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부탁하다
한 씨와 사람들이 위국공부에 도착했을 때, 사내들은 바깥 대청으로 가 술을 마셨으며, 여인들은 화원의 응접실에 모여 담소를 나누었다.
넷째 부인 조 씨는 시댁이 수도에 있어, 아침 일찍 넷째 외숙부와 함께 많은 자녀들을 데리고 시댁에 새해 인사를 올리러 갔고, 국공부의 손자들이 갑자기 줄어들어, 한지와 한추화, 그리고 초대한 친척 형제자매들만이 남았다.
작은 패왕은 정미가 오지 않은 것을 보고는 갑자기 앉아있을 기분이 나지 않아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가서 큰이모님께 못난 계집이 도대체 어떻게 되었는지, 그렇게 심각한 건지 물어볼게.”
한지는 그 모습을 보고, 몸을 일으켜 뒤따라갔다.
한 씨는 위국공 노부인인 단 노부인에게 이끌려 사람 없는 난각으로 들어갔고, 폭풍 같은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정미가 또 다치다니, 너는 어미가 되어서 딸을 어찌 돌보는 것이냐!”
한 씨는 무척 억울했다.
“어머니, 정미의 상처는 실수로 접시 조각을 밟아서…….”
단 노부인이 말을 끊었다.
“멀쩡한 아가씨가 가만히 있다가 접시 조각을 밟았겠느냐? 내가 모른다고 생각 마라. 철이에게 물었다. 네 남편이 첩과 서자들을 데리고 가 정미를 괴롭혀서 그리된 것 아니냐!”
단 노부인은 손을 뻗어 한 씨의 이마를 누르며 꾸짖었다.
“내가 어쩌다 너처럼 집에서만 제멋대로인 아이를 낳았을꼬? 나와 네 딸에게는 그리 성질을 부리면서, 왜 그 쥐새끼들은 두려워하는 게야?”
한 씨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머니, 말이 너무 심하십니다…….”
“내 말이 틀렸단 말이냐?”
단 노부인이 성을 내며, 차를 한 모금 넘겼다.
“뭐가 그리 두려우냐? 그 첩이 정씨 가문의 둘째를 구한 게 뭐 어때서? 그럼 그 첩이 낳은 새끼가 네 머리 위까지 올라가 변을 봐도 괜찮단 말이냐? 못난 네 스스로 때문에 우리 가련한 정미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다니!”
단 노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내가 회인백부에 사람을 보내 정미를 데려오겠다. 앞으로 시집갈 때까지 위국공부에서 지내도록 하거라.”
한 씨가 벌떡 일어섰다.
“어머니,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왜 안 되느냐? 이렇게 큰 국공부인데, 우리 정미 하나 감당하지 못할 것 같으냐? 어린 아가씨가 외가에서 지낸다고 누가 뭐라 하겠느냐?”
“어머니, 백부와 국공부는 그리 거리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정미가 여기서 지내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 말하겠습니까……?”
단 노부인이 한 씨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탄식했다.
“이제 알겠구나. 남들이 백부에 대해 험담을 할까 두려운 것이야. 결국, 정씨 가문의 둘째 험담을 할까 봐, 또 그가 네게 화를 낼까 그러는 것이지?”
“어머니, 아닙니다!”
한 씨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단 노부인은 입구로 걸어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명주야, 근 몇 년 동안 네가 깨달은 줄 알았건만. 그 사내가 네가 이렇게 할 정도로 가치 있는 사람이더냐? 그를 위해 네가 위국공부 적장녀의 긍지를 버린 것은 나의 실패다. 하지만 그를 위해 네 혈육까지 말려들게 한 것은 너의 실패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네 스스로 잘 생각해 보거라.”
단 노부인이 옷소매를 뿌리치며 떠났고, 한 씨는 바람 빠진 공처럼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여전히 통통한 얼굴을 어루만지며 중얼댔다.
“……이것이 저의 실패란 말입니까?”
* * *
용흔이 다가와 빙긋 웃으며 단 노부인과 다른 사람들에게 안부를 물었고, 단 노부인은 나란히 서 있는 두 소년을 보았다. 하나는 밝은 구슬 같았고, 하나는 뙤약볕 같아 눈과 마음을 즐겁게 했다.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 단 노부인은 시녀에게 따뜻한 차를 내오라 하여 마시게 했다.
“어찌 달려왔느냐?”
용흔은 단 노부인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어머니 증 씨는 두려워했기에, 단 노부인의 질문에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웃으며 말했다.
“외조모님, 방금 새해 인사를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외조모님께 절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려고 왔지요!”
단 노부인이 웃으며 그의 머리를 토닥였다.
“이 녀석, 사실 외조모가 네게 준 세뱃돈이 너무 적어 다시 받으러 온 것이지?”
용흔은 재빨리 증 씨를 흘끗 흘겨봤고, 웃으며 머리를 만졌다.
“외조모님께 들키고 말았네요. 정말 예지로우십니다. 그럼 주실 텐가요?”
“주지, 어찌 안 주겠느냐.”
단 노부인이 웃으며 금으로 만들어진 금붕어 장식품 한 꿰미를 꺼내 용흔에게 건넸다.
“의모님, 그 아이에게 너무 오냐오냐 하지 마세요.”
증 씨가 경고하는 눈빛으로 용흔을 노려보았다.
용흔은 헤헤거리며 계속 웃었다.
방 안의 사람들은 이를 듣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 작은 패왕은 일찍이 하늘까지 기어올랐는데, 어찌 더 나빠질 수 있겠냐고 생각한 것이다.
증 씨도 아들의 덕성을 알고 있었기에, 한마디만 하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용흔이 사방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외조모님, 큰이모님은 어디 계십니까?”
노부인의 얼굴에 웃음기가 옅어졌다.
“아, 네 큰이모는 피곤해서 난각에서 쉬고 있단다.”
용흔이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큰이모님께 무슨 일이 생기신 겁니까? 제가 가보겠습니다!”
그는 바람처럼 사라졌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단 노부인은 한 씨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피곤하다고 말했을 뿐인데, 저 아이가 잘못 들은 건가?’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용흔과 함께 왔던 한지를 쳐다봤다.
한지는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조금 긴장한 듯했다.
“그, 그럼 저도 가보겠습니다!”
눈 깜짝할 새 방금 들어왔던 두 소년이 사라졌고, 방 안에는 침묵만이 남았다.
한참 후, 단 노부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증 씨에게 물었다.
“방금, 내가 뭐라고 했었지?”
증 씨도 머뭇거리며 말했다.
“아마 큰언니가 별로 편치 않다고 하셨겠지요…….”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내가 잘못 들은 것이었구나’라고 생각했다.
* * *
용흔은 난각 입구에 다다랐고, 한지가 따라오는 것을 보더니 잠시 멈춰서 손을 뻗어 그의 어깨 위에 올렸다.
“한지, 우리 한 사람씩 들어가자. 같이 들어가서 큰이모님 앞에서 시끄럽게 굴면 좋지 않으니까.”
용흔은 이 이유가 우습다는 걸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한지에게 말하는 것이었기에 기꺼이 생각해낸 것이었다.
‘이미 네 체면을 꽤 세워주었으니, 내가 억지를 부리는 것을 감당해라!’
“좋아, 너 먼저 들어가.”
한지가 주저하지 않고 대답하자, 용흔은 오히려 멍해졌다.
‘너무 쉽게 대답하는 것 아닌가?’
용흔은 의심스러운 듯 한지를 훑어봤다. 한지의 표정은 차분했지만, 손은 주먹을 쥐고 있었다.
이는 한지가 긴장했을 때의 습관이었기에, 어려서부터 벗으로 지내온 용흔에겐 매우 익숙했다.
‘한지가 큰이모를 찾는 건 분명 무슨 문제가 있어서일 거야!’
용흔은 마음속으로 꾀가 생긴 듯 한지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 그럼 나 먼저 들어가도록 하지.”
* * *
한 씨는 아직도 의자에 앉아 넋이 나가 있었고, 용흔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흔아, 왜 여기 왔니?”
용흔이 두세 걸음 다가가 한 씨 곁에 앉았다.
“방금 방에 안 계신 것을 보고 뵈러 왔지요.”
한 씨가 웃었다.
“이 녀석, 많이 컸구나.”
용흔이 한 씨를 살피며 슬쩍 떠보았다.
“큰이모님, 우셨나요?”
“그럴 리가!”
한 씨는 어린아이에게 우스워 보일까 급히 부정했다.
용흔은 뭔가 깨달은 듯했다.
“알 것 같습니다. 정미를 걱정하시는 거지요?”
한 씨는 둘러댈 거리를 잡아 기꺼이 답했다.
“조금 걱정이 되는구나. 원래 오늘 그 아이도 같이 오려고 했는데, 발의 상처가 벌어져 집에서 쉬게 했다.”
“어쩐지 오늘 왜 정미가 안 보이나 했습니다. 발의 상처가 많이 심각한가요? 잘 낫지 않으면 걷는 데에 지장이 생길까요?”
용흔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큰이모님, 평왕을 아시지요? 다친 발이 제대로 낫지 않아 절름발이가 된 것 아닙니까.”
용흔이 말하는 평왕은 창경제의 장자였다. 황후에게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 귀비가 낳은 태자와 치열하게 경쟁할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어릴 적 절름발이가 되어 일찍이 평왕에 봉해져 부(府)에 살았다.
한 씨가 깜짝 놀라서 말했다.
“그럴 리가, 정미는 그저 발바닥이 접시 조각에 베였을 뿐이다.”
“정미가 어쩌다 접시 조각에 베인 겁니까?”
한 씨는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용흔은 눈꺼풀을 늘어트린 채, 독기를 숨기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럼 큰이모님은 푹 쉬세요. 이모님께 아무 일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 안심입니다.”
용흔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고, 한 씨는 속으로 이상하게 여겼다.
‘이 작은 패왕이 한 살 더 먹어서인지, 어쩐지 조금 철이 든 것 같군.’
재차 문소리가 울리자 한 씨는 고개를 들었고,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이 되고 말았다.
“지야, 너는 또 왜 왔니?”
한 씨는 말을 마치고, 뭔가 떠오른 듯 안색이 어두워졌다.
한편 한지는 늘 아름다운 옥처럼 귀하게 여겼던 사촌 여동생이, 무자비하게 구덩이를 파놓고 그가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한 씨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는, 그저 작은 패왕이 또 허튼소리를 해서 고모님 기분을 상하게 했을 것이라고만 여겼고, 안으로 걸어 들어가 웃으며 말했다.
“고모님, 용흔과 함께 온 겁니다.”
“아, 이 고모에게 볼 일이 있니?”
한 씨가 침착한 표정으로 물었다.
한 씨는 시원시원한 성정으로, 가까운 이들에게 잡생각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래서 방금 용흔과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정미가 언급했던 이야기는 그녀의 한계점이었기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고, 특히 한지가 정말 그녀를 찾아오니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많지 않음과, 고모님은 늘 자신에게 잘 대해주셨음을 떠올린 한지는 더는 주저하지 않고 갑자기 피풍을 젖히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고모님, 사실 제가 고모님께 드릴 부탁이 있습니다.”
한참의 침묵 뒤, 한 씨의 목소리가 한지의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우리 조카가 고모에게 무슨 부탁을 하려고 하는 걸까?”
솔직한 성정의 한 씨는 평소 말을 직설적이며 시원하게 했고, 목소리에는 쾌청함이 묻어나왔다. 하지만 지금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느리고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한지는 낯가죽이 얇은 사람이었기에, 평소에 규율을 잘 지키는 편이었다. 때문에 지금 부모님 몰래 고모에게 이런 일을 부탁하는 것이, 긴장되지 않는다면 거짓일 것이다. 심장이 빠르게 뛰며 손에는 땀이 날 지경인데, 한 씨의 말투에 묻어나온 이상함을 눈치챌 겨를이 없음은 당연했고, 오히려 고모의 차분하고 따뜻한 목소리에 용기를 얻어, 그는 독한 마음을 먹고 눈을 꾹 감으며 말했다.
“고모님,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정요를 이름에 올려주셨으면 한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듣자 한 씨의 손이 떨려왔고,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러나 한지는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해 한 씨를 보지 못했다.
한 씨는 정미가 했던 말이 비웃음처럼 귀에 맴도는 것을 느꼈고, 몹시 화가 나기 시작했다.
다행인 것은, 한 씨는 그 말을 마음속으로 계속 되뇌었기에 눈 앞에 펼쳐진 상황에 조금이라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단 점이었다. 처음의 분노와 놀라움이 지나간 후, 한 씨는 다시 차분해졌다.
“지야, 고모는 네 뜻을 모르겠구나. 정요를 이름에 올려달란 말은 어찌 되었든 고모에게 할 말은 아니지 않니?”
한지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아름다운 얼굴이 붉어지고, 맑은 눈빛을 한 채 내뱉는 진지한 말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걸 바친 진심이 보였다.
“고모님, 저는……, 저는 정요를 연모합니다. 고모님이 도와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