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51화 (51/375)

51화. 자매

정아는 옆에 서 있던 웅 유모와 다른 궁인들을 흘겨보더니 미소지으며 말했다.

“정미가 확실히 다 컸네. 큰언니도 정미의 말을 믿을게. 정미, 나중에 조카가 태어나면 이모로서 직접 장수 목걸이도 걸어주어야 해?”

정아의 말에 정미의 진지함과 한 씨의 감격은 사라졌고, 방금의 일은 그저 소녀의 농담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정미는 마음이 답답했지만, 하루 만에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의 믿음을 얻으려면 착실하게 한 발짝씩 나아가야 했다.

이에 정미는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한 씨와 정아의 담화를 들었다.

정아는 한 씨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가, 동생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활기를 잃은 것을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정미, 아직 어머니와 할 말이 남아있는데, 정미에겐 재미없을 테니 정원에 가보는 것은 어때? 정원의 동북쪽 모퉁이엔 사계절 내내 피어있는 명자나무가 몇 그루 있어. 마침 아주 예쁘게 피어있을 때란다.”

정미는 정아 앞에서 고집을 부려 더욱 아이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일어나서 말했다.

“그럼 저는 가볼게요. 어머니와 천천히 이야기 나누세요.”

“외투를 잘 챙겨입으렴.”

정아가 당부했고, 천천히 걸어 나가는 정미의 수려한 뒷모습을 보며, 그녀는 한 씨에게 웃어보였다.

“어머니, 정미가 정말 많이 컸네요.”

정미의 외모가 아름답게 변한 것에 이어서 또 다른 장점을 발견한 탓인지, 한 씨는 속으로 흐뭇해하며 웃었다.

“그렇고 말고요. 정미는 키도 커서, 뒷모습만 보면 열여섯 열일곱인 줄 압니다. 이제 다 큰 처녀이지요.”

“정미의 혼사에 계획은 있으세요? 내년이면 정미도 시집을 갈 나이가 되니까요.”

“혼사 말입니까?”

정아의 말에 한 씨의 말문이 막혔다.

그동안 두 모녀의 사이는 소원하고 냉담했기에, 한 씨는 한 번도 혼사에 관한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또 최근 일 년 동안은 사고가 많아, 더욱 생각할 틈이 없었다.

‘벌써 시집갈 나이가 된 건가?’

한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마음속에선 알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마치 몸의 일부분처럼, 여태 좋았든 싫었든 간에, 일단 떨어져 나가 다른 집안의 사람이 된다고 하면, 늘 서운한 마음이 드는 법이었다.

정아는 더욱 답답한 마음을 느꼈고, 참고 참다가 결국 불평했다.

“어머니, 설마 아직 생각해놓지 않으신 건 아니겠지요?”

한 씨가 난처한 듯 말했다.

“사실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셋째는 성정이 이상하여 다른 집안에 시집을 보냈다가 마음에 들지 못할까 걱정이 되거든요. 외가에 시집보낼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요.”

정아는 눈을 크게 떴다.

“어머니, 설마 아직도 정미를 한지에게 시집보내실 생각은 아니시지요?”

경중에 떠돌던 그 쓸데없는 말들이 떠오르자, 정아는 동생 생각에 마음이 아파왔다.

“어머니, 저는 허락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정미가 아직도 한지를 좋아한다고 해도, 용납할 수 없어요!”

한 씨는 장녀가 이렇게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본 적이 없어 의아한 듯 물었다.

“어찌 그러십니까?”

정아가 눈을 내리깔고 차갑게 웃었다.

‘그때, 어머니가 고집 피워서 아버지께 시집갔던 결과가 지금 어떠하지요? 그리고, 태어났을 때부터 태자비의 운명이었던 저는 또 어떠한가요?’

태자의 냉담함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그녀가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대혼(*大婚: 임금의 혼인날)이었던 그 해, 태자는 외가의 사촌 동생인 화(華) 아가씨를 측비로 삼고 싶어 했으나, 화 귀비가 절대 동의하지 않자 대혼 삼 일 전에 화 아가씨는 자결했고, 정아는 역사 이래 처음으로 대혼 첫날밤 홀로 빈방을 지킨 태자비가 되고 말았다.

이후 정아는 태자와 화 아가씨가 어려서부터 다정하게 지냈고, 일찍이 서로 좋아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정아는 가끔 생각에 잠기곤 했다. 만약 화 귀비가 그들을 막지 않았고, 화 아가씨가 측비가 되었다면, 지금쯤 그들의 감정은 나날이 견고해졌을 테니, 태자비인 자신의 신세는 점점 우스워졌을까? 아니면 화 아가씨도 점점 동궁의 평범한 일원으로 전락하여 태자가 올 날을 손가락으로 세어보게 되었을까?

화 아가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정아는 그 모든 것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심지어 가끔 화 귀비를 원망할 정도였다. 만약 그때 화 아가씨를 궁에 들였다면, 사람들이 뒤에서 화 아가씨가 규율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화 아가씨가 죽으니 아무도 화 귀비의 잘못을 이야기할 수 없었고, 오히려 정아 자신이 사람을 포용하지 못해 한 쌍의 연인을 갈라놓았다는 생각을 들게 한 것이었다.

소의 머리를 눌러 억지로 물을 마시게 하면, 사람들은 모두 그 소를 불쌍히 여겼다. 물의 심정을 묻는 사람은 어디 있겠는가?

정아의 삶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정해져 있었으니, 그녀는 동생이 자신과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정아는 고개를 들고 한 씨를 바라봤다.

“한지가 정미에게 남녀의 정이 없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후 한지가 정미에게 조금이나마 마음이 생긴다면, 쓸데없는 소문이 퍼지는 것을 가만히 두진 않겠지요. 어머니, 한지와 정미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만약 정미가 죽어도 시집을 가야 하겠다 하면, 제가 악역이 되겠습니다.”

“마마께서 나설 필요 없습니다. 정미가 한지에게 시집가려 하면, 제가 그 아이의 다리를 부러트릴 거니까요! 마마의 큰외숙모가 한 말을, 전 결코 잊지 못합니다. 차라리 제 딸을 평생 집에 머물게 하고, 시집도 보내지 않은 뒤 제 뺨을 때리도록 하지요!”

한 씨의 단호한 말에, 정아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럼 어머니께서 정미를 외가로 시집보낸다고 하심은, 설마 평이를 생각하시고 한 말씀인가요? 평이는 정미보다 한 살 많으니, 나이도 딱 맞네요. 흘이는 조금 어리구요.”

한 씨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형제자매들 중에 마마의 넷째 외숙부가 저와 가장 친하긴 하지만, 정미를 그 집에 시집보낼 생각은 없습니다. 보고 들으며 자란 것이 있으니, 아들은 아버지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기에 어떤 일들은 습관이 되곤 하지요. 어찌 되었든 간에 저는 정미의 어미입니다. 그 아이에게 그런 안 좋은 일이 생기길 바라지 않습니다.”

정아가 공감했다.

넷째 외숙부는 그동안 첩이 셋, 넷도 아닌, 그야말로 정원에 봄빛이 가득했고, 한평은 성실하고 정이 많은 아이로 보였으나, 아직 어리기에 성인이 된 후에는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자 정아는 갈수록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 어머니의 뜻은…….”

한 씨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화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화서요?”

정아가 놀라 손수건을 들어 입을 가렸다.

한 씨는 마음이 편치 않은 듯 기침을 한 번 하고는 말했다.

“마마와 다른 이들이 화서의 출신이 좋지 않으며, 좋은 짝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제가 냉정한 눈으로 봐왔는데, 몸이 약한 것 외에 다른 것은 좋은 아이입니다. 마침 정미와도 사이가 좋구요. 나중에 두 아이가 나가 살면 평생 함께할 수 있을 듯합니다.”

여기까지 말하고는, 한 씨는 느낀 바가 있는지 탄식했다.

“신분과 지위가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정미의 외가는 국공부이고, 마마 같은 언니가 있으며, 또 철이가 감싸주고 있는데 설마 굶기라도 하겠습니까? 자신을 지극히 돌봐주는 사람이 그 무엇보다도 참된 것 아니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거친 녀석이 화서와 싸운다 해도, 최소한 화서는 그 아이를 이기지 못할 테니!’

“어머니…….”

정아는 눈가가 시큰거렸지만, 웅 유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저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니 화서도 나쁘지 않군요. 어머니의 말씀이 맞습니다.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을 얻는 것이 가장 어렵지요…….”

두 모녀는 마주 앉아 잠시 침묵했고, 창밖의 새가 기쁘게 지저귀는 소리만 어렴풋이 들려와 봄이 왔음을 깨달았다.

* * *

정미는 기쁘게 울고 있는 새의 지저귐 속에서, 조금 젖은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곤 여유롭게 동궁 화원의 동북 모퉁이에 도착해 명자나무를 감상했다.

명자나무는 한 자(*약 30cm) 정도의 높이였고, 허리춤 정도 높이의 항아리에 심어진 채, 아름다운 꽃이 곱게 피어있었다.

맑은 향기가 코를 찔렀다. 정미는 명자꽃 옆에 서서 숨을 들이마셨다.

물론 그녀는 아무래도 이렇게 가두어 기르는 명자나무보단 청설림에서 제멋대로 자라는 매화나무가 더 좋았다.

“거기 누구시지요?”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미는 고개를 돌렸고, 일장(*一丈: 약 3m) 거리 앞에 자색 유군(*襦裙: 짧은 윗옷에 긴 치마)에 고계(高髻)를 틀어 올린 여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을 살피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눈엔 경계가 가득했으며, 특히 정미의 모습을 분명히 본 후에는 더 심해졌다.

정미는 이 여인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태자의 측비 중 하나인, 장군 가문 출신의 손(孫) 양제(良娣)였다.

어른들은 정미 또래의 소녀들에겐, 평소 태자비와 태자가 어떤지, 혹은 태자가 누굴 총애하는지 등의 일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 정미는 그저 예전에 자주 궁에 왕래한 덕분에 시간이 지나면서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태자가 이 손 양제에게 꽤나 잘 대해준다는 것을 말이다.

정미는 손 양제가 태자와 함께 화원에서 산책하는 것을 가끔 본 적이 있었다.

“신녀(臣女)가 손 양제마마를 뵙습니다.”

정미가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손 양제의 눈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신녀’ 두 글자에 그녀의 눈에 가득했던 경계심이 조금 풀렸고,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어디 집안의 아가씨입니까, 어찌 여기에 있지요? 본 적 없는 아가씨군요.”

정미는 계속 무릎을 꿇은 채였고, 시선은 손 양제의 넓은 치맛자락에 꽂혔다.

자색의 치맛자락에는 파란 공작이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만약 이 무릎을 꿇은 자세가 아니었다면 이 낯선 양제마마 앞에서 치마의 무늬를 신경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아름다운 공작무늬에, 정미는 손이 떨렸다.

환상 속, 그 모든 것의 시작은 청색의 유군을 입은 정요가 천천히 쓰러지고, 피가 온 땅을 적셔 치맛자락의 공작무늬를 어둡게 물들인 장면이었으니까.

‘정요가 입었던 옷은 내가 예전에 본 적이 있었던 옷, 태자 양제의 평상복이기 때문이었어. 정요는 태자 전하께 시집을 간 것이었구나.’

마치 북의 끝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정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큰언니가 그 어두운 방에서 참혹하게 죽은 뒤, 정요가 태자 전하께 시집을 간 건가? 그럼, 큰언니가 출산하던 그 날, 정요가 그 이상한 칼과 교도를 들고 나타난 것은 일찍이 큰언니가 난산하여 죽으면 바로 배를 갈라 아이를 꺼낼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야? 태자는? 그는 왜 정요가 거기서 나타나는 것을 윤허했으며, 정요에 대한 신임은 또 어디서 왔단 거야?’

정미는 만약 자신이 태자에게 그 깜짝 놀랄만한 말을 했다면, 이무기가 수놓인 검은 신발로 걷어차였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생생한 진상에 열네 살의 생일도 지나지 않은 소녀는,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했고, 구역질을 할 것만 같았다.

정미는 가슴을 쓸며 한 가지 생각만 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반드시 큰언니와 아이를 지켜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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