽엔 모닥불을 피워, 야생 토끼를 굽고 있었다.
정철은 칼로 토끼 다리에 골고루 구멍을 냈고, 다른 한 손은 쉴 새 없이 흔들며 옆의 사동 팔근에게 말했다.
“팔근, 땔감을 더 넣지 않아도 된다. 가져온 벌꿀을 내오거라.”
“예.”
팔근이 대답하며 조용히 침을 꿀꺽 삼키고는, 꿀단지를 가지러 갔다.
옆에 서 있던 환안이 안달이 나서 손을 비볐다.
“둘째 공자님, 제가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정철이 눈을 들고 웃었다.
“너는 이따 깨끗한 그릇을 가져와, 끓인 버섯탕과 구운 토끼고기를 셋째에게 가져다주면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꿀을 바른 토끼고기는 황금빛으로 구워졌고, 정철은 토끼 다리를 잘라 얇게 썰어 접시 위에 올리고는 환안에게 정미에게 가져다주라 눈짓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