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63화 (63/375)

63화. 좋은 손녀

정미가 낮은 목소리로 용남에게 말했다.

“사실, 이 하권은 내 둘째 오라버니가 나를 기쁘게 해주려고 직접 쓴 거예요. 상권을 보니 뒷이야기가 너무 궁금했는데, 하필 하권을 팔지 않아서. 둘째 오라버니가 어쩔 수 없이 이어 써서 내게 준 거지요.”

용남은 부러워 죽을 것만 같았고, 그 《수경기》를 잡고 놓지 않았다.

“정미, 네 오라버니는 정말 좋은 분이구나. 너는 정말 운이 좋아! 이 하권을 내게 빌려줘.”

정미가 거절했다.

“오라버니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말라고 당부했어요. 이건 오라버니가 아무렇게나 쓴 거라, 다른 사람이 알면 좋지 않아요.”

“그냥 좀 빌려줘. 너는 모르지, 내가 얼마나 애간장을 태우며 《수경기》하권을 기다렸는지! 매일 시종을 육출화재로 보내 물어보게 하고 있단 말이야. 이게 한수 선생이 쓴 게 아니더라도, 일단 보고 만족할 수 있잖아.”

정미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용남이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내게 빌려주면, 비밀을 하나 알려줄게.”

하지만 정미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비밀만 해도 이미 충분히 많아, 다른 사람의 비밀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네 둘째 오라버니에 관한 비밀이야.”

정미의 동공이 흔들렸다.

‘만약 둘째 오라버니의 일이라면…….’

사실 꽤나 궁금했다.

“내가 말해줄게. 심이가, 네 둘째 오라버니를 좋―”

용남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와당탕하는 큰 소리가 들려왔다.

두 소녀가 동시에 바라보자, 화개부귀(*花開富貴: 부귀가 꽃처럼 활짝 피라는 소망을 담은 꽃문양) 문양의 병풍이 우르르 쓰러져 있었고, 용흔이 병풍 위에 넘어져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훤했다.

세 사람은 서로를 멍하게 마주 봤고, 방 안에는 적막이 흘렀다.

그 모습을 본 남 군주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만이 들었다.

‘왜 나에겐 이런 오라버니만 있는 거야!’

* * *

정철은 경왕세자비인 증 씨가 용흔을 데리고 사과하러 왔다는 소식을 듣자,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작은 패왕이 또 여동생을 괴롭힐까 봐 얼른 비서거로 왔다.

마당에 막 들어섰을 때 그는 방 안에서부터 나는 큰 소리를 들어, 발걸음을 재촉해서 들어왔다.

“미미, 무슨 일이야?”

들어오자마자 보인 것은 난처한 듯 병풍 위에 넘어져 있는 용흔이었다. 방 안은 방금 병풍이 쓰러진 소리의 메아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조용했다.

정철의 물음에 정미는 정신이 번쩍 들어, 몹시 화가 나 고자질했다.

“오라버니, 저자가 우리의 말을 엿들었어!”

“누가 엿들었다는 거야. 나, 나는 그저 병풍 옆에 서 있었을 뿐인데! 이러는 것도 안 되는 거야?”

용흔은 정미가 창피를 주며 고자질을 하자, 지고 싶지 않아 급히 변명했다.

작은 패왕이 무서워하는 사람은 경왕세자비 뿐만 아니라, 정씨 집안의 둘째 공자도 포함이었다.

어릴 적 용흔이 정미를 괴롭히면, 늘 정철이 혼을 냈다. 가장 가증스러운 것은 정철이 함정을 파놓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용흔이 재수 없게 그 함정에 걸려들어도 누구에게 말할 수 없었기에, 그저 당해오곤 하였다.

시간이 오래 지나고, 작은 패왕은 입으로는 하늘도 땅도 무섭지 않다고 했지만, 정철을 보니 마음속엔 여전히 조금 두려움이 남아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미는 용흔의 이 거리낌 없는 성질을 견딜 수 없었고, 차가운 표정으로 책문했다.

“왜 쓸데없이 병풍 옆에 서 있었던 거예요?”

용흔이 정미를 노려보며 사납게 말했다.

“경치를 보는 것도 안 되나!”

그 뜻은 병풍 위의 경치를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미는 그의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다가, 곧 화가 나 붉어진 얼굴로 정철에게 말했다.

“오라버니, 내가 방금 옷을 갈아입으려고 했는데…….”

용흔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저, 저 계집이 지금 무슨 뜻이지?’

작은 패왕은 잠시 멍해졌고, 정철은 순간적으로 반응했다.

‘뭐라, 내 여동생의 말을 엿들었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괘씸한데, 미미가 옷을 갈아입는 것도 몰래 보려고 했다고?’

정철의 얼굴이 아주 어두워졌고, 한 손으로 ‘작은 패왕’을 들어 올렸다.

“미미, 군주를 데리고 이야기 나누고 있어. 나는 세손이 심하게 넘어진 것 같으니, 데려가서 쉬게 하마.”

남 군주는 자신의 오라버니가 다른 집 오라버니에게 들려가는 것을 빤히 보다가 눈을 끔뻑거렸다.

“정미, 방금 네 둘째 오라버니가 우리 오라버니를 들고 간 거야?”

‘왜 끌고 간 것처럼 느껴졌지?’

“맞아요.”

정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군주네 오라버니가 그렇게 넘어졌으니, 제 오라버니가 또 고생하겠어요.”

‘이렇게 못난 오라버니가 있으니 정말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

그렇게 생각한 남 군주는 조금 전의 소란으로 인해 책을 빌리는 일조차 잊고 말았다. 그녀는 어머니 증 씨가 남매를 데리고 염송당으로 가 맹 노부인에게 작별인사를 할 때쯤에야 갑자기 그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미 시간이 없어 그저 자신의 오라버니를 매섭게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용흔도 역시 여동생에게 발목을 잡혔다고 생각했다.

‘만약 오늘 용남을 데리고 정미를 보러 가지 않고 혼자 갔다면 정미가 나를 밖으로 내쫓지 않았을 텐데. 만약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면, 그렇게 창피를 당하지도 않았을 거고. 하필 정씨네 둘째 형님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을 텐데!’

작은 패왕 용흔은 생각할수록 화가 나 속으로 결심했다. 앞으로 정미를 보러 갈 땐, 절대 여동생을 데리고 가지 않겠다고!

‘내가 그 못난 계집의 병풍을 망가트렸으니, 좋은 물건을 찾아 배상해야겠구나. 그때 직접 와서 주어야겠어.’

용흔은 기분이 조금 좋아졌고, 턱을 만지며 웃었다.

용남은 그런 오라버니의 모습을 어리둥절해하며 보다가 크게 분노했다.

‘정말 견딜 수 없어. 왜 오라버니는 갈수록 부녀자들을 놀리는 걸 좋아하는 호색가가 되는 거야!’

“아야!”

용흔이 놀라 소리쳤다.

맹 노부인에게 작별인사를 하던 증 씨가 멈칫하더니 매서운 눈빛을 보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여동생이 저를 꼬집었단 말이에요……!”

증 씨는 더 이상 머물러있을 엄두가 나지 않아, 아들과 딸을 데리고 부리나케 백부를 떠났다.

맹 노부인은 숨을 돌리고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측근 하인에게 말했다.

“이제 갔구나. 경왕세자비의 신분에 푸대접할 수도 없지만, 그 아들은 너무 골치가 아파. 듣기로는, 셋째의 병풍도 망가트렸다지?”

“그렇습니다.”

측근 하인이 말했다.

“세손이 다치지 않았다면 다행이다. 이게 무슨 사과를 하러 온 것이란 말이냐. 완전히 둘째 며느리인 그 애를 지지해주러 온 것이지.”

맹 노부인의 말투에 언짢음이 묻어나왔고, 뭔갈 깨달은 듯 확신했다.

“둘째 며느리는 별말 없었는가?”

측근 하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없었을 겁니다. 세자비께서 나오신 후 별다른 반응이 없었습니다.”

맹 노부인이 가볍게 웃었다.

“나도 그리 생각한다. 자, 내 머리를 주물러 주거라. 이른 아침부터 실랑이했더니 머리가 아파 죽겠구나.”

측근 하인이 맹 노부인의 뒤로 가서, 그녀의 머리를 대신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복이 입구에서 말했다.

“노부인, 둘째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둘째가?”

맹 노부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냉담한 말투로 말했다.

“내가 쉬고 있으니, 돌아가라 하거라!”

아복이 망설이더니, 방금 정요가 집어 넣어준 염낭을 몰래 매만지고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둘째 아가씨께서 아주 급한 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몹시 화급한 일이요.”

맹 노부인의 눈썹을 더욱 찌푸렸다.

“화급한 일? 그럼 들어오라 해라. 얼마나 급한 일인지 한번 들어보자.”

아복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생각했다.

‘둘째 아가씨는 정말 대단하구나. 내게 노부인이 만약 만나지 않겠다 하시면 이렇게 말하라고 말씀하시더니, 정말 노부인이 만나지 않겠다 하실 줄이야.’

정요는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노부인이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라고도 미리 예상한 듯했다.

아복은 몸을 돌려 둘째 아가씨인 정요를 모시러 갔다.

잠시 후, 산뜻하고 아름다운 소녀가 천천히 걸어들어왔고, 들어오자마자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조모님, 손녀가 문안 인사 올립니다.”

맹 노부인은 조금 성가신 듯 말했다.

“요야, 무슨 화급한 일이냐. 내게 말해보아라. 최대한 빠를수록 좋다. 지금 내 머리가 너무 아파서 말이다.”

정요가 몸을 일으키고 대범하게 말했다.

“조모님, 손녀가 말하고 싶은 말이, 바로 조모님의 두통과 관련이 있는 일입니다.”

정요의 웃는 얼굴은 따뜻했고, 말투는 차분했기에,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말은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경왕세자비께서 이른 아침부터 찾아오신 바람에 조모님께서 일찍 일어나셨다고 들었습니다. 분명 머리가 아프실 것 같았고, 마침 손녀가 예전에 우연히 안마법을 배운 적 있으니, 조모님의 두통을 조금 낫게 해드릴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요.”

맹 노부인이 놀라 물었다.

“그게 네가 말한 화급한 일이냐?”

정요는 입가에 계속 웃음을 머금고 있었고, 어른들에 대한 친근함이 묻어나오는 말투로 말했다.

“조모님께서 줄곧 백부를 위해 고생해오셨는데, 온 힘과 마음을 쓰신 탓에 두통을 얻으셨습니다. 만약 조모님의 두통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릴 수만 있다면, 이 손녀에게는 그야말로 화급한 일이지요. 조모님, 저에게 조모님의 치료를 해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면 안 될까요?”

정요의 미소가 너무 아름다웠고, 태도가 너무 진실한 탓인지, 맹 노부인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 번 해보아라.”

“조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정요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자리를 비켜준 측근 하인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맹 노부인의 뒤에 섰다.

그녀의 손가락은 부드럽고 섬세해서, 측근 하인의 두껍고 거친 손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손가락 안쪽으로 관자놀이를 주무르자, 곧바로 조금 편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맹 노부인이 점점 눈을 감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맹 노부인이 눈을 떴을 때 정요의 온화한 웃는 얼굴이 보여 놀란 듯 말했다.

“내, 내가 잠들었느냐?”

정요가 웃으며 말했다.

“예, 방금 반 시진 정도 주무셨습니다.”

맹 노부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뻐끔거렸다.

그녀는 매일 밤 잠에 들지 못했고, 항상 가까스로 잠에 들곤 했다. 밤엔 늘 자다가 깼고, 날이 밝을 때쯤 조금이나마 깊게 잠들었다. 그러고 날이 밝은 뒤 잠에서 깨면, 하루 종일 다시 잠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가 지금 반 시진이나 잠들었다니, 근 십 년 동안 없던 일이었다!

“내가 어떻게 잠들었지?”

맹 노부인은 정요를 믿을 수 없어, 고개를 돌려 측근 하인에게 물었다.

측근 하인은 정요가 앞으로 맹 노부인의 예쁨을 받고자 한다는 것을 알아챘기에 급히 말했다.

“둘째 아가씨께서 계속 부인의 머리를 안마해드렸습니다. 그러다 부인께서는 안마를 받으시다가 잠드셨지요.”

그러고는 웃었다.

“부인께선 모르시지요, 코를 골기까지 하셨는걸요. 아주 푹 주무셨습니다.”

맹 노부인이 고개를 놀려 정요를 보았다. 정요를 보는 표정이 조금 달라진 채였다.

“요야, 두통을 덜어주는 안마법을 배웠으면서, 왜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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