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그윽한 향기
정미는 갈수록 걱정이 되어 얼굴에 핏기가 거의 없었고, 붉었던 입술마저 창백해졌다.
“어머니, 오라버니가 언제 돌아온다고 말했던가요?”
한 씨의 표정이 근엄해졌다.
“미야, 왜 그러니? 네 오라버니가 말했다. 일을 마치면 바로 돌아오겠다고. 네 모습을 보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 같지 않니.”
정미는 혼란스러워졌다. 그저 고개를 떨구고 말을 더듬었다.
“저, 저는 그냥 둘째 오라버니가 걱정이 되어서요. 만약 말에서 떨어지면 어떡해요?”
“퉤퉤퉷! 새해부터 그게 무슨 재수 없는 말이야!”
한 씨가 침을 뱉고 어이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네 둘째 오라버니는 훌륭한 무예를 지녔어. 네 외조부한테서 전수 받은 것이지. 만약 그 아이가 말에서 떨어지면, 네 외조부가 그 아이를 가만두지 않을 거다!”
위국공은 개국 공훈으로, 창법을 대대로 전수했으며, 모든 위국공은 명성이 자자한 장군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위국공, 즉 정미의 큰외숙부는 일찍이 전쟁터에서 손목을 다쳐 어쩔 수 없이 수도로 돌아와 요양을 해야 했고, 위국공 세자는 어릴 때 몸이 약해 무예를 배웠어도 아버지와 할아버지들보다는 훨씬 못했다.
정철은 원래 무술을 배워보지 않았으나, 회인백부 둘째 나리가 첩과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왔을 때, 열네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은 아무 말 없이 위국공부로 달려가 노(老)위국공 앞에 무릎을 꿇고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꼬박 하룻밤을 무릎을 꿇고 있었고, 마찬가지로 잠을 자지 못한 노위국공은 관례를 깨고, 한씨 가문의 창법을 이 아무 혈연관계도 없는 외손자에게 전수해주었다.
사람들은 회인백부의 둘째 공자를 언급하면, 그저 그가 대학자 고 선생의 제자인 것만 알고 있었다. 아주 적은 사람만이 그가 전 위국공의 창법을 전수 받은 사람임을 알았다.
정미는 당연히 둘째 오라버니를 믿었지만,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비처럼 내리는 화살을 맞고 멀쩡할 순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정미는 감히 그 악몽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고, 한 씨의 앞에서 그저 어쩔 줄을 몰라했다.
한 씨는 딸의 걱정을 이해하지 못했고, 재촉하며 말했다.
“됐다, 다시는 허튼 생각 하지 말거라. 아직 날이 밝으니 어서 돌아가 쉬렴. 네 발이 다 나으면 널 데리고 국공부에 가야 하니.”
한 씨는 멈칫하더니, 화서가 아프다는 말을 정미에게 전할까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정미가 여전히 조금 심상치 않으니, 일단은 말하지 말자. 어차피 말해봤자 소용이 없으니. 정미의 발이 다 나았을 때 다시 얘기하자.’
정미는 정철의 안위만을 생각할 뿐이었기에, 한 씨의 말을 듣고 일어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정미가 비틀거리며 걷는 것을 본 한 씨가 입을 열었다.
“기다려라, 사람을 불러 업혀가거라!”
한 씨는 막일을 하는 하인을 불러 정미를 업게 했고, 화미는 그 옆에 따라붙어 그렇게 세 사람이 이연원을 떠났다.
이연원의 문을 나서자 정미가 말했다.
“비서거로 돌아가지 말고, 중문으로 데려가 줘.”
하인이 잠깐 망설이자, 정미가 이어 말했다.
“얼른, 왜 망설이는 거야? 내가 어머니께 얘기하지 않으면 돼.”
막일을 하는 하인 주제에 감히 아가씨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고, 바로 중문으로 향했다.
* * *
정미는 중문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초석에 앉아, 얇은 입술을 꾹 다물고 입구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둠이 주위를 뒤덮고,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자 정미의 안색이 으스름한 밤빛 속에서 갈수록 창백해졌다.
화미는 결국 참지 못하고 권했다.
“아가씨, 날이 저물었으니 곧 중문을 잠글 거예요. 저희 돌아가요.”
정미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둘째 오라버니를 기다릴 거야.”
“하지만…….”
화미는 망설이다가 다시 권했다.
“여기서 기다리셔도 소용이 없으실 텐데요. 둘째 공자님은 분명 일이 있으신 걸 겁니다. 만약 돌아오시면 바로 아가씨를 찾아오실 거예요.”
‘뭐하러 굳이 여기서 기다려야 하나요?’라는 질문은, 속으로만 삼켰다.
정미는 치맛자락을 꼭 쥐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밤빛에 흩어졌다.
“나도 알아. 하지만, 여기 있으면 오라버니가 돌아오는 걸 가장 먼저 알 수 있잖아.”
이윽고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때쯤, 마침내 입구에서 낯익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정미는 벌떡 일어나 몇 발자국 뛰어가다, 쓰라린 고통을 느끼며 다시 뒤로 물러나 급히 꽃과 나무 뒤에 숨었다.
화미는 이를 이해하지 못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둘째 공자님께서 오셨는데, 왜 가지 않으세요?”
정미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안 갈 거야. 오라버니가 내가 여기 있는 걸 보면 분명 화를 낼 거니까.”
정철은 온화하고 자상하지만, 한번 화가 나면 아주 무서운 사람이었다.
“둘째 공자님께서 어찌 화를 내시겠어요?”
정미는 그녀를 보지 않았고, 점점 다가오는 정철에게 시선이 꽂혀 있었다. 입꼬리는 참지 못하고 살짝 올라갔다.
“아침에 입궁했을 때 발에 또 피가 흘렀어. 오라버니가 아주 오랫동안 잔소리를 했는데, 지금 내가 또 함부로 다니는 것을 보면 화내지 않을 리가 없어.”
소녀는 점점 가까워지는 오라버니를 바라봤고, 아주 멀쩡하게 살아 돌아온 것에 갑자기 마음에 울분이 차올라 눈을 떨궜다. 그 울분은 눈물이 되어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이런 모습을 화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손등으로 눈물을 살짝 닦았다.
그때 청록색의 면포를 입은 정철이 침착하게 걸어 지나가다가, 갑자기 되돌아와 그녀 앞에 멈춰 꽃과 나무를 헤쳤다.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어슴푸레한 밤빛과 적막한 달 때문인지, 정철의 목소리에선 알 수 없는 느낌이 묻어나왔다.
“미미, 왜 여기 있어?”
그가 물으며 쭈그려 앉아 정미와 시선을 맞췄다.
“나는…….”
정미는 정철이 화를 낼까 두려워 그의 옷깃을 붙잡으며 얼른 선수쳤다.
“오라버니가 내게 《수경기》를 준다고 했잖아. 아무리 초조하게 기다려도 오지 않아서, 결국 나와봤어.”
정철의 시선이 소녀의 붉어진 눈가를 지나 축축한 두 뺨에 꽂혔고, 침착하게 물었다.
“여기 얼마나 오래 있던 거야?”
그는 정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두 손을 뻗어, 그녀를 업은 뒤 화미를 차갑게 한 번 쳐다봤다.
화미는 둘째 공자의 차가운 눈빛에 놀라 소름이 돋았고,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두 남매의 뒷모습을 보고 슬며시 가슴을 부여잡으며 생각했다.
‘둘째 공자는 평소 청아하고 귀하신 줄 알았는데, 그 적선(謫仙)같은 인물이 차가운 표정을 지으니 참으로 무섭구나!’
* * *
정미는 정철의 등에 업혀 둘째 오라버니를 감싼 저기압을 느꼈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두 남매는 묵묵히 앞을 향했다. 정철은 비서거에 도착해 정미를 내려놓고 둘을 맞이하는 환안에게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셋째에게 물과 약을 내어주거라.”
그는 바깥방에 앉았고, 대략 일주향(*一炷香: 향 한 대가 타는 시간으로 약 30분) 뒤 환안이 다가왔다.
“둘째 공자님, 아가씨께서 들어오시라고 하십니다.”
정철은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몸이 따뜻해지고 발도 편해진 정미는, 걸어 들어오는 둘째 오라버니의 표정이 여전히 차가운 것을 보고, 시종들에게 나가라는 눈치를 주어 물러나게 한 뒤 웃음을 지어 보였다.
“둘째 오라버니, 내 책은 가지고 왔어?”
정철은 침상 앞으로 다가가 조금 멀찍한 곳에 앉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미미, 너 거기서 얼마나 기다린 거야? 이렇게 찬 바람을 쐬면 앓아누울 수 있다는 걸 알아, 몰라?”
“별로 안 기다렸어…….”
정미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정철이 자신의 손으로 정미의 손등을 덮었다.
정미는 의아한 듯 눈을 들었고, 정철은 화난 표정으로 얇은 입술을 꾹 다물더니, 정미를 꾸짖었다.
“손이 이렇게 찬데, 별로 안 기다렸다고? 미미, 오라버니에게 거짓말까지 하는 거야?”
정미는 오라버니의 화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줄은 몰랐기에, 억울하면서도 화가 나 갑자기 손을 빼며 입술을 깨물었다.
“누가 오라버니더러 말만 하고 책임지지 않으라고 했어? 분명 외가에서 돌아오면 내게 이야기책을 주겠다고 했으면서, 결국 눈 빠지게 기다려도 오라버니가 어디로 갔는지 몰랐는걸!”
“미미!”
정철의 말투에 알 수 없는 어이없음이 묻어나왔다.
“네가 바보처럼 거기서 기다린 게, 이야기책 때문이란 거야?”
정미는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녀는 당연히 정철이 사고가 날까 걱정이 됐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근거 없는 추측은 입 밖으로 꺼내면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미치광이 취급할 터였다.
“에이, 나는 또 미미가 나를 걱정하는 줄 알았지.”
정철은 정미에게 흘끗 웃어 보이며 천천히 말했다.
“오라버니가 오늘 일이 너무 많아서, 살 틈이 없었어.”
둘째 오라버니의 화가 누그러진 것 같자, 정미는 용기가 생겨 불평했다.
“《수경기》는 오라버니의 서재에 있는 거 아니야?”
만약 어디 둔 것인지 알았다면, 진작에 몰래 뒤져봤을 터였다.
정철이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가진 건 상권이고, 하권은 나도 서재로 가서 사야 해.”
지금 정미에겐 어떤 이야기책보다도, 오라버니가 무사히 돌아오는 것이 더 중요했지만, 굳이 삐딱하게 말했다.
“오라버니는 너무해. 다른 일 때문에 나를 신경 쓰지 않다니.”
정철이 일어나서 떠나려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럼 오라버니가 가서 육출화재가 문을 닫았는지 보고 올게.”
그러자 옷깃이 붙잡혔다.
소녀가 고개를 들고는 말했다.
“오라버니, 가지 마.”
정철이 다시 앉아 웃음을 거두고 정미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미미, 솔직히 말해 봐. 오늘 도대체 무슨 일이야?”
정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가장 친한 오라버니를 속이는 것은 정미도 원치 않았지만, 아혜의 존재는 누구와도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오늘 왠지 모르게 오라버니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계속 불편했어…….”
정철이 웃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했구나.”
“쓸데없는 생각 안 했어!”
정미는 해명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핑계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려도 마찬가지로 안절부절못했을 것이기에, 결국 정철에게 마음 내키는 대로 요구했다.
“어쨌든 앞으로 나와 한 말은 어기지 않기로 약속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으면 최소한, 최소한 사람을 보내 나한테 말해줘.”
정철이 실소했다.
“미미, 이렇게 걱정이 많아서야 앞으로 피곤하겠어.”
“내가 아무나 걱정하는 줄 알아?”
정미가 무의식중에 한 말에 정철이 멈칫했다.
“오라버니?”
정철이 일어나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내 건넸다.
“자, 네 《수경기》. 시간이 늦었으니 일찍 쉬어.”
그는 정미의 성정을 아주 잘 알기에 일부러 덧붙여 신신당부했다.
“밤에는 보지 마. 얼른 발이 나아야 정월 대보름에 널 데리고 화등을 보러 가지.”
말을 마친 정철은 정미가 기뻐하는지 분해하는지 보지도 않고 급히 나갔다.
정미는 책을 품에 안고 바보같이 웃었다. 둘째 오라버니의 말을 듣고 일찍 자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등불 앞으로 가 그 《수경기》의 하권을 빠르게 한번 훑어보았다.
따뜻한 규방과 짙은 갈색의 휘장, 책 위에서 장난스레 흔들리는 촛불의 그림자, 그리고 문필의 그윽한 향기에 소녀의 기분이 유달리 좋아졌고, 입꼬리에 웃음을 띤 채 여유롭게 책을 넘겨보다가, 점점 짙어지는 향기에 문득 의심을 느꼈다.
그녀는 손가락을 내밀어 그 고아하고 단정한 작은 글씨를 꾹 눌러보았다.
가느다랗고 새하얀 손가락 끝에 묻은 먹 자국이 더욱 선명해 보였다. 정미는 손가락을 코에 대고 킁킁 맡아보더니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이 《수경기》의 하권, 왜 먹물이 아직 다 마르지 않았지?”
그러고는 뭔가 떠오른 듯 외쳤다.
“환안아, 가서 봐봐. 밖에 비가 내리니?”
환안이 창을 열어보고는 대답했다.
“아니요. 달이 아직 떠 있는 걸요.”
정미는 책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