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일을 망치다
늘 부드럽고 단정하던 소녀가 수줍어하는 모습만 보이자, 소년의 가슴은 뜨거워져 그녀를 품에 안았고, 턱을 그녀의 머리 위에 걸쳤다. 정요의 머리에서 말리꽃(*재스민)향이 나 코끝에 맴돌았다. 소년은 마음이 들떠 낮은 목소리로 시를 읊었다.
“빙설림중저차신(*氷雪林中著此身: 눈 덮인 숲속에 이 몸을 피우니), 불동도리혼방진(*不同桃李混芳塵: 먼지 낀 복사꽃 오얏꽃과 섞이지 않고 속세에 떠도는구나), 홀연일야청향발(*忽然一夜淸香發: 그러다 한밤중에 청신한 향이 피어나면), 산작건곤만리춘(*散作乾坤萬里春: 천지에 흩날려 만 리가 봄이로다).”
그는 품 안의 소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고, 더욱 따뜻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참으로 와닿지. 매화, 눈도 너를 말하는 것이고…….”
그때, 소녀의 몸이 굳는 것을 느낀 한지가 놀라 물었다.
“왜 그러니?”
한지가 고개를 숙였을 때, 창백한 얼굴로 어딘가를 보고 있는 정요가 보였고, 한지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그곳엔 어머니 도 씨와 고모 한 씨가 멀지 않은 곳에 서서 차갑게 웃으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어머니, 고모님…….”
한지는 순간 멍해져서 손을 풀었다.
정요는 당황하며, 백지장 같은 얼굴로 그를 밀어냈다.
도 씨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넋을 잃은 정요를 지나치며 경시하는 듯한 콧방귀를 뀌었고, 한지 앞으로 와 손을 들어 따귀를 내려쳤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아들의 표정을 보며 도 씨는 화가 나 몸이 떨려왔다.
아들이 이 정도로 클 때까지도, 도 씨는 그를 때린 적 한 번도 없었다. 막상 이렇게 따귀를 내리쳐보니, 마음이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다. 그저 그 따귀는 도 씨가 아들에게 내리친 게 아닌, 시누이인 한 씨가 도 씨에게 내려친 것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내가 누굴 좋아한다고? 지야, 참으로 대단히 좋은 아들이로구나. 어미가 네게 말해주지도 않았는데, 내가 누굴 좋아하는지 알았다고?”
도 씨는 한지를 꾸짖으며 사나운 눈빛으로 정요를 흘겨봤고, 멀리 서 있는 시종을 가리켰다.
“청아(靑娥), 소여(素女), 모두 내가 좋아하는 아이들이다. 하지만 내가 좋아한다고, 네게 정실로 보낼 수는 없는 모양이로구나. 어찌 너는 자랄수록 어리석어지는 듯한 것이냐!”
한지는 도 씨의 꾸짖음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무의식적으로 정요를 바라봤다.
도 씨가 정요를 시종들과 비교하자, 정요의 얼굴이 점점 더 창백해져 마치 겨울날 시들어버린 백련처럼 조금의 생기조차 없었다.
정요는 도 씨를 보다가, 또 한 씨를 보았고, 결국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치마를 들고 천천히 앞으로 가 도 씨 앞에서 멈춰섰다. 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국공부인, 저 정요는 신분이 낮은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기에, 품지 않아야 할 기대를 한 적 없습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정요는 말을 마치고 사뿐히 인사를 한 뒤 천천히 한 씨의 앞으로 걸어갔다.
한 씨는 정요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자 뜻밖에도, 정요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어머니, 제가 창피를 당하게 했습니다. 돌아가면 저를 벌해 주십시오!”
그러고는 일어나서 한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얼굴을 가리고 달아났다.
갑자기 몸을 돌린 탓에 눈가에서 흐른 그녀의 눈물이, 바람을 타고 한지의 목덜미에 떨어졌다.
사랑하는 여인의 차가운 눈물과 그 깊은 눈빛에, 한지는 어머니에게 들켰다는 사실마저 잊었고, 주저 없이 정요를 쫓아갔다.
“이 못된 놈아, 거기 서지 못해!”
도 씨는 그 말을 마치기도 전에 분노가 치밀어 제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올케언니!”
한 씨가 비명을 질렀다.
“지야, 어서 돌아오거라! 네 어머니가 기절하셨다!”
한 씨의 외침을 들은 한지가 멈칫하더니, 몸을 돌려 도 씨에게로 달려와 그녀를 안았다.
“어머니, 일어나세요!”
한 씨와 아들의 부름에 도 씨의 의식은 희미하게 돌아왔고, 한지를 흘끗 보고 눈길을 거두었다.
“못된 녀석, 뭐 하러 돌아왔느냐? 마저 쫓아가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은 상처를 받고 떠났고, 어머니는 화가 나 쓰러지시니,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자 소년은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그는 그저 부끄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니, 이 아들이 불효자입니다. 화가 나시면 이 아들을 때리시면 됩니다. 어머니 자신의 몸을 망가뜨리지 마세요. 이 아들의 죄가 더 무거워집니다!”
아들의 말에 도 씨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됐다, 아들이 자신의 잘못을 알면 된 거야. 만나본 아가씨가 적어 잠시 마음이 갔을 테지. 하지만 앞으로 정씨 집안의 둘째 아가씨는, 어쩔 수 없이 멀리해야겠구나.’
도 씨는 한 씨에게 앞으로는 정요를 데리고 오지 말라고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시간이 지나도 아들이 포기하지 못할까 두려웠다.
사실 용모로 말하자면 정요도 나쁘지 않지만, 최고는 아니었다.
‘재주로 말하자면, 물론 내가 재주가 출중한 아가씨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건 다른 방면에서도 큰 차이가 없는 경우에나 말하는 거지. 출신과 성품에 비교하면 재주는 그저 금상첨화 정도일 뿐!’
도 씨는 문득 한지의 얼굴이 창백해진 채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아들의 몸이 상했을까 걱정이 됐고,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숨을 헐떡였다.
“됐다, 네 잘못을 알았으니 이번 일은 없던 일로 여기마. 앞으로 너는 다신 정요와 단둘이 만나지 말거라.”
아들은 이미 소성년식을 치룬 상태였고, 올해가 지나면 한 살 더 먹어 열일곱 살이 되니, 혼사를 정할 때였다.
“어머니, 저는…….”
한지는 도 씨를 자극할까 봐 두려웠지만, 절대 정요를 포기할 순 없었기에 말을 하려다 멈췄고, 식은땀으로 등이 흠뻑 젖어갔다.
이때, 단 노부인의 성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또 무슨 일이냐!”
한지와 사람들이 쳐다보자, 단 노부인이 물에 잠긴 듯 어두운 표정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단 노부인 옆에는 경왕세자비 증 씨가 있었는데, 한 손으로는 단 노부인을 부축하며 다른 한 손으론 작은 패왕인 용흔의 귀를 잡고 있었다.
용흔과 멀지 않은 곳에는 얻어맞은 듯한 정씨 집안의 셋째 공자 정희와, 울어서 목이 다 쉬고 눈이 복숭아처럼 부어오른 정동이 있었다.
“노, 노부인께서 어찌 여기 계십니까?”
도 씨는 단 노부인이 어디까지 봤는지 알지 못해 마음이 급해져 한 씨를 힐끗 쳐다봤다.
한 씨도 놀란 표정이었다.
단 노부인은 더욱 화가나 고함쳤다.
“내가 어찌 여기 있냐고? 서로 치고받고 싸운 녀석들을 방금 막 떼어놓았는데, 여기 또 울고불고 하는 소리가 들리더구나. 도대체 조용히 지나갈 날은 이 집안에 없는 게냐?”
단 노부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용흔은 슬퍼하는 한지를 향해 혀를 내둘렀다.
‘내가 정씨 집안네 놈들을 괴롭히는 걸 노부인과 어머니께 들킨 것만으로도 이미 재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더 재수 없는 놈이 있었구나. 좋아하는 사람과 밀회하다가, 어머니와 이모님에게 걸린 것도 모자라 이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들키다니. 운도 없지, 쯧쯧. 내일부터 수도에 무슨 소문이 돌지 상상이 되는군. 뭐 내가 이 모습을 봤으니, 소문이 퍼지지 않을 리는 없을 테고.’
어렸을 때부터 용흔과 함께 놀곤 했던 한지는 용흔의 표정만 봐도 무슨 속셈인지 알 수 있었기에, 곧바로 얼굴이 창백해져 경고하는 눈빛으로 노려봤다.
그러나 용흔은 고개를 휙 돌리고, 득의만만한 얼굴로 자신의 성과를 바라보았다.
용흔의 ‘성과’란, 당연히 자신에게 시퍼렇게 얻어맞은 정희와 정동이었다.
정희는 조용하고 고집스러운 성정으로, 단 노부인이 ‘치고박고 싸운 녀석들을 떼어놓았다’라고 한 말에 속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언제 싸웠단 말이야, 너무 억울하다. 나는 계속 맞고만 있었단 말이다!’
용흔은 정희의 화가 난 표정을 보자 심드렁해졌다.
‘나 작은 패왕이 사람을 때렸다는 것은, 어쨌든 그 사람을 거들떠 봐준다는 건데, 기분 나쁠 게 뭐가 있어? 보아하니 아직 덜 맞은 게로구나! 역시, 반쯤 때렸을 때 저지 당했으니 효과가 있을 리가!’
작은 패왕은 흉악한 표정으로 정희를 흘끗 노려봤고, 정희가 놀라 떨자 또 흥미가 없어져 정동을 흘끗 쳐다봤다.
정동은 그의 눈빛에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기에, 무의식적으로 옷자락을 꽉 잡고 뒤로 물러섰다.
작은 패왕은 재차 기분이 나빠져 불쾌한 눈빛으로 정동의 손을 노려봤다.
‘이 녀석이 뭐 하는 거지? 그저 흘끗 봤을 뿐인데, 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가슴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나는 거야?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가 저 녀석을 어떻게 한 줄 알겠네. 대추씨보다 쪼그만 걸 내가 쓸데없이 왜 건들겠어?’
용흔은 경멸하듯 정동을 주시하며 그녀에게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저 얼음막대처럼 얼어버린 뱀을 정동의 품으로 던졌을 뿐인데, 이렇게 놀랄 필요 있단 말인가?
‘정미는 일곱 살 때 당했는데도 놀라지 않았지.’
한편 정동은 지금 작은 패왕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정미와 종종 말다툼을 하는 걸 제외하고는, 부모님은 그녀를 꾸짖은 적조차 없었다. 하지만 전에 아버지가 정미의 편을 들었을 때 그녀의 마음은 산산조각 나는 듯했고, 그보다 더 힘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동은 그 얼음처럼 차가운 뱀이 자신의 품으로 떨어졌던 순간,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슴의 온기에 뱀이 살짝 꿈틀한 것 같다고 느꼈기에, 이를 떠올릴 때마다 죽고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 작은 패왕이 갑자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니, 귀신을 본 듯 비명을 참을 수 없었고, 가슴을 움켜쥐고 토를 해대기 시작했다.
단 노부인은 한지를 심문하려다가, 정동이 토를 하기 시작하자 당황했다.
한 씨는 멍하니 있다가, 순식간에 정동에게로 달려들며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정동, 너, 너 왜 이러는 게냐! 왜 구역질을 하는 게야!”
정동은 토를 멈추고 숨을 고르다가, 한 씨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비록 예법의 제한이 있다곤 하지만, 시골 사람들에겐 남녀 구분이 없었고, 농번기가 되면 아가씨든 젊은 부인이든 모두 열심히 밭에 나가야 했다.
정동이 일곱 살 때, 그녀는 옥수수밭에서 마을의 젊은 오라버니가 아가씨와 입 맞추는 것을 몰래 본 적 있었고, 촌부들이 시끄럽게 거친 말을 하는 것도 들은 적 있었다. 정동은 정미보다 조금 어렸지만, 이런 방면에선 백지인 정미와 비교할 수도 없었다.
‘세상에, 적모, 적모님이 내가 회임했다고 오해하다니, 이, 이건 너무 모욕적이야!’
정동은 억울한 표정으로 한 씨를 쳐다보다가 입을 막고 울기 시작했다. 반쯤 울었을 때, 갑자기 방금 토를 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이렇게 입을 막으면……! 우욱…….’
부끄럽고, 역겹고, 그리고 작은 패왕에게 놀란 공포까지 합세한 사방의 공격에 정동은 눈이 돌아가더니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정말!”
한 씨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단 노부인을 바라봤다.
단 노부인은 이마를 짚고 화가 나서 크게 외쳤다.
“여봐라, 어서 이 아이를 방으로 데려가거라, 너희는 나를 따라 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