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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55화 (55/375)

55화. 잔재주를 피우다

한 씨는 자신이 이렇게 냉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마치 또 다른 자신이 밖으로 드러나 차가운 눈으로 이 모든 것을 바라보는 듯했다.

“지야, 이 일은 고모가 도와줄 수 없을 것 같구나. 정요는 서녀인데, 어찌 국공 세자의 정실이 될 수 있겠니? 만약 첩으로 삼는 거라면……, 하하, 고모의 서녀를 본가의 조카에게 첩으로 보내면, 고모의 체면이 상하지 않겠니.”

“고모님…….”

한지가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두 걸음 움직여 한 씨의 앞으로 다가갔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한 씨의 무릎을 껴안고, 새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제가 감히 뻔뻔하게도 정요를 이름에 올려달라 부탁드린 겁니다. 정요가 적녀가 되기만 하면, 제가 정요를 아내로 맞을 수 있도록 고모님께 허락을 받으러 가겠습니다.”

한 씨가 침착하게 웃었다.

“바보 같은 아이야, 네 어머니가 그걸 허락하겠니? 정요를 적녀로 올린다고 진정한 적녀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족보상에서만 좋게 보일 뿐이지.”

한 씨의 차분함과 온화함에, 한지는 마음이 편해져 확고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고모님, 우리 국공부가 그동안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던 것은, 조부님과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어른들께선 제가 굳이 귀한 가문의 아가씨와 혼인하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정요가 서출이긴 하지만, 고모님께선 그 아이의 적모이시지요.

정요에게 적녀의 신분을 주시기만 하면 조부님과 아버지도 고모님의 체면을 봐서 절대 반대하지 않으실 겁니다. 어머니는 재주가 출중한 여인을 좋아하시고, 정요는 수도 제일의 재녀이며, 성정도 좋으니, 어머니의 마음에 들 것입니다. 정요의 출신이 조금 낮다고 생각한다 해도, 저는 정요의 인품과 재주를 믿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어머니도 분명 마음에 들어 하실 겁니다.”

‘인품과 재주? 성정이 좋아? 그럼 우리 정미는 뭐가 되는 거지?’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정미는 결국 한 씨의 뱃속에서 나온 아이였다.

‘작년에 딸이 고백했을 때는 그리 단호히 거절하더니, 지금 그 조카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서녀에게 푹 빠져서는, 서녀를 적녀로 올려 달라 하다니. 나 한명주의 딸이 이 정도로 형편없단 말인가? 무릎을 꿇고 서녀를 달라 할 만큼? 정미가 했던 말이 맞구나. 딸인 정미가 창피를 당하면 어미가 된 나에게 뭐가 좋겠어?’

한 씨는 심한 모욕감을 느꼈지만, 여전히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네 말은, 이미 생각을 다 해놓았다는 거니?”

한지가 쑥스러운 듯 웃었다.

“고모님, 저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정요를 연모한다고 해도 절대 첩으로 맞아 그 아이를 억울하게 할 리 없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정요에게도 미안하고, 고모님께도 죄송한 일이니까요!”

한 씨가 웃었다.

“네가 내게 죄송할 게 뭐 있니? 고모는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싶지 않구나.”

“고모님…….”

한지는 일이 반쯤 성사되었다고 생각해 더 밝게 웃었고, 한 씨의 앞에서 소년 같은 쾌활함이 드러났다.

“만약 제가 정말로 그렇게 한다면, 당연히 고모님께 죄송하겠지요. 고모님의 따님을 첩으로 삼다니, 다른 사람은 둘째치고 아버지께서 저를 때려죽이실 겁니다!”

한 씨가 마음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첩이 되는 게 어때서?’

한 씨는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슨 말을 들어도 트집을 잡곤 했고, 한지의 말들은 정요가 쌓아온 얌전하고 철든 서녀의 이미지를 부수어갔다. 한 씨는 정요를 자신의 테두리 밖으로 걷어찼다.

한 씨는 묵묵히 생각했다.

‘내가 낳은 딸과 아닌 딸, 이리도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을 왜 그동안 멍청하게 굴었을까? 내 딸은 아무나 밟는 잡초처럼 여기고, 기껏해야 은 열몇 냥짜리 통방(通房)이 낳은 딸이 남들이 꿈에 바라는 보배 같은 아이가 되게끔 했단 말인가?’

한 씨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한지는 마음이 급해져 한 씨를 잡아당기며 애원했다.

“고모님, 그냥 저를 도와주세요. 제가 생각해봤는데, 고모님께서 허락하시기만 하면 뒤에 일어날 일에 희망이 생깁니다. 저는 고모님께서 늘 저를 아껴주셨던 것을 압니다.”

“지야, 만약 네가 정요와 혼인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 거니?”

한지는 고모가 그를 시험한다는 것으로 알고, 급히 가슴을 치며 결심했다.

“고모님, 저는 정요가 아니면 혼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만약 그녀와 부부가 되지 못한다면, 차라리 평생 혼인하지 않겠습니다!”

“그 아이를 위해 그렇게까지 할 거라고?”

한 씨가 놀라 말했다.

한지가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네, 저는 예전부터 정요를 연모하고 있었고, 만약 정말 그녀와 부부가 될 수 없다면, 차라리 한평생 외롭게 살겠습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내 조카, 위국공부의 보물인 적장손, 미래의 위국공이, 정요가 아니면 혼인하지 않겠다고? 한지가 눈이 멀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정요가 눈을 멀게 한 것일까? 역시 통방의 딸이구나, 마가 낀 것이 분명해!’

“지야, 네 말은 옳지 않다. 넌 위국공 세자고, 나중에 네가 가문을 이어받아야 하는데, 네가 혼인을 하지 않으면 네 조부님과 어른들이 허락할 것 같니?”

한지도 자신이 말을 지나치게 한 것을 알고 있었다. 정말 정요와 혼인할 수 없다 해도 평생 혼자 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고모님께서 어찌 그의 결심을 알아주겠는가?

“고모님.”

한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저는 진심이에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어머니……, 어머니께서 제게 붙여준 통방을, 지……, 지금까지도 건들지 않았습니다……”

한 씨는 마지막 인내심마저 바닥나는 것을 느꼈고, 아끼던 조카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따귀를 한 대 내리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그 마음을 접어두었다.

‘내가 어찌 내 조카를 때릴 수 있겠는가. 따귀는 올케언니에게 내리쳐야 마땅하지. 내가 작년에 받은 그 창피를 돌려주고 말 테다!’

“지야, 네 뜻을 알았다. 일단 가보거라. 고모가 생각 좀 해볼 테니.”

“고모님…….”

한 씨가 웃었다.

“이렇게 큰일을 어찌 가볍게 정할 수 있겠니. 나는 네가 정요를 좋아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네 신분이 평이나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니, 정요를 아내로 맞고 싶다고 해도, 고모의 이름에 올리는 것 정도로 간단한 일이 아니다. 내게 생각할 시간을 주렴.”

한지는 기쁜 마음이 들었다.

‘고모님의 뜻은, 정요를 이름에 올리는 것뿐만 아니라 정요와 나를 도와주기까지 하시겠다는 건가? 나중에 정말로 고모님께서 나서주신다면, 나보다 훨씬 든든하겠지!’

“고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소년은 안심한 듯 웃음을 지어 보였고, 이 좋은 소식을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고모님, 그럼 휴식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이만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한 씨가 고개를 끄덕였고, 조카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급히 떠나는 모습을 보고는 표정을 굳혔다.

‘그 용흔마저도 나를 찾아와 정미가 어떤지 물어보는데, 한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미에 대한 것은 하나도 묻지 않았구나! 그렇게 정미를 보살피던 조카가 언제부터 이렇게 무관심해진 걸까? 정미가 틀린 말을 하지는 않았다. 정말로 한지와 정요는 일찍이 서로에게 마음이 생겼건만, 정요는 이런 상황을 정미에게 조금도 알려주지 않아 창피를 당하게 한 건가?’

한 씨는 옆의 탁자를 내리쳤다.

‘어찌 이럴 수가 있지? 정미에게 창피를 당하게 하면, 나도 창피를 당하는 게 아니던가? 그 배은망덕한 것!’

한 씨는 화가 치밀어올랐고, 한지가 멀리 떠난 후 벌떡 일어나서는, 살벌한 기세로 단 노부인에게로 향했다.

……한 씨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모퉁이에서 머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용흔이 식은땀을 닦으며 중얼댔다.

“깜짝이야, 한지를 피하다가 하마터면 큰이모님과 부딪힐 뻔했네!”

그는 담 밖의 매화나무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한지가 정요를 좋아했구나. 이렇게 꽁꽁 숨겨왔다니! 다행히 아까 한지가 조금 심상치 않다고 느껴 몰래 엿들을 수 있었군!”

자색 옷을 입은 소년이 고개를 저었다.

“한지는 정요를 좋아하고, 정 씨네 둘째 나리께선 소첩의 아이들만 좋아하시니, 어쨌든 그 못난 계집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것이군. 쯧쯧, 정말 불쌍하구나. 그럼 나라도 어쩔 수 없이 그 아이에게 조금 잘해주어야겠어.”

소년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입을 막았다. 무슨 창피한 말이라도 한 듯 벽을 걷어차다가 부글부글하며 생각했다.

‘나는 그저 그 아이를 불쌍히 여겼을 뿐인데, 그리 성질을 부리다니. 앞으론 똑같이 욕을 할 테다! ……됐다, 나중에 모두가 모이면 일단 정희와 정동을 혼내주면 되지. 겸사겸사 다음에 못난 계집을 만났을 때 나눌 이야깃거리도 생기니까.’

* * *

“이건 또 무슨 일이냐?”

단 노부인은 몹시 화를 내며 들이닥친 한 씨를 보고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새해부터 딸과 또 싸울 순 없었다.

‘딸의 이 급한 성정은 누굴 닮은 걸까!’

“어머니, 큰올케언니는요?”

한 씨는 주위를 훑어보더니, 위국공 부인 도 씨가 보이지 않음에 마음속으로 조금 실망했다.

“네 올케언니는 방금 머리가 조금 어지럽다고 하여, 칸막이방에서 쉬라 했다.”

한 씨는 입을 삐죽거렸다. 도 씨는 일 년 내내 머리가 어지럽거나 아니면 심장이 아프거나 했다.

‘어머니는 이 병약한 체질의 며느리도 마다하지 않으시니, 이리 보면 그 건강한 서녀는 꽤 예쁨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럼 큰올케언니를 뵈러 가겠습니다. 마침 올케언니께 할 말이 있어서요.”

한 씨는 당장 도 씨에게 창피를 주고 싶었지만, 단 노부인의 심정을 생각해 그녀에게 별말을 하지 않았다.

한 씨가 떠나고, 단 노부인은 어이없다는 듯 증 씨에게 말했다.

“보거라,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성질이 급하구나.”

증 씨가 따뜻하게 웃었다.

“큰언니의 이런 모습도 좋습니다. 마음에 담아두시지 않으니까요.”

증 씨는 자신의 말에 조금 씁쓸해져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모님, 저는 흔이와 함께 우선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러자 단 노부인이 만류했다.

“뭐가 그리 급하단 말이냐? 아직 식사도 하지 않았는데.”

증 씨가 고개를 저었다.

“아시잖습니까. 저는 아이들과 함께 증씨 집안에도 가야 하는 걸요. 너무 늦게 가면 좋지 않습니다.”

단 노부인은 더 이상 그녀를 붙잡지 않고 탄식했다.

“네 말도 맞다. 그럼 더 붙잡지 않으마.”

증 씨는 국자감(國子監) 학장의 딸로, 어릴 적 어머니를 잃었지만, 계모는 그녀를 제 자식처럼 여겨 아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간에 증 씨는 매년 아이들과 함께 국공부에 먼저 새해 인사를 올리고 난 뒤 다시 증씨 집안으로 갔고, 단 노부인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완아, 어쨌든 그리 급할 필요 없다. 사람이 흔이와 남이를 데려와야 하지 않겠느냐.”

증 씨가 웃었다.

“그 둘은 제가 가야 한다 하면 분명 저와 싸우려 할 거예요.”

단 노부인도 이 말을 듣고 기쁜 마음에 덩달아 웃었다. 그러고는 또 마음이 불편해졌다.

‘만약 옥주가 아직 살아있었다면, 매년 이맘때쯤 옥주와 아이들도 떠나기 아쉬워했을까?’

증 씨는 단 노부인의 안색이 변한 것을 보고는 따뜻하게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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