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뛰어오르길 기다리다
“큼, 큼큼…….”
태자가 입가에 손을 받치고 헛기침했다.
“용흔, 셋째 소저는 이미 갔단다.”
용흔은 벌떡 일어나, 정미가 이미 꽤 걸어간 것을 보고 급히 쫓아갔다.
태자가 그 모습을 보고 크게 웃었다.
정미의 뒤를 쫓던 용흔은 난처해하며 목소리를 낮추고 경고했다.
“못난 계집아, 고집부릴 게 뭐 있냐? 어서 내게 업혀. 아니면, 그냥 손댈 거야!”
정미의 발걸음이 멈췄다.
‘지금 내가 협박당하고 있는 건가?’
“네가 강도냐? 네 말을 듣지 않으면, 그냥 손을 댈 거라고?”
정미도 목소리를 낮춰 용흔을 흉내내며 비웃었다.
‘이 녀석은 도대체 왜 이렇게 제멋대로지? 여기는 황궁의 내원인데, 나를 업고 가려 하다니, 내가 몸을 허락하길 바라는 건가? 꿈 깨라,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
용흔은 그런 비웃음을 견딜 수 없었고, 안색이 새파래져서는 몸을 숙이고 손을 뻗어 정미를 들쳐메려고 했다.
정미는 이미 대비하고 있던 덕에, 발을 그의 무릎에 조준한 뒤 힘껏 걷어찼다. 작은 패왕은 곧바로 곤두박질쳤고, 정미는 고개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못난 계집, 거기 서!”
소녀에게 걷어차인 작은 패왕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허둥대며 일어났고, 쫓아가서 끝장을 보려 했지만, 옷의 무릎 쪽이 붉게 물드는 것을 보고 갑자기 멍해졌다. 그것은 자신의 피가 아니었다. 정미의 발에서 나온 피가 묻은 것이었다.
“발을 다쳤으면서도 이렇게 성질을 부리다니, 역시 예쁨받지 못하는 못난 계집이로구나!”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어느새 태자가 다가와 물었다.
용흔은 붉게 물든 무릎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맥이 풀려서는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맞다, 태자 전하, 태의를 불러 정미를 보게 하시지요. 아, 태의는 됐습니다. 나이를 저 정도 먹었으니, 그 못난 계집이 보여주려 하지 않을 겁니다. 그냥 의녀를 부르면 될 겁니다.”
“이미 사람을 보냈다.”
태자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용흔, 내가 보기에 넌 정씨 가문의 셋째 소저를 꽤나 특별히 여기는 것 같은데.”
“그렇지요. 특별히 싫습니다. 그 아이처럼 못나고 못되고, 성질이 더러운 계집을 본 적이 없으니까요!”
용흔은 어두운 얼굴로 말했지만, 마음속으론 애가 타고 있었다.
‘못난 계집의 발에서 난 피가 내 옷까지 스며들었는데, 상처가 아주 심한 거 아냐?’
“……용흔?”
용흔이 정신을 차리곤 태자를 바라봤다.
“예?”
“같이 태후마마께 가자고 말했다.”
용흔이 조금 불편한 듯 물었다.
“태자 전하, 태자비마마께 가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된다면 용흔도 겸사겸사 못난 계집이 어떤지 볼 수 있을 터였다.
“막 거기서 나오는 참이었다. 가자.”
결국 용흔은 어두운 표정으로 태자를 따라 밖으로 나갔으나, 참을 수가 없어 계속 고개를 돌려봤다.
“용흔, 셋째 소저가 걱정된다면 가보는 게 어떠냐?”
“……누가 걱정된답니까. 그저 제가 손해를 본 것 같아 그렇습니다. 저도 걷어찼어야 했는데!”
용흔은 부정하면서도, 그 자리에서 발을 떼지 않았다.
“용흔?”
“갑니다!”
용흔이 이를 갈며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어차피 점심이 되면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위국공부에 갈 때 못난 계집도 함께 갈 텐데, 지금은 태자의 웃음거리가 되고 싶진 않아!’
* * *
정미는 태자비에게로 돌아가 신을 벗어 의녀에게 보였고, 태자비와 한 씨는 정미가 흘린 피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후 돌아가는 마차에 탈 때까지도, 한 씨는 정미에게 잔소리를 해댔다.
“발이 다 낫지도 않았으면서, 굳이 궁에 들어올 게 뭐가 있니?”
피가 흥건한 정미의 발을 떠올리자, 한 씨는 마음이 아파왔다. 그러나 이 딸에게 관심을 표하는 것은 익숙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리고도 아픈 줄 몰랐니? 네가 아픈 게 두렵지 않다고 해도, 네 큰언니까지 놀라게 해선 안 되지!”
정미가 차갑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앞으로 그러지 않을게요.”
한 씨는 입술을 꿈틀거리다 말했다.
“이따 너는 집에 남아 상처를 치료하거라. 나를 따라 외가에 가지는 말고.”
“네.”
따라가지 않아도 괜찮았다. 외조부님과 외조모님을 보고 싶긴 하지만, 지금 만나지 않는 것은 미래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오래도록 평안하게 지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니 괜찮았다.
한 씨는 정미의 생각을 몰랐기에, 그저 딸아이가 또 고집을 부리는 줄 알고 정미를 몇 번이고 살펴봤다.
그러자 정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어머니, 오늘 외가에 간다고 하시니, 제가 드릴 말씀이 있어요.”
한 씨는 무의식적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 딸이 이상한 게 아니었다 안심하며 미소를 지었다.
“말해보렴, 대신 세뱃돈을 받아오란 말이지?”
정미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정말 내 친어머니가 맞나? 내가 언제부터 그 시시한 세뱃돈을 신경 썼다고!’
“어머니.”
정미가 진지한 얼굴로 차분히 불렀다.
“이번에 가시면, 지 오라버니가 어머니께 부탁을 하나 할 거예요.”
“무슨 부탁?”
한 씨는 조금 놀랐다.
정미는 조롱하는 듯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천천히 말했다.
“어머니께, 둘째 언니를 어머니의 이름 아래 올려달라는 부탁이요.”
서자와 서녀를 이름에 올리다니, 이 말은 한 씨의 한계점을 건드렸고, 한 씨는 불쾌한 얼굴을 했다.
“허튼소리, 한지가 어찌 그런 황당한 부탁을 할 수 있겠니!”
정요가 어릴 적, 그녀의 생모가 둘째 나리와 함께 죽은 줄 알았을 때, 정요가 말을 잘 듣고 얌전한 것을 본 한 씨는 이 아이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계속 고분고분하다면 이름에 올려 시집갈 때 체면을 세워줄 생각을 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둘째 나리가 첩과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와 잘 지냈는지는 물어보지도 않더니, 바로 동 이낭의 아이들을 이름에 올리자고 했고, 한 씨는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정동은 적녀로 올리게 되었다.
이 일은 한 씨의 마음에 평생 지울 수 없는 큰 상처가 되었고, 누가 언급하기라도 하면 바로 원수가 될 만한 사건이었다.
정미는 어머니의 반응이 만족스러웠으나, 무표정으로 말했다.
“제게 그리 급하게 구실 필요가 있나요? 부탁하는 것도 아닌데요.”
한 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럼 왜 그런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새해부터 이 어미의 기분을 망칠 셈이야?”
정미가 입을 꾹 다물고 웃었다.
“어머니, 저는 그저 외가에 갔을 때 지 오라버니가 이런 부탁을 할지도 모른다고 말한 것뿐인데 이렇게 화를 참지 못하시다니요. 어머니의 말씀처럼 새해부터 외가에서 화를 내면 좋지 않으니, 혹시 모를 일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실 수 있게끔 말씀드린 거예요.”
“그만하거라, 듣고 싶지 않다!”
한 씨가 차가운 표정으로 소리치며 정미를 제지했다. 그러나 잠시 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미야, 왜 네 사촌 오라버니가 그런 부탁을 할 거라 생각했니?”
정미는 알고 있었다. 그날 한 씨에게 솔직하게 말한 이후, 재차 그녀의 역린을 건드리면, 한 씨가 이성적으로 믿든 아니든, 결국 마음에 흔적을 남기게 되리라는 것을. 이후 정미를 더 신뢰할지는 한지의 행동에 달려있었다.
청설림 속 홍매나무 옆에서 들었던 말이 떠오르자, 소녀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지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했던 말을 꼭 지켜야 해. 어머니께 정요를 적녀로 올려달라고, 아내로 맞게 해달라고 부탁해야 해.’
한 씨가 이를 듣고 뺨따귀를 때릴지 아닐지는 당연히 신경 쓰이지 않았다. 정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한 씨에게 말했다.
“제가 들었거든요. 지 오라버니가 둘째 언니의 승낙을 받으려면, 오라버니는 분명 어머니께 부탁할 방법을 찾아 오라버니의 정실로 삼을 수 있게끔 할 거예요!”
한 씨는 이를 듣고 화가 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늘 얌전하고 진중한 조카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니, 내가 허락할 거라 생각한 건가? 고작 계집 하나를 위해 이 고모의 가슴에 칼을 꽂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아니면…….’
한 씨가 정미를 노려봤다.
‘아니면 이 계집이 또 병이 도져 미친 소리를 하는 게 아닐까?’
마음속으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 씨는, 손을 들어 잔머리를 귀 뒤로 넘긴 뒤 침착한 척 말했다.
“일단 네 외가에 가보도록 하마.”
정미는 갑자기 함께 가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워졌다.
마차는 계속 달려 회인백부의 중문에 멈춰섰다.
입구엔 정철이 기다리고 있었고, 한 씨가 문발을 걷고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는 급히 손을 뻗어 부축했다.
“어머니, 다녀오셨습니까.”
정월 초이튿날, 날씨는 아직 몹시 추웠다. 양아들의 옥처럼 뽀얀 얼굴이 얼어 붉어진 것을 본 한 씨가 꾸짖었다.
“왜 여기서 기다리고 있니?”
정철이 웃었다.
“올해는 평소보다 늦게 오시길래, 나와서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하면서도, 이미 마차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올해는 태자비마마와 이야기를 좀 오래 나눈 모양이구나.”
한 씨는 정철이 마차 문을 쳐다보는 것을 보고 이어 말했다.
“나를 잡아줄 필요 없다. 네 동생의 발에서 또 피가 나니, 그 아이를 잡아주거라.”
정철은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진 채로, 급히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미미, 발이 왜?”
얼마 전 둘째 오라버니에게 발이 다 나았다고 속인 것이 떠오른 정미는, 정철의 걱정하는 눈빛이 쏟아지자 조용히 발을 치마 속으로 숨겼다.
“아마 돌을 밟아서 상처가 벌어졌나 봐.”
“그러게 집에서 상처를 치료하라고 해도 궁에 가더니. 태자비마마가 보고 싶다고 해도 당장 급한 것도 아니거늘……. 이후 또 이러면 네 책들을 모두 압수할 거야!”
정철이 어두운 표정으로 꾸짖었다. 정미가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어쩔 수 없이 한숨을 쉬며 그녀를 안아 올리고는 한 씨에게 말했다.
“어머니, 들어가시지요.”
정철은 정미를 바로 비서거로 돌려보냈고, 혹여 정미가 국공부에 가지 못해 우울해할까 봐 말했다.
“국공부에서 돌아올 때, 오라버니가 이야기책을 한 권 들고 올게.”
“좋아.”
정미가 기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의심스러운 듯 말했다.
“오라버니, 지금 서재들이 모두 문을 닫지 않았어? 어디서 책을 사온다는 거야?”
정철은 말문이 막혀 어떻게 답해야 될지 몰라 멍해졌다.
그러자 곧 정미가 뭔갈 깨달은 듯 웃었다.
“알겠다. 오라버니도 그런 책을 좋아하는구나? 평소 나는 못 보게 했으면서, 사실 이미 벌써 사 와서 본 거야.”
정철이 억지웃음을 지었다.
정미는 자신이 맞혔다고 생각해, 한술 더 떠서 말했다.
“오라버니, 나도 다른 건 필요 없어. 오라버니가 압수한 그 《수경기》를 돌려줘. 맞다, 그때 내가 펼쳤을 때 하권도 있다고 봤는데, 오라버니한테 있어?”
“미미, 《수경기》가 좋니?”
“안 좋아해!”
정미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좋아하지 않아. 하지만 이야기가 너무 내 애를 태우니까, 결말을 알고 싶어. 오라버니, 《수경기》는 오라버니도 봤지?”
정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읽었을 때, 그 되찾아온 진정한 딸이 나쁜 짓을 많이 해서 결국 죽었는데, 왜 하권도 있는 거야? 오라버니, 그 진짜 딸이 나쁜 짓을 좀 하긴 했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그 딸이 불쌍해. 그리고 그 가족들과 가짜 딸이 미워. 앵앵(鶯鶯)은 돌아가 고생하면 안 되면서, 왜 아수(阿秀)는 상스럽고 저속하다고 하는 거야? 만약 앵앵이 시골에서 자랐다면 그렇게 우아하고 고상했을까? 분명 앵앵이 아수의 자리를 빼앗은 건데, 왜 그렇게 억울해하는지 모르겠어. 정말 얄미워!”
정미가 흥분하여 참지 못하고 화풀이했다.
“그 한수(寒酥) 선생은 어찌 이렇게 미운 이야기를 쓴 건지!”
정철의 표정이 조금 이상해졌다.
“미미는 한수 선생이 싫다고?”
정미가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좋은지 싫은지는 하권을 읽고 나서 말해줄게. 오라버니, 그래서 오라버니에게 하권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있어.”
정철이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고, 정미는 기대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오라버니, 일찍 와야 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정철이 떠난 후, 정미는 아혜를 불러 ‘보태부’를 배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