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잠시 마무리하다
단 노부인이 어두운 얼굴로 도 씨와 한 씨를 바라봤다.
“……그래서, 둘째가 그렇게 달아났다고?”
도 씨와 한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찾아오지 않고 뭐하고 있느냐!”
단 노부인은 화가 나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새해부터 한 사람이 기절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수 없었건만, 또 말썽을 피우는 아이가 있다니. 새해를 좀 좋게 보낼 순 없는 것이냔 말이다. 정월 대보름의 꽃등도 아직 보지 않았는데!’
단 노부인의 말에 도 씨와 한 씨는 멍해져 아무 반응이 없었고, 한지의 표정만이 크게 변하더니 고개를 돌려 바로 달려나갔다.
단 노부인은 신발 한 짝을 벗어 그의 등으로 던지며 고함쳤다.
“누가 너보고 가라 했느냐!”
신발을 맞은 한지는 넘어질 뻔했고, 용흔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기뻐했다.
경왕세자비 증 씨는 단 노부인이 이런 일을 겪게 된 것이 자신의 아들 때문이라고 느껴 마음에 걸렸기에, 손을 들어 용흔을 찰싹 때리며 말했다.
“흔아, 네가 발이 빠르니 어서 정씨 집안의 둘째 아가씨를 찾으러 가보거라.”
용흔은 불쾌한 듯 투덜거렸다.
“어머니, 저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여자아이를 달랠 줄도 모르고요.”
증 씨는 화가 나 입술이 떨렸다.
‘이 녀석, 내가 언제 달래러 가라고 했나?’
“둘째 아가씨를 그냥 데리고 오라고만 한 거다! 또 투덜대면 네 다리를 분질러버릴 테니 그리 알거라!”
증 씨가 살벌하게 말했다.
용흔은 더 이상 반항하지 못하고, 내키지 않는 듯 밖으로 나갔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용흔과 정요가 들어왔다.
“외조모님, 어머니, 저 빠르죠?”
용흔이 웃는 얼굴로 뿌듯한 듯 말했고, 뒤에 있던 정요는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
‘분명히 내가 스스로 사죄하러 온 것인데, 이 작은 패왕이 이렇게 말하니 내가 철없이 도망갔다 억지로 돌아온 것처럼 보이잖아!’
정요는 바로 무릎을 꿇고 창피한듯한 얼굴로 말했다.
“외조모님, 큰부인, 어머니,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버릇없이 외조모님, 큰부인께 걱정을 끼쳐드리고, 어머니께 창피를 드렸습니다.”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 한 씨에게로 몸을 돌려 머리를 바닥에 쿵쿵 박았다.
“어머니, 돌아가면 저를 가묘로 보내주세요. 절에서 조용히 지내며 다시는 시비를 불러일으키지 않겠습니다.”
한지는 몹시 놀라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무릎을 꿇었다.
“정요와 관련 없는 일입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그동안 저도 모르게 정요를 연모하고, 치근덕거리며 함께 있고 싶어 했습니다. 조모님, 어머니, 벌을 하시려거든 제게 심한 벌을 내려주십시오. 정요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한지는 말할수록 마음이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요는 한 번도 내게 먼저 다가온 적이 없었다. 늘 내가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끌려 다가가곤 했던 것이지. 그런데도 정요는 한 번도 내 앞에서 예의에 벗어난 말을 한 적 없지. 하지만 지금 그녀가 오히려 사람들 앞에 무릎 꿇고 모두에게 사죄하고 있구나.’
정요의 말이 맞았다. 어쨌든 그녀가 서녀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정미가 내게 고백하고, 매번 나를 볼 때마다 쫓아올 때, 조모님께서 어떻게 하셨던가? 매일 나를 찾아와 혼담을 꺼내지 않으셨던가?’
한지가 속으로 냉소했다.
‘오늘, 나는 반드시 정요를 지킬 것이다. 내가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위국공 세자이고, 미래의 위국공인데, 좋아하는 사람도 지키지 못하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한지, 입 다물어라!”
도 씨는 화가 나 눈앞이 어지러워, 아픈 기색으로 단 노부인을 바라보았다.
“제가 보기에 이 일은 두말할 것 없이, 제가 잘 가르치지 못한 탓에 한지가 철없이 행동한 것입니다. 돌아가면 제가 잘 훈계해 다시는 말썽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둘째 아가씨는…….”
도 씨가 한 씨에게로 돌아섰다.
“큰동생, 한지의 말이 맞아요. 두 아이에겐 아무 일도 없었는데 우리가 크게 놀랄 필요 없습니다. 제가 보니 둘째 아가씨도 나이를 점점 먹어가니, 앞으로 집에서 큰동생을 따라 예법을 더 배우면 될 겁니다. 가묘에 보낼 필요 없어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낯을 들 수 없을 정도의 잘못을 저지른 줄 알겠습니다!”
정요의 몸이 잘게 떨렸고, 얼굴은 창백해졌다.
위국공 부인의 말은 그녀를 위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위국공부에 더 이상 오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
예전의 정요는 너무 순진한 나머지, 성품과 재주로 사랑을 받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랑은 물 위의 부평초처럼, 약간의 바람에도 흔들리다가 흩어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출신이구나!’
정요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이며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한편 한지는 오히려 조용히 한숨을 돌렸다.
정요가 벌을 받지 않는다면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었다.
‘조모님과 어머니는 잠시 납득하지 못하겠지만, 내가 좀 더 시간을 들여 노력하면 기회가 있을 거야.’
그는 한 씨에게로 돌아서서, 마음속의 화를 억누르며 간청했다.
“고모님, 이 조카가 고모님께 절이라도 드릴 테니, 제발 정요를 벌하지 말아 주십시오…….”
“됐으니 그만하거라!”
도 씨는 몹시 화가 나, 늘 부드럽고 단정하던 것과는 달리 참지 못하고 아들에게 발길질을 했다.
“네가 정요에게 어떤 사람이고, 네 고모는 또 정요에게 어떤 사람인데! 네가 어떻게 그런 부탁을 할 수 있었단 말이냐? 너는 내가 홧병으로 죽었으면 하는 것이냐?”
“어머니,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한지는 난처하고 애가 타 울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용흔이 소란을 피우며 사람을 때린 것은 괜찮고, 내가 무릎을 꿇고 사정하는 것은 오히려 모든 게 다 잘못이라 하시다니.’
정요는 참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평소 한지를 믿음직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집안일을 처리하는 것엔 이리도 어리석구나. 아무리 처음엔 국공부인께서 나를 미워하지 않았다고 해도, 아들이 저리 말하는데 나를 어찌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어? 어떤 어머니가 아들이 다른 여인에게만 푹 빠진 것을 보고 기뻐할 수 있느냔 말이야.
그래도 오늘 일이 퍼져나가 내 명성에 먹칠을 한다 한들, 어쨌든 나는 크게 잘못한 것이 없다. 누가 나를 좋아한다고 해서, 죽음으로 뜻을 밝힐 필요는 없지.’
한 씨도 일을 크게 벌리고 싶진 않았다. 그녀가 데려온 딸의 명성을 망가뜨리면, 앞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다닐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미 조카가 그녀 앞에서 무릎을 꿇었을 때는 마음이 몹시 약해졌던 차였다. 큰올케언니의 성정이면 분명 앞으로 짧은 시간 안에 조카의 혼사를 정할 텐데, 진심으로 조카를 위한 일이었다 한들, 결국 자신은 한 쌍의 연인을 갈라놓은 사람이었고, 조카의 원망을 받는 것 또한 원치 않았다.
한 씨가 웃으며 말했다.
“올케언니, 한지에게 화내지 마세요. 이 나이의 아이들 중 말을 잘 듣는 아이가 어디 있습니까? 정요는 걱정 마세요. 제가 어찌 정요를 벌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딸이 다 컸는데 아무도 원하지 않으면, 그게 더 머리 아픈 일이지요.”
이 말에 창피를 느낀 도 씨는 얼굴이 귀 끝까지 빨개졌고, 몰래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를 비웃다니, 그 말은 내 아들이 그쪽 딸에게 적극적으로 들이댔다고 비꼬는 것 아닌가! 하지만 어리석게도, 네 말에 네 딸도 같이 말려들게 되었구나!’
거듭된 자극에 도 씨는 단 노부인 앞에서도 참을 수 없어, 살짝 웃으며 말했다.
“큰동생,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큰동생이 정미 때문에 골치가 아픈 걸 압니다만, 마음을 느긋하게 먹어요. 나도 노부인께서도 정미를 아끼는데, 어찌 그 말을 듣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정미도 사실 좋은 아가씨입니다. 앞으로 복이 찾아올 거예요.”
이 말을 들은 용흔은 기분이 언짢아졌다.
‘정미에겐 부모가 있는데, 그 아이의 혼사를 뭐하러 신경 쓰는 건지. 흥, 누가 장가들고 싶어 한다고 해도, 자기한테 와서 부탁하는 것도 아닐 텐데. 아, 딸이 없어서 평생 사위를 맞이하는 기분을 모르겠구나. 그래서 정미를 신경 쓰나 보지? 하지만, 그러면 나중에 많이 귀찮아지지 않을까?’
용흔은 이런 생각을 하다가, 어쩌다 이런 이상한 생각이 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용남은 그런 오라버니를 훑어보며 생각했다.
‘오라버니는 가만히 있다가 왜 얼굴이 붉어지는 거람. 겨우 한 해 지났다고, 내가 아는 사람들 하나하나가 다 이상해진 건가? 설마 이것이 성장에 대한 대가인가?’
소녀는 뺨에 난 여드름을 어루만지며 갑자기 우울을 느꼈다.
한 씨는 어린아이들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저 도 씨의 말이 자신이 바라던 바에 딱 들어맞자, 미소를 머금고는 조금 으스대며 말했다.
“어머니, 올케언니,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정미가 근래 살이 빠지고 피부가 하얘져 많이 예뻐졌답니다. 제가 골치 아픈 건 사실이에요. 그 아이의 외모에, 제가 성가셔지지 않아야 할 텐데요.”
그녀는 말하면서 한지를 힐끗 쳐다보기도 했다.
도 씨는 화가 나 피를 토할 뻔했다.
‘시누이의 이 말은 무슨 의미인가, 설마 자기 딸이 예뻐졌다고 내 아들이 좋아할 것 같단 거야? 참으로 웃긴 소리구나. 내 아들이 한 번 헌신짝처럼 버린 사람을 다시 좋아하게 된다면, 내 성씨를 갈지!’
“정미가 정말로 예뻐졌답니까? 다음에 오실 때 잊지 말고 정미를 꼭 데리고 오세요. 노부인께서 보시면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도 씨가 미적지근하게 말하며 생각했다.
‘그 까맣고 뚱뚱한 계집이 날씬해졌다고 얼마나 예뻐졌겠어, 정말 한 번 보고 싶구나.’
그러자 한 씨가 흔쾌히 응했다.
“어머니, 그럼 정미가 다 나으면 데리고 오겠습니다.”
이를 바라던 단 노부인은 연신 기뻐했다.
오직 용흔만이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못난 계집의 얼굴이 좀 변했다고 성가셔질 수 있나? 흥, 어떤 눈이 이상한 놈이 그 못난 계집을 쳐다보겠어. 저번에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이전과 크게 다름없었는데? 그저 조금 살이 빠지고, 조금 하얘지고, 피부가 조금 좋아졌을 뿐. 눈썹과 눈은 여전히 못난 계집인데. 안 되겠다, 기회를 봐서 보러 가야겠어.’
용흔은 코가 시퍼렇고 눈이 부어오른 정희를 흘끗 보고는 기뻐했다.
‘딱 좋은 핑곗거리가 있네. 내가 사람을 이렇게 때렸으니, 가서 사과를 해야겠지.’
한편 용흔의 눈빛에 정희의 몸은 뻣뻣해졌다.
‘이 작은 패왕이 뭘 하려고 하는 거지? 앞으로, 앞으로 다신 국공부에 오지 않을 테다. 집에 남아 공부만 할 거야!’
* * *
이 혼란스러운 새해도 어쨌든 일단락되는 듯했고, 정철은 앞마당에서 어른들과 술을 마시고 살짝 취한 얼굴로 입구 앞에 세워진 마차로 달려왔다. 그는 표정이 각기 다른 동생들을 보고는, 아무 말도 묻지 않고 한 씨에게 인사했다.
“어머니, 저는 아직 할 일이 남아있어서, 조금 이따 돌아가겠습니다.”
한 씨는 아들의 얼굴이 조금 빨간 것을 보고 걱정이 되는 듯 물었다.
“철아, 술을 마셨는데 말을 탈 수 있겠니? 내일 해선 안 되는 일이야?”
정철이 웃었다.
“꼭 오늘 해야 하는 일입니다. 걱정 마세요. 많이 마시지 않았어요. 방이 더워서 얼굴이 붉어진 것입니다. 일만 마치면 바로 돌아갈 거예요.”
한 씨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당부했다.
“그럼 가보거라. 조심하고.”
정철도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 말에 올라탔다.
말발굽이 청석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회인백부를 향하는 마차도 이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