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찾아와 사과하다 (1)
그녀는 눈꺼풀을 살짝 떨구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한수선생(寒酥先生)’ 네 글자를 훑었고, 뭔가 깨달은 듯 외쳤다.
“환안아, 《이지취담》과《원맹기》를 가져와.”
“네.”
환안은 익숙한 듯 빠르게 꽉 찬 책장에서 책 두 권을 가져와 정미에게 건넸다.
정미는 눈앞에 놓인 세 권의 책을 보았다.
앞의 두 권은 통일적으로 인쇄된 것으로 보였고, 필적이 단정했다. 하지만 《수경기》는 필사된 것으로 작은 글자가 고아하고 힘이 있었다. 단정한 해서체의 필봉은 흐르는 구름과 물처럼 시원스러웠다.
정미의 시선이 낙관(*落款: 작품에 작가의 이름이나 호를 도장으로 찍은 것)으로 떨어졌다.
책 세 권의 낙관은 모두 ‘한수선생’ 네 글자였다.
“이《수경기》, 오라버니가 필사한 것은 아니겠지? 설마 계속 돌아오지 않던 이유가 이걸 쓰느라 그랬던 건가?”
정미는 갑자기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고, 오라버니가 옆에 없어서 바로 그에게 물어볼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그래서 다음 날, 그녀는 정철이 왔을 때 곧장 물어보았다.
“둘째 오라버니, 어제 오라버니가 무슨 일을 하고 왔는지 알겠어.”
정철의 눈빛이 뜨끔했다.
“오, 미미가 뭘 알아맞혔을까?”
만약 정미가 몇 살만 더 많았어도, 오라버니의 물음이 아주 교활했다는 것을 알아챘을 터였다.
그는 ‘뭘 알아맞혔나’라고만 물었지, 뻔뻔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배해 자신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아쉽게도 소녀는 오라버니의 간사한 부분을 알아채지 못했고, 조금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내 책을 베껴 쓰러 간 거지, 그렇지?”
정철은 잠깐 멍해졌고, 이내 웃음을 머금고 칭찬했다.
“미미는 정말 총명하구나.”
정철이 인정하자, 정미는 더욱 의기양양해지면서도 감동을 느꼈다. 그녀는 정철의 오른손을 잡아들고 자세히 살펴보다가, 또 조금 의심했다.
‘그 《수경기》가 그렇게 두꺼운데, 오라버니가 국공부에서 떠난 뒤 베껴 쓰기 시작한 거라면 손에 분명 굳은살이 생겼어야 해. 심한지 안 심한지 보려고 했더니, 왜 오라버니의 손가락은 가느다랗고 깨끗할 뿐 전혀 이상한 점이 없는 거지?’
정철은 정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챈 듯 뻔뻔하게 손을 빼며 화제를 돌렸다.
“미미, 《수경기》는 재밌었어?”
“재밌었어. 결말이 그럴 줄은 몰랐는데, 정말 뜻밖이야.”
말을 반쯤 했을 때, 정미가 급히 멈추고 괴로운 듯 입을 막았다.
정철은 입가에 옅은 웃음기를 띠며 물었다.
“그래? 뜻밖이라고? 그 말은, 정미가 밤새 《수경기》를 다 봤단 거네?”
“하하…….”
정미는 눈을 끔벅였다.
‘오라버니가 언제부터 이렇게 교활해졌지, 책도 재밌게 못 보게 하네!’
“오라버니, 화내지 마. 약속할게. 앞으로 다신 밤새워서 책을 읽지 않을게. 어제는, 어제는 원래 그냥 뒤적거리기만 하려고 했는데…….”
정철이 눈을 떨구고 한숨 쉬었다.
“미미, 네게 화난 게 아니야. 네가 어려서 옳고 그름을 잘 모르니, 몸을 해칠까 그런 거야.”
‘어머니는 자상한 사람이 아니시고,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다. 만약 내가 미미를 아껴주지 않으면 누가 아껴주겠어?’
조금 상심한 오라버니를 본 정미는 갑자기 후회가 되었다.
‘오라버니를 지키겠다고 일찍이 맹세해놓고, 어째서 여전히 예전처럼 오라버니에게 걱정만 끼쳤을까?’
정미가 손을 뻗어 정철의 손을 잡아당겼다.
“오라버니, 앞으로 그러지 않을게. 오라버니의 말 잘 들을게.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 모두 오라버니에게 물을게. 어때?”
정철은 정미의 말투에 묻어나오는 진지함에, 유감스러우면서도 마음이 아파와 손을 들어 그녀를 토닥였다.
“미미, 오라버니의 말은 그런 뜻이 아니야. 네가 크면 어떤 일들은 결국 네 자신이 결정해야 해. 누가 너를 위해 좋은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너 대신 결정할 순 없어.”
“그건 둘째 오라버니도 포함되는 거야?”
정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오라버니도 포함이야.”
“알겠어.”
정미는 눈을 떨궜고, 자신이 잡은 그의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정철의 손은 그녀만큼 앙증맞진 않았지만, 크고 가느다랬으며, 뼈마디가 선명했다. 늘 무술을 연마한 탓인지, 이렇게 잡으니 조금 손에 배기는 듯했다.
정미가 갑자기 그 손을 뒤집어봤다. 그러자 손가락 아랫마디에 터진 물집이 보였다.
“오라버니!”
정미가 눈을 들었다.
“외, 왼손으로 쓴 거야?”
여동생에게 비밀을 들킨 정철은 보기 드물게 긴장하여 저도 모르게 손을 빼냈다.
“가끔 왼손으로 쓰기도 해.”
“물집까지 생겼는데, 왜 오른손으로 바꾸지 않았어? 평소 오라버니가 글씨랑 창술을 연습할 때, 모두 오른손을 쓰는 걸 봤는데?”
정미는 정철이 왼손으로 글씨를 쓸 줄 안다는 것에 그리 크게 놀라지 않았고, 그저 마음 아픈 듯 꾸짖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결심했다. ‘보태부(*태아를 지키는 부적)’ 외에도 피를 멈추고 새살을 돋게 하는 부적도 배워야겠다고.
‘그럼 앞으로 오라버니가 다칠 때 치료해줄 수 있을 테니.’
정미가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에 관해 묻지 않자, 정철은 조용히 안심하면서도 답답함을 참지 못해 속으로 생각했다.
‘왜 궁금해하지 않는 거지?’
안타깝게도, 정철은 죽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여동생의 마음속에서 그녀의 오라버니는 못 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었고,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건 둘째 치고, 발로 글씨를 쓰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아혜에게 아직 배울 것이 너무 많았던 정미는, 오라버니와 더 오래 있지 못해 아쉬웠지만 편치 않은 마음을 뒤로하고는 이례적으로 정철에게 물었다.
“오라버니, 오늘은 안 바빠?”
정철은 여동생의 화제전환이 조금 빠르다고 느껴 잠시 적응을 하지 못해 멍해졌다가, 곧 말했다.
“오늘은 초사흗날이잖아. 외출할 수 없어. 너도 발을 다쳐서 함부로 다니면 안 되니, 오라버니와 함께 바둑을 둘까?”
정미는 ‘당연히 좋지.’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고 거절하려 하자 마음이 부서지는 듯했다.
“아니, 오라버니. 나 어제 너무 늦게 잤더니, 지금 조금 졸려…….”
정철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끔벅였다.
‘나 지금 여동생에게 내쫓기는 건가?’
* * *
비서거의 문을 나설 때까지도, 정철은 여전히 사색에 잠겨있었다.
‘열네 살 된 여자아이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째 오라버니.”
정철은 정신이 들어 반 장 정도 거리에 있는 정요를 바라보고는, 옅은 웃음기를 띠었다.
“둘째 동생이 왜 여기 있어?”
정요가 몰래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정철의 이런 웃음을 아주 싫어했다. 그는 항상 온화하고 예의 바르며, 겸손하면서도 소원했다.
이건 오라버니가 여동생에게 짓는 웃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손님에게, 낯선 사람에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따뜻하게 웃어 보이면서도 가까이하기 어려운 거리감이 있는 미소였다.
하지만, 그는 정미에겐 이렇지 않았다!
정요는 사실, 정동의 기분을 상당히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에겐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오라버니가 있지만, 그 오라버니는 그저 한 사람만을 여동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난 나에게 차라리 이런 오라버니가 없길 바라. 그리고……, 그리고 내 오라버니가 아주 무능한 사람이기를 바랄 뿐이야!’
이 세상의 이득을 한 사람이 모두 가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정요는 어제 그 일이 일어난 후, 오늘 아침 문안 인사를 드릴 때, 맹 노부인에게 당한 냉대를 떠올리면 금세 마음이 서늘해지곤 했다.
‘위국공 세자가 나를 좋아한다는 일이 알려진 것뿐만 아니라, 심지어 내가 아직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도 어른들의 미움을 받게 된 것은, 한 씨 뱃속에서 나온 그것 때문 아니던가!’
이 모든 안 좋은 일들은 마치……, 정미가 깨어난 이후로 시작된 것만 같았다.
‘설마…….’
정요는 머릿속에 어떤 추측을 떠올렸고, 예전 일부터 낱낱이 파헤치기 시작했다.
“둘째 오라버니, 나는 셋째 동생을 보러 온 거야. 어제 같이 국공부에 가지 못해서 계속 마음이 불편했거든.”
정철의 웃음이 더욱 옅어졌다.
“미미는 어제 잠을 잘 못 자서, 지금 이미 잠들었어. 나는 방금 거기서 나오는 길이야. 미미를 보고 싶으면 다음에 와.”
‘미미가 국공부에 가지 못한 걸 알면서도 보러 오다니, 그건 미미에게 기분 나쁜 일을 떠오르게 하는 일 아닌가?’
정철은 냉담한 표정으로 정요를 흘끗 보고는 성큼성큼 떠나갔다.
* * *
정철이 알맞은 때에 정요를 가로막은 덕분에, 정미는 미운 사람으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고, 마침내 공부에 집중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초나흗날이 되자 회인백부에 귀한 손님이 방문했다.
경왕세자비 증 씨가 아들과 딸을 데리고 한 씨의 서자와 서녀에게 사과를 하러 온 것이었다.
맹 노부인은 이를 듣자마자 급히 사람을 안으로 들였고, 경왕세자비 증 씨를 상좌에 앉힌 뒤, 시종에게 지난해 태자비가 보낸 좋은 차를 내오라 하고는 공손히 말했다.
“세자비마마께서 너무 겸손하십니다. 어린아이들이 싸우는 건 자주 있는 일인데, 이리 수고스럽게 오시다니요.”
증 씨는 더욱 공손하게 웃었다.
“노부인, 그리 말하지 마세요. 큰언니가 아이들을 데리고 국공부에 갔을 때, 이 녀석이 또 소란을 피웠습니다. 만약 여기 와서 큰언니와 형부에게 사과드리지 않으면 제 마음이 편치 않을 겁니다.”
그러고는 용흔을 한 번 훑어봤다.
“다행히 이 녀석이 정직한 편이라, 왕부에 돌아간 이후 사과를 하러 와야 한다고 시끄럽게 굴더군요. 어제는 초사흗날이라 외출을 못 했고, 오늘에서야 온 겁니다.”
맹 노부인은 편두통이 있어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습관이 있었지만, 오늘은 일찍이 배첩(*拜帖: 남의 집에 방문할 때 내는 명함)을 받아 일부러 조금 일찍 일어난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머리가 아파와 머릿속이 두근두근 뛰는 듯했지만, 차마 증 씨의 앞에서 머리를 문지를 수는 없어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세손은 항상 좋은 아이였는걸요. 세자비께서 너무 꾸짖지 마세요.”
“그럼 큰언니와 다른 사람들은……”
증 씨는 회인백부에선 문안 인사를 올리는 시간이 다른 곳과 다르다는 것을 몰랐기에, 한 씨는 이미 문안 인사를 올린 줄 알고 바로 가려고 했다.
맹 노부인은 이를 바라왔던 듯 말했다.
“지금 이연원에 있습니다. 노신(老身)이 시종을 불러 세자비마마를 모셔가라 하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아복, 세자비마마를 둘째 부인에게로 모셔드리거라.”
사람이 떠나자 맹 노부인은 침상 머리맡에 기대 숨을 돌리며 소리쳤다.
“아희야, 어서 와서 내 머리를 좀 주무르거라!”
* * *
증 씨는 용흔과 용남을 데리고 이연원으로 향했다.
용흔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생각했다.
‘회인백부는 정말 작구나. 그간 아무 변화도 없다니. 하긴, 못난 계집의 성질이 그렇게 거친데, 꾸밀 수 있을 리가. 어쩐지 늘 국공부로 떠나더라니. 위국공부의 그 매화숲은 정말 괜찮던데 못난 계집에게도 보는 눈이 있는 모양이야. 하지만…….’
여기까지 생각한 용흔은 또 조금 화가 났다. 경왕부에도 아주 큰 도화숲이 있었는데, 못난 계집은 거의 와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보니 그 못난 계집은 보는 눈이 없는 듯했다.
‘하긴, 보는 눈이 있었다면 어떻게 한지를 좋아할 수 있겠어. 한지는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따 만나면 크게 비웃어줘야지. 그 못난 계집이 일찍이 단념하고 다시는 헛된 생각을 하지 않도록!’
“큰오라버니, 뭘 보고 있는 거야?”
용남은 자신의 오라버니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모습에 적응이 되지 않아 조용히 그를 잡아당겼다.
용흔은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길을 익히는 거야. 널 또 잃어버리면 어디서 찾을 수 있겠어?”
“오라버니!”
용남은 화가 나 발을 동동 굴렀다.
‘다른 집안에 와서까지 이렇게 친여동생을 나쁘게 말하는 오라버니가 또 있을까?’
그녀는 저도 모르게 정미가 부러워졌다. 정미에겐 부러운 구석이 거의 없었지만, 그녀에겐 좋은 오라버니가 있었고, 그 점만은 주변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했다.
‘어쩐지 매번 정씨 집안의 둘째 오라버니를 언급할 때마다 심이의 얼굴이 그렇게 붉어지더라니, 분명 부러워서 그런 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